작고 사소한 것들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모순'이란 단어는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뜻이지만 그에게 먼저 드는 생각은 '참, 거짓이 동시에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오랜 기간 수학선생이라는 이력 때문이다. 평생 숫자를 다룬 그에게 세상을 보는 도구가 숫자다. 하나하나의 숫자에도 그 자체의 개성이 있다. 예를 들자면 0,1,2는 아주 다른 숫자들이다.
0이 아무런 내용물이 없는 허전한 느낌이라면, 1에서는 고독과 자유가 공존하는 느낌이고, 2에서는 깔끔함이 느껴진다. 설명을 덧붙이면 이렇다. 0의 허전함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자신이 내세웠던 전제들을 스스로 부정하여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다. 나방 한 마리가 생각난다. 낮동안 바위틈새나 나무들 사이에 숨어서 잠을 자다가 저녁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 날개와 다리를 움직이며 땅바닥을 빙빙 돌다가 달을 길잡이 삼아 날아오르지만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길을 찾다가 그 옆의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길을 찾다가 또 다른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다시 길을 찾다가 비로소 올바른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고는 흩날리는 탐스러운 눈송이처럼 가로등 불빛 주변을 밤새 헤매다 몸도 정신도 기진하여 어느 담벼락에 붙어 마지막 숨결이 끊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머무르며 자신이 잘못된 길에서 헤맸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지만 날아갈 힘을 잃고 미세한 발톱으로 버티던 힘도 다하여 불어오는 바람에 몸은 땅에 떨어지고 이리저리 바람에 휩싸이다가 먼지 쌓인 우중충한 구석 빼기로 보내지는 그런 나방. 0이 현실의 단단함에 꺾여버린 상태라면 1은 현실의 단단함에 맞서는 느낌이다. 얼굴에 바람을 느끼며 달리고, 경사진 곳에서는 미끄럼을 타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세상과 부딪히며 몇 번이나 발가락을 채이고 손가락을 찧고 무릎이 까지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귓가에서 맥박이 고동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랫동안 시간을 끌면서 저무는 여름날에는 여전히 옆구리가 아파올 때까지 달리기를 하고, 혼자 운동장에서 공을 허공으로 던지고 떨어지는 공을 잡고 다시 허공으로 조금 더 높이 던지고 다시 받는다. 연녹색 테니스 공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순간, 세상은 그와 연녹색 공과 푸른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한 명의 개별적 존재임을 깨우친다. 2는 소수로서 다른 숫자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품위를 간직한 수이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므로 쓸데없는 곳에 기웃거리지 않고, 난감한 순간에도 언동에서 고상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맡아 안는다. 자신의 실존의미를 알고(여기서 실존이란 사적인 실존이 아니라 공적인 실존에 가깝다) 모든 일에 진지하다.
글은 계속된다:
7이 단발적 비극이라면 8은 반복적 비극이 느껴지는 수이다. 7은 가난에 떠밀려 사회가 부여한 계급에 순응했던 한 인간이 계급을 뛰어넘으려고 했으나 좌절하는, 다행히 계급을 뛰어넘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상류층의 조롱을 견뎌야 하는 비극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사랑이야 말로 가장 치열한 계급적 모순이 튀어나오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쓸쓸함이 배어있다. 이에 비해 8은 수축과 이완의 숫자다. 달리 말하면, 속박과 해방감이 교차하는 수이다. 속박은 교차점이 검질기게 달라붙은 점성의 기운이고, 해방감은 멀어지며 끈적임의 인력이 해소되는 자유로움이다. 교차하는 순간, 시공간이 일치되어 사건이 발생되고 다시 멀어지며 사건은 해결되고 기억은 채색되고 망각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 거라고 다짐했던 한 인간이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삶, 지루한 일상은 반복되고 마치 일방통행로에 들어선 듯 멈출 수 없는 길, 그 길 위에서 마치 교통사고처럼 만난 그와 그녀가 꿈꾸는 길이 같은 길이기를 바라지만 그 길은 각자가 꿈꾸는 다른 길이고 그 길은 반복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는 그런 길 같은 수이다.
그와 그녀가 꿈꾸는 길이 같은 길이기를 바라지만 그 길은 각자가 꿈꾸는 다른 길이고 그 길은 반복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는 그런 길...이라는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 들여다보다가 그는 뭐라 중얼거리며 아이방으로 건너간다.
