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00 PM

Starry, starry night

by 김영


S#10. 도시(밤/외부)


부감으로 보이는 밤 도시의 먼 풍경. 빛이 빠져나간 거리에 봉제선 같은 가로등이 켜져 있고, 가로등 불빛에 흰 털실 같은 가느다란 눈이 바람에 흩날리며 반짝인다. 자동차 불빛은 꼬리를 물고 이어달리기를 하고, 간혹 검은 천의 한가운데를 허연 가윗날로 가르듯이 119 자동차는 굉음을 내고 지나간다. 그 옆으로는 검은색 각설탕 같은 건물들이 올망졸망 늘어져 있다.


S#11. 실내 포장마차(밤/외부)


누군가의 뒤를 카메라가 따라간다. 걸어가는 양옆에는 4층이나 5층의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외부인 주차금지', '창고 大방출', '외국인 근로자 및 고시생 월세 환영'등의 현수막이 보인다. 빌라 앞에는 자전거 거치대와 쓰레기로 넘친 재활용 분리수거함이 있다. 자전거 거치대에는 자전거와 버려진 소파가 포개져 있고, 타이어가 빠져 뼈대만 남은 자전거는 쓰러져 있다. 구겨진 캔, 깨진 병, 플라스틱 용기, 페트병은 분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채 쌓여있다. 깨진 맥주병에서 흘러나온 맥주와 쓰레기통에서 새어 나온 정체 모를 액체, 악취가 날 거 같은 오물들이 눈에 덥여 작은 흰 언덕처럼 보인다. 길고양이들은 눈을 헤집어 이곳의 정체를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부는 바람에 눈은 어지럽게 춤을 추고, 바람을 품은 비닐봉지가 이면도로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길모퉁이에 실내포장마차가 보인다.


S#12. 실내 포장마차(밤/내부)


그리 크지 않은 포장마차. 좀 낡고 오래된 듯 보이지만 서민적이면서 편안해 보인다. 낯설게 느껴지는 언어가 들린다. 문가에는 동남아시아인 세 명이 보이고, 옆 테이블에는 아저씨들이 시끄럽게 술을 마시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팝송이 흘러나온다.


라디오 :

Starry, starry night 별이 가득한 밤

City of stars 별들의 도시여

Are you shining just for me? 당신은 나만을 위해 빛나고 있나요?

couldn't look you in the eye 차마 당신의 눈을 볼 수 없었어요


부원장 : (얼굴이 붉어) 니들, 그거 아나?


부원장이 이런 말을 할 때면 취기가 오른 것이다. 술자리에선 다들 친숙하게 형이라고 부른다.


부원장 : (꾸부정하게 거북목을 한 채 소주잔 입구를 검지로 쓱 쓰다듬으며) 형은 말이야, 원장한테 감정적으로 말한 적 없어. 정말 간절하게 말해왔지. 첫째, 원장은 도전할 마음도, 의지도 없어. 남의 의견을 들으려는 마인드도 없고. 당연히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현실 감각도 없다고 봐. (내친김에, 목소리를 높여) 마지막에 딱 한 단어만 추가하자. 매우!

동윤 : (부원장을 빤히 쳐다보며)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부원장 :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동윤아, 잘 들어. 이런 학원들은 한 분야만 너무 오래 해서 다른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때가 많아. 그럴 땐 외부에서 새로운 팀을 데려와서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빡세게 체질 개선을 해야 하거든. 근데 이놈의 원장은 도무지 말을 안 들어. 지 밥벌이는 아직 버틸 만하나 봐. 그렇게 수학이 좋으면 강사나 할 것이지. 둘 다 왜 하냐고? 제갈량과 여포를 옆에 둬도 소용없다, 소용없어! 강사들만 잔뜩 뽑아놓고는 나 몰라라 하고 있잖아. 여기가 무슨 인력 회사냐고!

윤희 : (어깃장을 놓으며) 아, 부원장님! 재미없게 학원 얘기 좀 그만하고 다른 얘기해요.

부원장 :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윤희야, 조금만 참고 들어봐. (주변을 들러보며) 너희 제갈량의 적벽대전 이야기 알지? 제갈량이 바람방향을 바꿔서 조조군에게 불길을 향하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사실 제갈량이 바람을 바꿨다고 믿는 사람은 없잖아. 다만, 그는 바람이 바뀌는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뿐이고, 그때를 기다린 거지. 내 말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거야. 사랑도 타이밍이고... 에이, 됐다, 술이나 먹자!


