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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Oct 13. 2024

02 : 30 AM

택시 운전사 


이른 새벽, 조도를 낮춘 셔틀버스 안은 잠이 들락거려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손위의 핸드폰 빛이 섬처럼 드문드문 떠있다. k는 핸드폰의 날짜를 힐끔 보고는 그날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나이를 헤아려본다. 벌써 옹근 마흔 살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지만 그 나이가 낯설긴 하다. 급하게 잘못 올라탄 차에 정신을 차려보니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향하는 기분이다. 지난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이 스며든 바람에 너풀너풀 대고, 그녀와 아이의 얼굴 위로 그림자들이 일렁였던 모습이 스쳐간다. 


크고 뚱뚱한 빗방울이 호드득 유리창에 부딪친다. k는 고개를 돌려 검은 차장을 바라본다. 미끄러지는 빗방울 위로 가로등 불빛과 흐릿한 얼굴이 겹친다. 그는 유리창에 멀뚱이 이마를 대고 몽롱하게 번진 자신의 모습과 사라지는 불빛을 바라본다. 때는 11월이다. 


어린 시절 언젠가, 그의 꿈은 택시운전사였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꿈이다. 차 안은 세상의 어수선함을 단절하는 공간이다. 늘상 그를 둘러싼 외부와 차단된 체 허공 속에 혼자 떠 있는 느낌이다. 도시는 비에 젖고, 지면에 반사된 불빛은 살아 움직이고, 창문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초점을 잃어버린 불빛은 흔들린다. 빗방울은 투덕투덕 차를 때리지만 그의 몸에는 닿지 않고, 빗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이지만 소리는 삭제된다. 닿을 수 없는 빗방울과 삭제된 소리, 그 후로, 인생은 그의 꿈처럼 실체에는 닿지 못하고 모호함 속에 몸을 숨겼다. 간혹 삶의 본질이 그에게 닿을라치면 의도적으로 피해 갔다. 세상은 그의 바깥에 있고, 간혹, 그도 그의 바깥에 있었다.     


빗물은 거리를 따라 흐르고, 가로등은 띄엄띄엄 따뜻한 불빛을 보도로 흘리고, 작은 웅덩이에는 가로등 한 조각이 떠있다. 버스는 젖은 길을 달려간다. 나른한 소음, 시큼한 쇠냄새, 드르렁거리는 엔진소리가 마음을 긁는다. 이상스레 귀가 먹먹해지고 한가닥의 '삐'소리가 들린다. 물속에 가라앉아 피리소리를 듣는 것 같다. 조금 전만 해도 그는 냉동창고에서 물건을 옮기고, 진열작업을 하였다. 일용직으로 회사에 근무한 지 서너 달째다. 맡은 일은 그냥 몸을 쓰는 힘든 일이다. 회사는 출범한 지 십 년 남짓 되지 않아 국내 1위의 유통사로 성장했다. 매 분기 매출과 이익이 늘어나고 신규사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미션인 '팡팡 없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현실화시키고 있다. 이 미션을 실현하기 위해 '번개 배송'이라는 걸 한다. 수백만 개의 상품을 잠자리에 들기 전 주문하면 새벽에 받고, 아침에 주문하면 오후에 받는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작업장에 들어서면 누군가가 갑자기 볼륨을 올린 것처럼 소음은 한데 엉켜 울리고, 회색빛의 구조물은 자신감을 부족하게 만든다. 냉각기, 집진기, 송풍기, 카트, 핸드 작키, 파렛트, 롤러컨베이어가 내는 소리부터 관리자들의 무전기와 마이크 소리, 테이프가 뜯겨 나가는 소리, 사방에서 바코드를 스캔하는 소리들이 합쳐지면 거대하게 '우우윙'하는 소리로 바뀐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신경이 곤두선다. 부서지기 쉬운 공간이다. 