그는 글을 쓸 때 내면의 낳선 힘을 느낀다. 그 힘으로 순간의 모든 것과 기억들을 쓰고 싶었다.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 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방식으로,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라고 말한 프루스트처럼,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으로 유년시절 콩브레 마을에서 겪었던 모든 추억이 떠오르듯, 그도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모든 순간을 쓰고 싶었다. 시간은 사라졌지만, 하나의 시공간에 모든 사건이 있다. 그 순간이 영원한 현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일지 다시 궁금해진다. 여러 개념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시공간이란 시간과 공간이 섞여 있다는 말이고, 시간과 공간을 구부러뜨리는 힘이 중력이라고 했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우주의 시공간이라는 '면'위에 놓이면 시공간이 왜곡되어 주변의 물체가 곡면을 타고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게다가 운동하는 물체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각자는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각자가 운동을 하면 나의 현재는 누군가의 미래이고, 누군가의 미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과거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이고, 누군가의 현재는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는 나의 과거 일수 있다. 그러면 나의 현재는 과거와 동시일 수 있다. 연속적이지만 앞 뒤가 어우러지는 형태이다. 그런데 어차피 시간에 대한 기억은 사건의 기억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비선형은 아닐까, 모래시계처럼 사건이 쌓이는 형태. 어떨 때는 금빛모래가 반짝이고 어떨 때는 은빛모래가 반짝이고 때로는 아무것도 반짝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얼굴과 팔을 간질이는 햇살, 여며진 옷핀이 살갗에 닿아 느껴지는 차가움, 신발을 벗고 들어간 잔디밭의 간지러움, 오르내리며 어지럽게 돌던 회전목마, 빨랫줄에 걸려 있는 옷들이 물방울을 만들며 떨어지는 순간, 여름방학 전날 버스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던 순간, 가족은 억지 미소를 짓고 사진사는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쓴 체 카메라뒤에서 번쩍이며 플래시를 터트리던 순간, 어떤 여름날 마당에는 하얀 빨래가 펄럭이고 그 사이로 뛰어가는 다리만 보이던 발랄함, 투명한 유리안에 빨강 노랑 파랑의 물결이 들어간 구슬을 빛에 비추어 보던 순간, 눈을 뜬 아침 눈 덮인 세상은 고요하고 유리창에는 얼음꽃이 피어있고 손으로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렀던 순간, 하늘에는 함박눈이 날리고 그녀는 입을 벌리고 눈송이는 입안에도 눈썹에도 떨어졌던 순간, 자전거를 배우고 나서 바람을 가르며 날 듯한 마법 같은 순간, 엄마 무릎에 누워 귀 청소를 받고 있을 때 빰이 엄마 허벅지에 닿았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햇볕이 가득한 마당에서 엄마와 잡고 턴 이불의 출렁거림, 풍선의 끈을 잡고 있던 손의 간지러움 그리고 달아나는 풍선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순간. 그런데 사뭇 궁금한 게 있다. 사라진 기억들, 작고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는지.
그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과연, 하고 독자가 무릎을 탁 치게 할 만큼 번뜩이는 글이기는커녕, 끄적거린 글들은 누군가의 글을 흉내 낸 글이든지, 아니면 읽고 또 읽어 마침내 자신이 쓴 글처럼 여겨지는 것들도 있다.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단어들은 도드라져 눈에 거슬리고, 문장과 문장을 건널 때마다 미끄러지기 일쑤고, 덜 익은 사고는 사변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은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반응으로 서로가 제각기 움직인다. 물론, 오랜 시간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고민하며 서성거린 느낌이 있긴 하다. 계속 생각에 잠겨,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우고, 조금 더 썼다가 또 지웠다.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랬다 치더라도, 그는 자신의 글이 뭔가 색다른 차원의 진지함을, 더 강하고, 더 격렬하게 건들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감정을 부각해서는 안된다. 아련하고 섬세하고 함축적으로, 감정이 마르지 않으면서 흠뻑 젖지는 않게, 거기에다, 그 모든 것을 유머를 잃지 않고 간결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영민하지 못한 그의 머리 탓에 매혹적인 이야기, 깊이 있는 사고, 빛나는 묘사력은 바라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가 생각하는 간결함도, 그 간결함의 번득이는 칼날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려 나갔는지 모른다. 음성학적 재미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그의 글은 내용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고, 형식은 비 오는 땅처럼 어지럽습니다. 읽다 보면 "에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뭐, 그렇다고 글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을 씀으로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한 가지 믿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설의 소재와 형식은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빈 공간이 있는 것과 같다. 온통 틈새이다. 메꿀 수 있는 공간은 넓다. 이야기의 빈틈을 풍부한 상상력과 세심한 표현력으로 채우고, 다양한 형태의 별 의미 없는 어떤 순간을 가져와서 재량껏 바꾸면 된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솜씨 좋게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사건은 같을지 몰라도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고,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바꾸면 한정된 사슬을 끊고 보편적인 영속성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글 한번 제대로 써보자는 그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아름다운 글을 보면 정체 모를 질투심이 솟지만 하찮은 글을 볼 때면 기분이 안온해진다. 간혹, 스스로 아름다운 글을 쓸 때면 모든 힘듦은 잊히고 끈질기게 달라붙던 우울감도 그 순간은 사라진다. 잠시 비를 피하는 순간처럼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이다. 그와 세계를 잠시 차단하는 피안의 세계. 진정, 글 한번 제대로 써보자는 그는, 별이 총총 떠 있는 하늘을 우러러보듯, 소설을 향한 티 없는 고귀한 희망보다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글로서 신뢰받지 못한 그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거다. 성공해서는 자신이 남모르게 고생해서 쓴 작품도, 그다지 고생하지 않은 척할 거다.
