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 Oct 13. 2024

05 : 30 AM

아무것도 없어

                                                            ¿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어. 아득한 동굴처럼 입을 벌린 그곳에서 뭔가 미끄러운 것이 잡혔어. 잡으려고 하면 미끌미끌하여 이리저리 빠져나가버렸어. 간신히 물컹한 그것을 잡아당겼지.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너의 모습을 보았어. 방금 허물을 벗은 연분홍색 뱀 같기도 하고, 미끄덩한 붕장어 같기도 했어. 자세히 보니 좁쌀 같은 것이 도톨도톨 돋아있는 검붉은 놈이었어. 난 그 흉하고 끔찍한 그놈을 잘라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급히 손으로 베갯 속을 더듬거렸어. 숨겨놓았던 식칼이 잡혔어. 악몽을 꾸지 않으려고 베갯 속에 숨겨두었던 식칼이지. 이때다 싶어 한 손으로 발버둥 치는 그놈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힘껏 내리쳤어. 식칼은 점액질이 흐르는 그놈의 미끄덩한 살점을 철퍼덕거리며 가르고 들어갔어. 통쾌했어. 그런데 미끄덩한 그놈은 잘리지가 않았어. 힘을 줄수록 그놈은 버둥거렸고, 그 힘이 손에서도 느껴졌어. 식칼은 그놈 몸에 반쯤 걸려있고, 열개(裂開)된 그놈 몸에서 끈적한 점액질이 나와 식칼을 감쌌어. 그리곤 더 날름거리는 검붉은 놈으로 변했어. 더 센 놈이 된 거지.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치고 싶었어. 근데 말이 안 나와. 나의 혀는 날름 대기만 하고 꼬인 혀가 움직이지 않았어.

                                                                           ¿                                                                       

                                          

드르륵드르륵, 진동과 함께 알람이 울린다. 오전 5시 30분. p는 얼떨떨한 상태로 잠에서 깬다. 매일밤 스스로 잠들기를 열망하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약에 의존하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한 기운이 얼굴에 깃들어있다. 몸을 빠져나갔던 의식이 돌아오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댕투성이 미지의 힘들이 엎치락뒤치락 뒤엉켜 살육을 벌인다. 그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전쟁터이다. 그는 방 안에서 왔다 갔다 서성이다 한동안 붙박인 듯 창가에 선다. 새벽의 유리창, 그의 모습이 흐리게 떠 있다. 흐리게 떠 있던 꽤나 닮은 유리창의 그도, 이쪽의 그를 바라본다. 겉모습의 그는 그리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나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에 의해 괴상한 존재로 취급받을 나이는 맞다. 눈은 더 이상 맑지 않고, 머릿결은 더 이상 윤기가 흐르지 않고, 피부는 더 이상 탄력적이지 않다. 요즘 그의 눈에는 웬만한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 애석한 일이지만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한 가지 더 애석한 일은 늙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이젠, 길모퉁이를 돌다가 어떤 사랑의 꿈이 그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인들이 그에게 더 이상 한눈을 팔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치명적이다. 볼품없는 수컷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간혹 젊은 여자의 거만한 시선을 받으면 그의 노화는 급속도로 진행된다. 마치 햇빛을 쐰 뱀파이어 같다. 그녀 앞을 스치듯 지날 때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은 가빠진다. 그녀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만 같다. 만약, 아름다운 노래에 취해 플로어에서 춤을 춘다면 젊은이들이 하나둘 플로어에서 사라질 거다. 그런 나이이다. 그가 창가로 다가서자 모습은 뿌옇게 번지며 흐릿해진다.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뭔가가 잘못되었어,라고 거울에 비친 그에게 소리친다. 친애하는 세상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쓸모없는 감정의 수하물들. 실현 불가능한 생각들, 이루어졌을 뻔한 일들, 체념해 버린 생각들, 원했으나 행하지 않은 일들, 한 번도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들, 희망도 목적도 없는 생각들,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해결될 거라고 막연하게 시간에 기대었던 적도 있다. 하루는 희망을 품고, 하루는 망설였고, 하루는 머뭇거리고, 하루는 미적거리고, 하루는 주저주저하고, 하루는 엉거주춤하고, 그리고, 하루는 희망을 잃었다. 하루종일, 삶은 그에게 짐이었다. 몇 년을 돌이켜보면, 그가 어떤 종류의 고통도 겪지 않고 지낸 날은 하루도 없다. 시간은 그를 짓이기고 이리저리 찢어버리고 납작하게 변형시켜 버렸다. 삶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를 느끼기 전에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냐'라고. 다시, 내면 깊숙한 곳에서 피로감이 치밀어 오른다. 한 때는 평온함과 안정감을 주던 것들도 결국 진한 피로감으로 다가온다.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결국 검정이 되듯이. 좁은 방 안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보고 침대 끝에 앉아 얼굴을 손으로 쓸어본다. 사물들의 무게중심은 낮아지고 중력에 바닥이 무너져 광대한 빈 공간으로 끌려 들어갈 거 같다.


