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 블라인드와 엔트로피 법칙
또 하나의 꿈.
여기저기 그림자가 보인다.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된다. 다만 끔찍한 웃음을 보내고 있는 건 느껴진다. 발걸음을 옮기자 누군가 따라붙고, 그의 발목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그놈을 떼어놓으려 애쓴다. 빠르게 뛰어가자 그놈도 빠른 속도도 따라붙는다. 달빛이 어스레하게 비추자 그놈은 길쭉해지고, 그는 기진맥진해진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를 바라본다. 뒤에 서 있는 꺼뭇꺼뭇한 윤곽들이 설핏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층위를 알 수 없는 검은 어둠이 종이에 물기가 스미듯 사방에서 밀려든다. 어느새 그놈과 그의 경계는 사라지고, 온 세상이 그놈들 천지가 된다. 그 역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와줘! “라고 외쳤지만 목소리는 묻혔다. 다시 소리치려 했지만 목이 막혀 더 이상 소리 지를 수 없다. 이제 온 세상이 어둠 속의 그를 응시하고, 그 또한 어둠 속의 자신을 응시할 뿐이다.
부스스 잠에서 깬 시우는 몸을 뒤척이며 베개를 고쳐 벤다. 한창 더운 날, 차가운 곳을 찾아 베개에 얼굴을 뭉그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눕는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반쯤 흐릿한 꿈의 여운이 남아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소실되는 꿈에게 말을 걸려 한다. 꿈은 하루를 마주하기 전 만난 소중한 친구였다.
따지고 보면, 무서운 것이 두 가지 있다. 잠들 때와 잠에서 깰 때다. 말똥말똥하던 의식을 한순간 집어삼킨 후, 다시 원래대로 뱉어낸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계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쥐락펴락하는 무서움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잠시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여행지에서 깨어났을 때, 당연히 집이라고 생각하다가 낯선 분위기에 화들짝 놀라는 상황 말이다. 그제야 '아, 여행 왔지'라고 안심하고 기지개를 켜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런 순간.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적응하는 단계에서 겪는 소란 같은 것이다. 결국 잠에서 깨는 것은 다른 세상에 한눈을 팔았다가 원래대로 돌아와 잊었던 자신을 다시 기억해 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은 잠에서 깰 때 불쾌하게 깨어나는 때도 있다.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서 말이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서도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이불속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뒤척인다. 그러다 손을 뒷머리에 괴고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며 자신의 글을 떠올린다. 잠에서 깨면 으레 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행동이다. 저마다 남이 짐작도 못 하는 생각이나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남몰래 누군가를 돕거나,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상상을 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자살을 꿈꾸거나, 소설이나 시를 쓰거나, 혹은 간혹 눈물을 흘리는 일 말이다. 글에 대한 생각은 중간중간 끊기는 영사기를 보듯 이내 길을 잃고 만다. 그의 글 역시, 가만 놔두면 저절로 어지럽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세상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는 듯했다. 그런 엔트로피 법칙 말이다. 책상은 가만히 놔두면 연필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서류는 흩어지고, 지우갯가루는 사방에 뿌려져 있고, 포스트잇이 제멋대로 붙어있는 상태처럼, 세상은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 경제는 늘 위기고, 안보는 여전히 불안하며, 군복 입은 노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도로를 점거한다. 뜨거웠던 사랑은 식고, 기대했던 일은 어그러진다. 럭비공 같은 그의 팔자 역시 이 엔트로피 법칙 탓이 아닐까?
만약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떨어지던 빗방울은 다시 구름이 되고, 부서졌던 것은 온전해지며, 촛농은 거꾸로 올라가 양초가 될 것이다. 엎질러진 물은 얌전하게 컵에 담기고, 모래는 뭉쳐 바위가 된다. 아래로 떨어졌던 것은 다시 떠오르고, 발사된 총알은 다시 장전되며, 쓰러졌던 병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구부러진 허리는 펴지고, 사랑은 회복되며, 찢어졌던 상처는 다시 아물고, 죽은 이는 깨어나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게다가, 생각나는 전부를 글 속에 욱여넣으려 어지럽던 내용은 깔끔히 정리되고, 풀어헤친 보따리처럼 뒤숭숭하던 형식은 원만히 수습되며, 대책 없이 감성적이고 변덕스러웠던 문체는 차분해질 것이다.
그는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내리며 화면 속 어딘가를 응시하고, 귀를 기울인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건반을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부드러운 천으로 살며시 닦은 뒤, 양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깊은 숨을 들이쉰다. 그의 눈빛은 먼 곳을 응시하듯 아련하게 흔들린다. 이윽고 반듯한 자세로 천천히 건반에 손가락을 올리자, 피아노가 울리기 시작한다. 라라- 디라라 -라라라-라... 웅장한 현악기 반주 위로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흐른다. 마치 풍경처럼 고요했던 피아노가 숨을 쉬기 시작하는 듯하다. 러시아 특유의 짙은 색채가 느껴지는 연주곡이다. 호로비츠의 연주가 봄 들판 위를 스치는 미풍처럼 음을 일렁이게 한다면, 백 년 후 임윤찬의 연주는 한겨울 시베리아의 순백 설원 위를 미끄러지는 바람 같다. 느낌은 달라도 두 연주 모두 낯선 곳을 여행하듯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설렘과 불안감이 깃들어 있다. 언뜻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음악은 다층적인 화음의 균형 위에 견고하게 서 있다. 음악을 듣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은 하나둘 정리가 된다.
평화롭고 서정적인 선율은 점차 고조되고,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뽐내는 카덴차가 시작된다. 피아니스트는 화려함 대신 심플한 버전을 택했다. 그의 손가락은 하나하나의 음을 소중히 다루듯, 어떤 음도 놓치지 않고 건반 위를 유영한다. 모래알처럼 흩뿌려진 음표들을 가볍고도 빠르게 지나며,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듯 조금씩 밀어붙이며 점진적으로 힘을 축적한다. 단단하고 쫀득한 음들은 불안함 없이 견고하게 전진하고, 소리들은 점층적으로 쌓여간다. 피아니스트는 정확한 음정을 손에 익힌 후 악보를 지워버리고 가슴으로 연주하는 듯,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나아간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와 싸우는 듯 팽팽하게 교차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마치 파우스트가 악마와 결투하는 장면처럼, 모든 음이 치열하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의 몸과 머리카락이 들썩이고, 손가락은 한껏 벌어진 채 피아노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고 겁 없이 건반 위를 질주한다. 소리의 알갱이가 쭉쭉 뻗어 나간다.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멜로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며, 뻗어 나갔던 소리가 다시금 하나로 뭉친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마치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이윽고 따뜻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고통은 서서히 해소되고, 음울한 분위기는 점차 극복되어 화려한 피날레를 향한다.
시우의 몸과 머리는 말랑거린다. 이불이 엉켜 있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블라인드 줄을 당긴다. 블라인드 사이를 통과한 햇빛은 평행하게 공중에 떠 있다. 안개가 걷히듯 천천히 올라가던 블라인드가 꼬여버린다. 계속 잡아당겨보지만 블라인드는 사선으로 창을 가리고 오렌지빛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온다. 아이는 유치원에 갔고, 아내도 이미 일을 나갔다. 그는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켜고 물끄러미 자신의 글을 읽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