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00 PM

카이사르의 꿈과 브루투스의 칼

by 김영


"AI 시대가 곧 올 거야." 어느 날 술자리에서 선배가 운을 띄웠다.

선배의 말에 준하는 "그렇겠지만,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요?" 하고 되물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빨리 올 거야. 아무튼 지금부터 준비해야 돼."

내심 무슨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선배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같이 해볼래?"

"무슨 아이디어인데요?" 준하가 묻자, 선배는 눈을 빛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어차피 AI 시대가 와도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가 필수일 수밖에 없어. 우리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서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거야. 텍스트든, 이미지든, 음성이든, 어떤 형태든 AI를 통해 즉각적으로 번역해 주는 거지."

선배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방대한 언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시 자연스러운 번역 결과를 제공하는 거야. 핵심은 그 데이터가 축적되기까지의 과정이지."

선배의 말을 듣고 준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동업을 한다면 저는 무슨 일을 하나요?"

선배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앱 버그를 고쳐왔으니, 넌 앞으로 우리 플랫폼에서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일을 맡을 거야. 밤늦게까지 모니터 앞에서 수많은 코드 속에서 버그를 찾아내고, 진단하고, 해결하며 앱을 튼튼하게 만드는 일은 네 전문 분야잖아. 혹시 더 좋은 역할이 떠오르면 언제든 다시 이야기하자." 선배는 마치 일이 벌써 시작된 듯 말했다.

"그럼, 자연스러운 번역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까지, 그 번역 데이터는 어떻게 모아요?"

그의 지나가는 질문에, 선배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번역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그들에게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서 데이터를 축적해 나가야지. 이 기간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이 사업의 첫 번째 고비가 될 거야."

그는 선배의 말에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주말엔 뭐 할 거야?" 선배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아마 아내랑 영화 보고 마트 가서 장 보는 거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선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할 생각 있으면 말해."