주변사람들은 그에게 심리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남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깊이 있는 책 한 권 읽지 않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맡기라는, 젊은 그들에게 살아온 인생을 얘기하며 울고불고할 것까진 없지만 스스로 자기감정에 취해 눈물, 콧물 쏟아내서 처방전을 받고, 약 타러 가는 순간에도 달려가는 차에 뛰어들까 봐 정신을 차리는 기분, 약을 타고나서도 다음번 약을 탈 때까지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겠지 하고 안심하는 씁쓸함을 경험하라고 한다. 몸이 흠칫거릴 정도의 불안함과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에 허우적거릴 때는 그도 주변사람들의 말대로 생각을 고쳐먹을까도 했다. 외로움은 처음이자 마지막 맛본 인생의 쓴맛이라,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누구에게라도 말해 볼까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외로움이 다른 사람의 만족감을 상상하고, 가지지 못한 질투심과 엿보는 관음증과 관련이 있다면 나이 들어 느끼는 외로움은 결국에는 자기 파괴본능을 끄집어낸다. 그럴 때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의 얘기를 처음 듣는 그들은 사적인 얘기에 관음적인 흥미를 보일 거다. 그러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비참함에 듣는 둥 마는 둥 지루해하고 귀가 귀찮을 거다. 그리고는 다른 이의 불행을 볼 때 반사적으로 느끼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악의적인 기쁨과 자신은 비껴 나 있다는 묘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도 알고 있다. 그의 엉켜버린 인생은, '힘내'라고 말하는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삶의 용기를 준다는 것을, 적어도 자신은 저 정도는 아니라는 묘한 만족감을 주는 것을. 누군가의 존엄을 희생시켜 기쁨을 얻는 자들, 그 친구들은 슬픔을 약간 흉내 내며 위로랍시고 "딱하기도 하지, 끝이 좋아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됐다 그래, 누구의 인생도 끝이 좋을 수는 없는 거다.          


그의 나이 정도가 되면 여러 가지를 축적해 놓아야 한다. 풍부한 경험, 꿰뚫는 직관, 현명한 지혜, 성취 같은 것 말이다. 그중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게 '돈'이다. 결국에 그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하나 문제가 있는 듯해도, 따지고 보면 돈이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초등학교시절이었을 거다. 그는 돈을 모으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다고 저금의 형태는 아니다. 바지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만지작 거리며 동전 한 개를 동전 위로 떨어뜨리며 나는 쨍그랑거리는 걸 좋아했다. 그 돈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연대별로 배열하고 빠진 년도를 보며 아쉬워 했다. 그런 돈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사실이다. 돈은 인생의 모든 측면을, 늘씬한 바늘이 검은 옷감 위를 들락날락하듯, 관통하며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었다. 전부인 하나를 잃자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잃었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몇 번의 선택은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풍족한 편이어서, 대다수 사람을 괴롭히는 빈곤과 박탈감은 모르고 지냈었다. 그렇다고 자질구레한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돈인 적은 없었다. 돈벌이가 좋았기에 모든 것을 이래저래 굴러가게 만들었다.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보다 많이 샀다. 헤픈 구석이 많았다. 곧잘, 일의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었다. 판매원들의 간섭 없이 하는 쇼핑을 즐겼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슈트를 좋아한다. 그 당시는 잠들기 전 다음날 할 일을 준비하고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입고 나갈 옷차림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었다. 붙박이장의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어떤 옷을 입을지 점검해 본다. 사놓고 거의 걸쳐보지 않은 슈트나 얇은 종이로 가득 찬 정체 모를 상자들, 세탁소 비닐에 싸인 셔츠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빼곡히 걸린 옷을 스치는 손끝이 간지럽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락에 맞추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인다. 격식 있고 시크한 블랙슈트, 샤프한 그레이슈트, 트렌디하고 스타일리시한 네이비슈트, 아니면 편안하고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은 리넨슈트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한다. 다음에 핏을 고민한다. 클래식한 레귤러핏, 모던한 슬림핏, 타이트한 스키니핏 중 그날의 일과 만남을 고려해 결정한다. 셔츠는 깔끔하고 샤프한 드레스 셔츠와 캐주얼하고 편안한 셔츠 중 슈트에 어울리는 것을 고르면 된다. 슈트와 셔츠를 골랐으니 다음은 넥타이다. 넥타이 걸이의 다양한 종류의 타이와 슬림 서랍의 액세서리를 보면 울적한 기분도 사라진다. 재킷 안에 셔츠를 겹쳐놓고 다양한 넥타이를 그 위에 얹고 매는 방식과 딤플까지 상상해 본 후, 신발을 고른다. 벨트는 슈트와 셔츠를 선택하면서 이미 결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모습을 넣어 상상하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본다. 그럴싸하게 보일 거 같으면 잠에 들지만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면 배치를 달리 해본다.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인, 이 일들은 잠깐이면 된다.