침대옆 테이블 위의 액자를 바라본다. 주름전등갓을 씌운 조그마한 램프의 차분한 빛이 액자 속의 사진을 비춘다. 3년 전에 그가 찍은 사진인데 일종의 자긍심과 관련이 있다. 사진 속 아이는 카메라를 보면서 씩씩하게 웃고 있다. 세상에 겁먹지 않겠다는 배짱 좋은 모습이다. 해 나른한 오후였다. 쪽창으로 백묵 같은 볕이 들어오고, 볕 사이사이로 빛나는 금빛 먼지들이 날아다녔다. 벽에는 사물들의 사진과 거기에 대응해 이름을 붙인 커다란 그림이 있다. 그 앞에,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를 입고 색연필을 단단히 쥐고 있는 아이가 있다.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인간사회 속에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초유의 세상을 발견하고 있다. 그때 그녀는 하얀 문을 열고 들어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텔레비전 화면 위로 고개를 비스듬히 둔 그녀의 뒷모습이 비친다. 그녀는 덜 감은 동그란 털실을 손에 쥔 체, 유별난 애착의 눈빛을 아이에게 보내고 있다. 먹고사는 근심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순간, 그녀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둘은 학원강사였다. 그녀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사회를 강의했고, 그는 소설가를 꿈꾸며 국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키가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 틈에 갖다 놓아도 눈에 잘 띄지 않을 평범한 얼굴이다. 자유로움에서 오는 생기는 없지만 안정된 무언가가 나쁘지 않았다. 달리 보면 코르셋처럼 꽉 막힌 피동적인 태도였지만 그들이 편안히 지내기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그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따뜻했고, 겉으로 보기에 정신적으로 더 온전한 모습이었다. 그녀도 그의 진지하고 침착한 면을 좋아했다. 그의 생활기록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침착하고 조용하다
(2) 사교성이 없다
(3) 학습의욕은 없으나 독서를 좋아한다
생활기록부의 내용대로 말하자면 '고독하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학생'이다. 게다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지루해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 긴 배차간격의 통학버스를 기다릴 때도 지루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목적 없는 공상을 하거나 운동화의 앞코로 마른 황토 위에 이름 모를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일찍부터 자아를 인식했다. 머리가 좋다는 건 아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자기만의 구석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아이들이 작은 소동에도 허둥댈 때 그는 무심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라 아이들과 다툼도 없었다.
그런 그를 그녀는 무해한 남자로 생각했고, 그를 그의 본연의 모습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대했다. 다만,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에 대해 걱정은 들었지만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낀 그는 어느 저녁날 그녀 집 근처 공원벤치에서 늦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무슨 얘기가 정확히 오갔는지는 기억나는 게 많지는 않지만 그는 그녀에게 함께 있고 싶다고 서툴게 말했다. 그의 서투름을 그녀는 정직과 신실함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와 나란히 앉아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승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둘은 그날 밤 부드러운 온기에서 서로에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고, 각자의 특이점은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와의 관계 후, 그는 원천적인 해방감과 어른이 된 느낌을 받았다. 집착하는 어머니라는 대지로부터 해방감이고, 의존적인 아이에서 독립적인 어른이 되었다.