선배의 말은 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며칠 동안 지난 15년간의 직장 생활을 되짚어 보았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그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피로감을 안겨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간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듯 빠르게 흘러갔다. 그때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숨 가쁘게 하루를 보냈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미친 듯이 일하고, 밤을 새워 기획서를 작성했으며, 허둥지둥 출근해 회의를 했다. 퇴근 후엔 간단히 식사하며 지인들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훑어보았고, 이튿날 직장에 출근해서는 회식 자리의 마지막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주말엔 빨래를 돌리고, 무의미하게 포털 스크롤을 내리며 케이팝 걸그룹 소식을 보기도 했다. 승진을 위해 다시 미친 듯 일하다 퀭한 얼굴로 돌아와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꽃들이 만개한 길을 지나 출근했고, 백화점 유리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계절 옷을 구입하며 무엇이든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때로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미소 지으며 일했고, 퇴사 후 유럽 여행을 떠났다는 글에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다. 잠시 비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일에 몰두했고, 퇴근길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잠들곤 했다. 일요일이면 셀프 세차장에 들러 차를 청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카페테라스에서 크루아상과 핸드 드립 커피를 마셨다. 다음 날에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 채 기계적으로 일했다. 최신 휴대폰을 사고, 차를 바꿀까 고민하고, 하릴없이 손톱을 세워 바라보며 결혼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도 다시 일했다.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일하는 중에도 그녀를 생각하며 만남을 이어가고 이런저런 약속을 했다. 집 장만을 고민하다가, 그녀와 여행을 가서 관계를 맺고, 집에 돌아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뒤척이다 허둥지둥 다시 출근해 업무 프로세스를 평가했다. 어느 순간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운 좋게도 그녀가 먼저 떠나버렸다. 이후 다시 하루 종일 일하며 조용하고 고독한 일요일을 보냈다. 늘 그렇듯 기분 전환 삼아 여행을 떠났고, 비행기 창밖을 보며 더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하며 돌아왔다. 다시 연봉 협상에서 좌절하고,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 없이 걷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자신을 사로잡았던 여행지의 풍경이 불러일으켰던 감정을 기억해 내며 다시 일에 매달렸다.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을 연락받았다. 흰 시트로 덮인 얼굴과 침대 가장자리 밖으로 삐져나온 맨다리를 한 채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가는 아버지를 보며, 불길이 그를 할퀴고 집어삼키는 듯한 상상을 했다.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양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일했다.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깥세상을 보고, 다음 날에도 다시 출근했다. 어느 날 이메일을 확인하고 경조사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결혼은 왜 아직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결혼은 미룰 수 있으면 최대한 미루라'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저녁에는 친구와 펍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시간은 수액이 체내에 한 방울 한 방울 흘러가듯 느리게 느껴졌다. 다시 일에 몰두하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갔고, 다시 출근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설계와 솔루션을 논의했다.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잠이 덜 깬 채로 일하러 갔다. 자신이 해놓은 일이 소용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상과 자신 사이에 뭔가 삐걱거림을 느끼기도 했다. 다음 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다시 또 일했다. 태양이 비치는 날 창밖을 내다보고, 저물어가는 마지막 빛이 맞은편 아파트 창문과 벽에 던지는 형상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기능적으로 더 뛰어난 코드를 작성했고, 비 오는 날 밀리는 차 안에서는 전조등 불빛에 반짝이는 아스팔트와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에 반사되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다시 지친 몸으로 사무실에 나갔고, 돌아와 허리가 꺾인 채 벽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정답이 따로 있을 거라 믿고 일했고,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일하고, 저녁시간에는 마주하고 있는 벽에 던진 공이 벽에서 손으로, 손에서 벽으로 하얗게 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사용자들의 광범위한 피드백을 정리했고, 주변과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으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고, 제품이 얼마나 직관적이고 편리한지 고민했다. 멀리 있는 미래에 대해 생각에 잠겼고, 예전처럼 출근해 일했다. 어둠 속에 오래 앉아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일했다. 생각했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지쳐 일하다가, 선배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다시 인생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며 일했고, 그녀에게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이어갔다. 촉박한 마감 기한에 맞춰 서둘러 코드를 완성했고, 그녀에게 좀 더 다가갈 기회를 엿보았다. 휴가를 내어 제주도로 그녀와 여행을 떠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결혼 후 삶에 대해 상상했다. 다시 돌아와 힘내어 일했고, 마침내 그녀와 결혼을 했다. 아이가 이듬해 태어나고, 젖은 기저귀를 갈고 강한 젖비린내가 진동하는 방을 환기시켰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직장에 나갔고,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둘은 매일 녹초가 되었지만 행복했다. 늦잠으로 허둥대며 직장을 나갔고, 퇴근길에는 아기용품들을 마구 사들였다. 신나게 놀아주고, 아이 침대 속 장난감들을 치우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고객 만족도를 높일 새로운 서비스나 불편함을 해소할 방법을 고민했고, 퇴근길 차 안에서는 아이를 위해 큰 차로 바꿀까 생각했다. 아이를 유치원, 공원, 치과로 데려가는 상상을 하다가 다시 일하러 나갔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재운 후 잠시 컴퓨터를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둘은 대충 끼니를 때웠고, 차츰 둘만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결국에는 싫증 나는 CD처럼 관계는 시들해졌고, 자신의 삶이 영원히 창밖에 서성대며 서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묵묵히 일했고, 어느 날 몸이 아팠다. 그래도 지겹게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희망을 위해, 그는 그렇게 15년을 일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선배와 사업을 시작했다. 변화가 절실했고,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꾸준히 나빠지는 선택의 시작이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인공지능 시대의 서막을 알린 이듬해, 그들은 다가올 시대가 인공지능의 시대가 될 것이며 언어는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뜻을 같이했다. 그들의 예측은 정확했지만, 문제는 데이터 구축 방식에 있었다. 사람들을 고용하여 데이터를 축적하는 방식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 무렵, '언어 장벽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진 언어 데이터 및 번역 서비스 전문 기업이 있었다. 그들은 독특한 크라우드소싱 방식을 활용하여 방대한 양의 언어 데이터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기업의 차별점은 집단지성을 통해 사용자들이 직접 번역에 참여하게 만들고, 다양한 언어 퀴즈와 게임을 통해 포인트를 얻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획득한 포인트는 다시 번역 요청에 사용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양질의 AI 번역 정확도를 높였다.


외부 전문가나 특정 집단에 의존하는 대신, 불특정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아이디어나 정보, 해결책, 노동력 등을 얻고 이를 기업 활동에 활용하는 크라우드소싱 방식은 여러 장점을 가졌다. 대중의 참여는 서비스에 대한 관심과 홍보로 이어졌고, 초기 단계에서 시장 반응을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전문 인력을 직접 고용하거나 대규모 외주를 주는 것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필요한 작업을 수행하는 이점이 있었다.


이후에도 비슷한 사업 모델을 가진 여러 기업이 생겨났다. 결국 선배와 그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사업은 실패했다.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삐걱거렸다. 주변에서는 그 정도의 실패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위로했다. 그 자신과 아내 또한 상황이 나빠졌지만, 곧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집은 더 작은 곳으로 옮기고, 씀씀이를 줄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취업을 고려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나이도 있었고, 이전 직장 근처로 돌아가는 것도 싫었다. 집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중, 그는 주식 투자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이차전지 관련 주식에 투자하여 수익을 보았다. 그는 이 기세를 몰아 투자를 잘하면 당분간 취업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전문 투자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다.