세련되게 입기를 좋아했던 그는, 지금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닌 지 오래되었다. 여행용 가방에 욱여넣어진 옷을 꺼내 입은 듯 주름이 지거나, 옷걸이에 서너 개의 옷이 한꺼번에 덧걸려 있어 한쪽이 축 늘어지거나, 옷이 닳아 보푸라기가 보풀보풀 일어나거나, 녹슨 철사 옷걸이에 걸어 놓은 듯 희미한 줄무늬 녹물이 배어있는 옷들이다. 그런 옷 속으로 밀어 넣는 몸은 눅진한 땀냄새와 파스냄새가 나고, 머리는 밤사이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힌 것같이 곤두섰고, 귀 주변의 머리칼은 들쭉날쭉하지만 대충 야구모자로 질끈 눌러쓰면 그만이다. '몰골사납다'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아마도, 지금,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고, 아이는 잠에 취해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녀는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는 그런 아내에게 질려있다. 눈이라도 일 이초 마주치면, 뭐 할 말 있어,라고 그녀는 묻곤 했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라고 그는 대답한다. 그와 연관된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 그는 그 말처럼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서로가 형식적으로 대했고, 대화라도 할 때면 쌓여온 감정이 고무장갑을 불었을 때 손가락들이 튀어나오듯 내밀어 올랐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작정하듯이 서로를 물리쳤다. 그녀의 분노가 그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의 분노가 그녀의 분노를 환기시켰다. 그들도, 한때는 서로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였다. 그는 그녀의 반복적인 어떤 낱말에도 매력을 느꼈고, 그녀는 그의 이상적인 얘기에도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관심을 보였다. 서로가 자신의 말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 그 사랑은, 여름내 싱그러웠던 담쟁이덩굴이 겨우내 잎사귀 하나 없이 어두운 갈색 담벼락에 해골같이 줄기만 남은 상태로 바뀌듯, 흔적만 남았다. 뭐, 그녀에 대한 욕망도 오래전에 사라졌다. 각방을 써서 좋은 점은 침대에 들기 전 과장되게 하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이도 멀어져 가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인기척이 나면 문뒤로 숨어버리고, 그의 말을 들을 때는 커다란 거북이가 앉아서 멀뚱이 눈을 깜박이듯 나릇함이 배어있고, 대꾸할 때는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거나 그냥 물고기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는 듯했다. 자세는 비스듬하고 손목에 얼굴을 기울이는 특유의 자세를 취한다. 좋은 남편, 자랑스러운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해받고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랐던 꿈은 생각보다 일찍 무너졌다. 육십은 되어서 무너질 줄 알았다.


애초의 잘못된 지점은 모르지만 불길한 예감은 있었다. 마치, 블라우스의 단추를 마음이 급해 채우다 보면 잘못 채워질 거라는 그런 예감 같은 거다. 결국에는 하나가 비고 거울에 비추어 보면 옷이 한쪽으로 찌그려져 있는, 뭔가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안 되는 그런 때말이다. 다시 잘못 채워진 부분까지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처럼, 그 잘못된 지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지금은, 갈라져 가는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지치는 사람처럼 익사하지 않기 위해 발을 지치고 있다. 그는 아무한테나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어두운 집은 더 커 보였다.


버스 안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로 가득이다. 필라멘트처럼 빛과 열기가 있는 젊은이부터 당장 살아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사람들이다. 셔틀버스는 침묵 속에서 출발한다. 잠이 들지 않은 어떤 사람은 슬퍼 보인다. 그 옆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빗방울 몇 개가 망설이듯 바람에 날려 창문에 부딪친다. 하늘은 흉한 회색 음영을 드러내고 나뭇가지들은 휘청댄다. 단풍잎은 한 장씩, 어쩌다 두세 장이 수선스럽게 떨어진다. 비로 생긴 작은 웅덩이에는 축 늘어진 단풍나무 잎사귀와 하늘 한 조각이 떠있다. 젖은 타이어들이 노면을 스치고, 전조등 불빛에 아스팔트는 번들거렸다. 동쪽하늘이 희부옇게 밝아올 무렵 회사에 다 달았다. "오늘도 수고하십시오." 버스 기사는 큰 소리로 말한다. "저기 뒤에 주무시는 분 일어나세요, 다 왔습니다!" 셔틀버스의 문이 열리면서 바람에 올라탄 빗방울 몇 개가 들이닥쳤다. 그는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을 내밀어 본다. 빗방울 몇 개가 손위에 떨어진다. 오늘도 이런 하루가 되겠구나, 그는 생각한다.     





이전 02화 02 : 30 A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