그가 느끼기에, 서로는 웬만큼은 어울리고, 그녀와 함께 하면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그녀가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서 상대방을 조종할 거 같지도 않고, 물론, 누군가를 오해하기로 작정하고 밑바닥까지 파고들 성향도 아니었다. 그와의 만남은 그녀에게도 새로운 삶의 기대를 품게 했다. 그에게 마음이 끌려 사랑하게 된 부분도 있지만 그건 사실 결과물이다. 그녀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빈 공백이 있을 무렵, 기쁨을 주는 존재가 생겨 사랑하게 된 것이 진실에 가깝다. 사랑의 대상이 반드시 그일 필요는 없었다.
짚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가 보는 그녀의 수동적인 순수와 기다림의 미덕은, 실은, 그녀 집안 환경과 관련이 있다. 그녀 가족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체로 호감을 샀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개중에는 나쁜 기억 한두 개 정도는 누구나 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술만 마셨다 하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입을 단단한 고정쇠처럼 꾹 닫고 있었고, 몸가짐은 화강암 벽처럼 흔들리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신 그런 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는 척을 하며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아버지를 피해 조붓한 골목길로 나가는 일이다. 방에서는 움직이는 커튼의 그림자를 바라보거나 집이 움직이면서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비비 꼬거나 손톱 옆의 각피를 물어뜯으면서 말이다. 껍질은 벗겨지고 피가 흐르면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짜고 비린내 나는 따뜻함이 몸속으로 흘렀다. 너덜너덜한 손톱 가장자리를 보며, 간혹 자상했던 아버지의 면면을 생각하고 때리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 적이 있다. 아버지는 잘못이 없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사랑해서 때린다고, 그래서 언젠가는 사랑을 받고 행복한 결말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버지는 자신의 편이고, 지금은 아버지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 기준에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래아이에 비해 성숙해 보인 것, 다시 말해 소녀의 삶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애어른이 된 것은 사랑받지 못한 결과이다. 자신의 미심쩍은 행위를 곁눈질하고, 자신밖에 또 다른 자신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버릇도 이때부터 생겼다. 아버지를 피해 밖에 있을 때는 달무리가 뜬 동네를 한참을 돌다가 집 앞 가로등 전등밑에서 자신의 키보다 짤막한 그림자의 움직임을 바라보곤 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어머니가 찾아와 ‘아버지, 잔다, 들어가자’고 했다. 헐렁한 소맷부리 밖으로 나온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으면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중, 고등학교시절은 그녀의 보호막이었던 엄마가 투병생활을 하였다. 간혹,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과 찌르르 저려오는 느낌을 말하곤 했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병원을 갔었으나 더 큰 병원에 가게 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을 잠재워 주길 간절히 기대했던 의사는 정밀검사를 위해 그녀를 병원 여기저기로 보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온몸으로, 암은 소리 소문도 없이 퍼져 갔다. 마치 나무줄기의 수줍은 꽃봉오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수술도 하고, 항암 치료하고, 방사선 치료를 하였다. 약봉지는 서랍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참을성이 많던 엄마도 항암 치료과정은 많이 힘들어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그녀는 몇 분 만에 호흡곤란을 겪기도 하고, 산소포화도도 떨어지고,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했다. 그 이후에는 아프다면 진통제를 주고, 목이 마르다고 하면 수액을 놓아주고, 숨이 가빠지면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제스처이다. 임종이 다가오면서 임종실이라는 1인실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똑같은 몸이었지만 그녀의 육신은 온기를 잃어버린 체, 유리창을 지나쳐 온 평행사변형의 햇빛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기적같이 바라던 일상 대신 죽음이 가족 앞에 왔다. 심장이 내려앉고 문득 바닥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했었지만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녀를 위해 신앙과 화해를 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많은 서약과 함께 기도는 시작되었다. 기도의 간절함은 밤마다 점점 강해졌다. 한 번의 배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두 번의 배신을 불러오듯, 믿음은 더 큰 믿음을 낳았다. 그렇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은 지옥 자체였다. 지옥은 특정한 공간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소통할 수 없으면 그곳이 지옥이다. 숨을 쉬기도 힘들고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같이 버텨 왔었는데 그녀만 남겨진 거다. 배심감도 느꼈고 뭔가 단단히 어긋나 있다는 느낌과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죽음을 부정했고, 그녀의 기도를 받아주지 않은 신에 대해 분노했고, 우울함과 무기력에 삶은 끈적였다. 끈적였다기보다는 체인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헛돌았다.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인간의 실존이란 게 별거 없었다. 하찮고 볼품없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었다.