주식 공부에 몰두하던 그는 우연히 증권 방송에서 한 바이오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회사는 치매 관련 신약을 개발 중이었고, 방송에서는 바이오 주식 중 최선호주이며 중국의 제약회사에 대규모 기술 수출 계약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소액으로 투자하여 수익을 보았다. 치매 시장의 확대라는 시장성과 회사의 비전 제시를 믿어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한 번에 큰 금액을 투자하는 것보다 매수 시점을 분산시켜 위험을 줄이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결국에는 물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버티기만 하면 언젠가 신약이 성공할 거라 생각하며 여기저기 돈을 끌어들여 물타기를 계속했다. 회사는 신약 개발에 필요하다며 몇 번의 유상증자를 거치면서 주가는 계속 곤두박질쳤다. 결국 신약 개발은 1상에서 실패하고 거래 정지되었고, 그의 투자도 멈춰 섰다. 돈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모든 이해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이 결정타가 되기까지 이미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결과, 전에는 풍족한 편이었지만 이젠 돈 문제에 짓눌려 허덕였다. 돈은 인생의 모든 측면을 관통해 들어갔다.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해결할 수준이 아니었다. 궁핍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고, 아내와 아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했다. 아내는 일을 다시 시작했고, 그는 실직 상태로 집에 머물렀다. 다시 재기를 시도했지만 '뭐 하나 잘할 게 없는' 그는 완전히 길을 잃었다. 남의 시선이 중요한 그에게 인간관계는 자연스레 끊겼다. 마치 등교 거리가 먼 학생이 버스를 타고 집에 중간쯤 오면 친구들이 하나둘 내려버리고 나중에는 혼자 남는 것과 비슷했다.


이제 짐작하겠지만, 지금까지의 사정은 이러했다.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가 한동안 들었던 말이다. 이제는 그런 말을 건네줄 사람조차 없다. 그가 스스로를 가두어 '히키코모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인구 대비 1% 정도라고 하니, 살면서 한 번은 그 1% 안에 속한 셈이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할 때 한 번쯤은 갇혀봤을 좁은 벽장 같은 방이 그의 세상이었다. 그곳은 그의 피난처이자 동시에 감옥이었다. 그를 가둔 것이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 그는 죄수이자 간수였다. 짤랑거리는 열쇠를 쥔 죄수.


방 안에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라도 된 듯했다. 뒤집힌 몸을 일으키려 허공을 향해 수많은 가는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벌레.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실하고 벌레가 되었으나, 완전히 변신이 되지 않아 인간 세계에 여전히 매어있는 벌레 말이다. 현실의 길거리에 무방비로 버려진 것보다는 혼자 방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작아진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차츰 그의 얼굴에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떠나지 않는 불편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병든 환자의 상태를 의사가 살피듯, 그의 내면의 고통이 외부에 투영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고, 괜찮지 않으면서 억지로 '괜찮다'라고 얼버무리기도 싫었다. 자꾸 떠오르는 유쾌하지 않은 생각들을 떨치려 그는 불안한 걸음으로 공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반쯤 그늘진 벤치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어쩐지, 과거의 모든 시간을 잃어버린 듯했고, 애써 살아온 삶에 의미가 없는 듯해서 그는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수많은 '카이사르'를 꿈꿨었다. 비록 카이사르가 된다 한들 결국 브루투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그 카이사르에 대한 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릴 때 그런 적이 있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보이는 찬장의 사탕 단지를 향해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서 발을 구르고 손을 뻗었지만, 끝내 닿지 않았던 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와 의자의 긴 그림자는 근처 연못가에 가 닿았다. 산만한 기억들은 때로 피어나는 철쭉처럼 서로 엉겨 붙어 치고받으며 싸웠다. '파스칼 키냐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음악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기억하나요, 어느 날, 옛날에, 당신은 사랑하던 것을 잃었잖아요.'" 그와 닮아있는 말이다.


사랑했던 가족과 어쩌면 연인이었을, 어쩌면 친구였을 그리운 사람들. 꿈속에서 그들과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고 놀라운 대화를 나누었던가. 그러다 꿈이라는 것을 꿈속에서 자각하는 순간, 꿈과 현실의 위계가 정해지며 스산하게 깨어나곤 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셔터를 누르듯 점멸하는 광점들이, 그 앞으로 다가와 그를 지나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간을 그는 망막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