다섯 명은 잔을 부딪힌다. 시커먼 목구멍으로 차가우면서 뜨거운 것이 넘어간다. 성대는 가볍게 움직이고, 작은 바늘 꾸러미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듯하다. 흘러가는 길을 따라 불놀이가 한창이다. 얼굴은 잘 익은 살구색으로 변하고, 혈관의 피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알코올은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환호와 정열과 해방감을 전달한다.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친밀감은 더해진다. 눈빛은 친절한 카운슬러의 그것이다. 다시 맑고 투명한 그것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순수한 수정 같은 것이 캄캄한 목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부원장 : (뜬금없이) 근데, 연수 너는 사랑해 봤냐?

연수 : (건성으로) 형은 술만 마시면 맨날 똑같은 걸 물어요? 제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안 해봤겠어요!

부원장 : (연수를 빤히 쳐다보며) 아! 생각났다. 그녀랑 헤어지고 나서 학원을 옮겼다고 했지. 술 취하면 예전에 취했을 때 기억이 나는 것처럼 말이야. 꿈속에서 지난 꿈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런데 형이 말하는 사랑은... 뜨거운, 눈물 콧물 다 짜고, 때로는 죽이고 싶을 만큼의 사랑을 해 봤냐는 거야.


[INT.]

카세트에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딸각’ 넣는다. '마법의 성'이 연주된다. 수화기를 든다. 긴장감이 감돈다.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 부가서비스는 3번을 눌러 주세요." 3번을 누른다. "삐! 음성 확인은 1번, 인사말 녹음은 2번, 비밀번호변경은 3번을 눌러주세요." 2번을 누른다. "비밀번호를 눌러주세요." 1224를 누른다. "삐 소리가 나면 인사말을 남겨 주세요." 젭 싸게 카세트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전화 수화기를 카세트의 스피커에 댄다. 숨죽인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무사히 일을 마친 거 같다. 수화기를 들고 012 354 **** 를 누른다.


[INT.]

그녀 옆에 앉아 어깨가 맞닿는 것이 흐뭇한 연수의 모습.


연수 : (주저하며) 네... 부원장님..

부원장 : (버럭) 웬 부원장님이야! 하던 대로 형이라고 해. 이 인간 또 '진지병' 도졌구먼. 머리로만 하는 그런 사랑 말고, 죽을 것 같은 사랑!

연수 : (이해한다는 듯) 해봤어요...

부원장 : (안심하며) 다행이네... (단정적으로) 내가 연수 같은 유형들을 좀 알아.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이성적인, 아니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거든. 몸은 반응이 오는데 애써 아닌 척하는 거지. 짐짓 섹스에는 관심 없는 척, 욕망을 감추는 데 에너지를 더 많이 쓴단 말이야.

연수 : (약간 거리를 두는 듯한 사무적인 목소리로) 저를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형.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잘못된 건가요?

부원장 : (소주 한잔으로 목을 축인 후) 아니,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을 해야 정신도 따라 움직인 다는 거야. 육체는 정신의 발목을 잡는 뻘밭이 아니라 억눌린 욕망의 해방구라고. 뒤를 보지 말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란 말이지. 나이 들면 하고 싶어도 못해.

연수 : (짐짓 진지하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는 좀 더 생각을 하게 돼요.

부원장 : (안다는 듯) 생각을 많이 해서 내린 결정이 잘못될 때가 많아. 형 말은 생각과 감정이 충돌할 때는 감정을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는 거야. 우리의 생각은 복잡하지만 감정은 단순하거든. 그리고 네 감정을 네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지켜주지 않아.

윤희 : (주위를 보며) 나도 그 말에 동감해요. 이성적이면 정상이고, 감정적이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잖아. 이성이라는 게 공동체의 집단 규칙 같은 거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공동체의 규칙에 맞춰 자기 검열하라는 말이잖아. 체제는 우리의 감정이 드러나면 안 되니까 이성적으로 사는 게 정상인 것처럼 가르치고.

주훈 : (별일 아니라는 듯) 양심도 마찬가지고...

동윤 : (장난스럽게) 양심은 또 왜?

주훈 : (진지하게) 고등학교 때 칸트에 대해 배웠잖아? "너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우리 인간에게는 본질적인 선한 마음 같은 도덕 법칙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라는, 그 돼먹지 않은 말, 다시 말해 양심 있게 살라는 거잖아. 양심은 이제 사회의 감시도 모자라 우리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스파이 같은 놈이야. 까딱하면 "너는 양심도 없니?"라는 말로 우리의 욕망에 철퇴를 내리잖아.