엄마가 투병하던 몇 년 동안은 병동이 그녀에겐 세계의 전부였다. 그녀는, 아픈 엄마라는 현실과 미래의 가능성사이에 끼여 있었다. 학교생활은 정상적이지 못했다. 친구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간혹 학교에 가면 주의를 쏠리게 하지 않으려고 꼼짝을 안 했다. 마치 수업 중에 화장실이 급한데도 아이들의 쏠리는 시선 때문에 참는 거와 같다.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습관 때문인지 그녀는 어른들에게 '애어른'같다는 말을 들었다. 언젠가 등굣길에 친구들이 그녀를 앞서 걸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인지 그들은 소리 내어 웃으며 서로 밀치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녀도 달려가 그들 앞에 "짜잔!"하고 외치며 나타나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혹시나 말이 끊기고 자신에게 어색한 눈길을 던질까 봐 천천히 걸으며 간격을 넓혔다. 설령, 누군가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면 어설프게 "어, 안녕" 하고 짤막짤막하게 대꾸할 정도밖에 안 됐다. 어느 날 체육시간, 주번이던 친구와 교실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창턱에 걸터앉아 있었고, 친구도 슬그머니 올라와서 가까이에 앉았다. 둘은 다리를 흔들거렸다. 다리를 타고 시원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녀의 친구는 텅 빈 교실을 한두 번 두리번거리고 나서 말했다. 주번이라서 땡볕에 운동장에 나가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는 일종의 권유였다. 그녀는, 어, 그러네, 하며 급하게 미소 지었다. 둘은 운동장을 바라보다 다리를 흔들던 걸터앉은 창턱에서 내려왔다. 고함을 지르고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그런 비슷한 장난을 한 후, 친구관계 비슷한 것으로 되었지만, 또다시 병원에 있다가 학교를 가면 원래대로 돌아갔다. 누군가를 안쓰럽게 지켜보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학창 시절도, 친구들도, 엄마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아버지의 늙어가는 모습에 동요가 되었다. 그러다 가 직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조금은 소극적이었다. 위험한 삶에 누군가를 끌어들일 순 없는 거라 생각했다. 끌어들이는 방식도 무작위다. 자신이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 아이도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태어나는 것이 서글프게 생각했다. 한 번 본적 없이 열 달 뒤에 서먹스레 만난다. 서로가 찾고 싶은 상대방인지 모른 채,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생으로 확 끌려간다. 그런데, 실은, 이런 이유는 부수적이다. 그가 두려운 건, 무엇 하나 강렬하지 않은 뜨뜻미지근함, 더덜뭇하여 맺고 끊는 맛이 없는 우유부단함, 주변을 맴도는 경향 내지는 차가운 본성 등 그의 유익하지 않은 어떤 부분도 아이에게 영향을 줄까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왠지 모를 억울함까지.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이의 양육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이제 더는 서로의 이름이 아닌 엄마, 아빠로 늘어진 입에 유동체의 이유식을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잠자리를 살펴주는 생각을 할 때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었다.
이불을 몸에 돌돌 만 채, 엄마 옆에 찰싹 붙어 자는 아이를 바라본다. 살이 오른 작고 하얀 손, 완전무결한 손톱의 반달, 보드라운 머리칼. 아이를 깨울 시간이지만 자는 아이의 온기와 체취를 느끼고 싶어 옆에 눕는다. 아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밀착 킨다. 마음이 따뜻하고 보드랍다. 아이를 낳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그는,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져있다. 아이가 뒤척이자, 사랑해,라고 말한다. 어떤 미래의 슬픔이 느껴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생각난다. 80대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운명을 지닌 '벤자민 버튼'과 그 곁에서 젊어지는 그를 바라보는 '데이지'. 한 때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로 만났던 두 사람이 이제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로 만나 사랑을 나눈 뒤, 등지고 옷을 입는 그녀의 쭈글쭈글하고 검버섯 핀 몸을 바라보고, 시간이 다시 흘러 어린 벤자민과 노년의 데이지가 손을 잡고 걷는 뒷모습, 그리고 요양원에서의 그녀가 이제는 갓난아이가 된 그를 흔들의자에서 안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