 전에 일했던 편의점에서 듣던 소리와는 다르다. 손님이 들락거리는 차임벨 소리, 가게 안을 돌아다니는 신발소리, 냉장고의 페트병이 하나 팔리고 데구루루 미끄러지는 소리, 전자레인지 작동소리, 과자봉지 쥐는 소리, 나지막한 라디오소리, '삑'하고 바코드를 스캔하는 소리들은 분리가 가능하다. 그중에 인상적인 소리는 라디오 소리다. 편의점을 생각하면 심야 라디오가 떠오고, 심야 라디오를 생각하면 편의점이 떠오른다. 야간근무를 했던 그는, 10시에서 12시 사이는 푸른 밤, 12시에서 2시 사이는 음악도시, 2시부터는 영화음악을 들었다. 수분기 가득한 DJ 목소리와 음악, 그리고 각종 사연이 있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출근하는 이야기, 사랑과 이별이야기, 늦은 밤까지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 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면 멍하니 계산대 앞에 서서 인적 끊긴 길을 내다보거나 폴폴폴 반짝이면서 멀어지는 별빛을 보곤 했다.   


당시에 그는 소설공모전에 응시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훌륭한 소설가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망상에 젖어 있었다. 망상의 연원을 돌이켜보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들이 많다. 어린 시절 이야기꾼인 동네형과 누나, 술래잡기하며 커튼 뒤에 숨어 커튼이 되어버린 순간, 하굣길에 주워온 돌 한 조각, 열두 살 때의 셜록 홈즈, 열여섯이 되던 해의 마이클 잭슨, 그 이듬해의 주윤발과 장국영, 그리고 학창 시절 교과서 밑에 숨기고 보았던 책들이다. 


어린 시절 언젠가 머릿속으로 글을 쓴 뒤 종이에 옮겨 적던 처음의 순간이 있었다.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작은 마당을 보고 있었다. 마당의 꽃에 얼쑹덜쑹 무늬 진 나비와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노랑나비가 꽃을 넘나들고 있었다. 꽃잎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정지해 있다가 살짝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살포시 날아오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묘사하고 싶어 나비의 양 날개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단어를 총동원하여 겨우 원고지 위에 첫 문장을 썼다. '나비는 나푼나푼 날아가버렸습니다.' 가슴이 두근대고 귀밑이 화끈거리고 발가락은 간질간질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가, 소설가라는 꿈을 가지게 된 때는 열예닐곱 살 때였다. 그 무렵에 어떤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표지는 '에곤 쉴레'의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다. 머리와 가슴을 화면밖으로 과감히 밀어내고, 움츠리고 있는 인간뒤로 빨갛게 익은 꽈리와 쪼글쪼글해진 갈색의 껍질이 있다. 오른쪽 어깨의 선은 도드라진 턱뼈와 연결이 되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해 있지만 그의 눈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 눈동자는 불안한 듯 우울해 보이고, 엷은 갈색과 푸른색과 보라색 컬러의 풍부한 뉘앙스의 피부는 문지른 듯하고, 검은색 옷은 생채기를 내듯 긁어댔다. 소설의 첫 문장은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고 시작된다. 깊숙이 감동했고 자신도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이런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인물을 따라 슬픔과 환희를 느꼈다. 지금은, 표지그림이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열대'가 그려진 작품을 읽고 있다. 그림 속 연인은 괴기스러우며 우스꽝스럽게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려고 한다. 여자의 손은 남자를 끌어당기지만 여러 개의 눈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입속에는 또 하나의 입이 있고, 남자의 코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눈도 세로로 돌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의 집도 있다. 기성 예술의 규범과 관습을 무시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책의 표지가 이야기의 줄거리와 컨셉이 맞다면 서로 엇갈리는 사랑이야기쯤 될 거 같다. 지금은 소설가의 꿈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 꿈을 버릴 수 없다. 글자들 속으로 들어가면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잊고, 화자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럴 때면 그를 단단히 묶어놓았던 현실의 올가미를 끊어내고 비로소 자신을 속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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