윤희 : (말을 받아) 애들을 규범에 따라 통제하고 훈육해서 결국 체제 유지에 필요한 인간으로 만드는 게 교육의 목표 아니겠어? 그러니까 감정 같은 것보다 이성이나 양심을 통해 애들이 스스로 내면화된 권력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게 선생들의 책임이라는 거야. 푸코가 그랬잖아? 학교나 감옥이나 다를 바 없다고. 안 그래?

# [나 오늘 늦어. 먼저 자.]


부원장의 핸드폰화면에 카톡을 확인하지 않은 듯 숫자 1이 남아 있다. 그는 '오늘 선생님들이랑 방학 프로그램 때문에 모였어'라고 이어서 썼다가 지우고는 핸드폰을 엎어둔다.


부원장 : (화제를 돌리는 듯) 야, 됐다! 술이나 마시자!

연수 : (부원장을 보며, 걱정스럽게) 형님, 별일 있는 건 아니시죠?

부원장 : (멋쩍게 웃으며) 자주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서 아내한테 좀 미안해서 그렇지, 뭐. 근데, 별일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동윤 : (놀리듯) 그럼 일찍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부원장 : (화들짝 놀라며) 야,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 형은 말이야, 수업 끝나고 술자리 갈 때가... 백 미터 달리기 '땅!' 하기 전에 느껴지는 그 찌릿한 설렘 같은 기분이야! 몸에서 찌르르 전기가 오는 것 같달까. 하하! 이 정도면 알코올 중독 맞는 거지?

동윤 :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우리 모두 알코올 중독이에요!

부원장 : (주방을 향해) 사장님, 여기 껍데기 하나 더 주세요! 여기 껍데기 기가 막혀. 고소하고 쫀득한 게 말이야.


그는 직접 주방 옆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와 비틀어 따고 술을 따라준다. 첫 잔에서는 마치 겨울철 개울가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난다. "돌, 돌, 돌, 돌" 부원장은 술을 따라주며 격렬하게 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운다.


부원장 : (기운이 나며)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은, 보약이야, 보약!


안주가 나오고, 모두 다시 건배.


부원장 : (동윤과 주훈을 보며) 동윤이도 주훈이도 집안에 별일 없지?

동윤 : (미소 지으며) 별일 없는 사람들은 없다면서요.

주훈 : (담담히) 네, 괜찮아요.

부원장 : (큰 소리로) 윤희랑 연수, 잘 들어! 결혼은 급하게 할 필요 없어. 결혼과 죽음은 늦을수록 좋다잖아. 아예, 안 해도 되고. 아이가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머뭇거리다) 윤희는 어떤 스타일의 남자가 좋냐?

윤희 : (별일 아니라는 듯) 뭐, 특별한 건 없어요. 그때그때 눈이 맞으면 사귀는 거죠. 어차피 호르몬이 하는 짓이니까 화학적 작용에 저항하지 않고 이끄는 대로 가는 거지, 뭐. 난 위선적인 인간들이 싫거든요. 사랑이 있을 때만 섹스가 가능한 건 아니니까. 어차피 죽도록 사랑해도 그 뜨겁던 감정은 2년을 못 넘기잖아요. 게다가 살면서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지 않아요?

동윤 : (신기하고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며) 저 자유가 부럽다. 총각이었을 때 나도 저랬어야 했는데…

부원장 : 센 척은... (알겠다는 듯) 윤희가 말은 저렇게 해도... 여하튼 동의해. 나는 섹스를 할 때만이 현재를 현재로 느끼는 존재가 되는 것 같더라고. 과거에 대한 아쉬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그 순간은 사라져. 현재만이 남는 상태랄까. 순간이 영원으로 바뀌는 그런 거.

윤희 : (답답한 듯) 난, 사는 동안만큼은 가급적 감정을 속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거예요. 감정이 식어 헤어질 때도 당당하게.

연수 : (윤희를 보다가) 어떻게 헤어져야 당당한 거야?

윤희 : (단호하게) 내가 헤어지고 싶을 때나 상대방이 헤어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 피하지 말고 헤어지는 것. 누가 먼저 배신했다느니 그런 구차한 말 하지 말고.

동윤 : (동의하기 어렵다는 듯) 남녀 관계가 그렇게 나이스할 수 있나? 헤어질 때는 징징거리고, 악담하고, 누가 먼저 배신했다느니 그러지 않나?

윤희 : (무슨 얘기인지 안다는 듯, 조심스럽게, 아랑곳하지 않고) 그걸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니고... 그런 사람들 있잖아. 상대방이 배신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 그동안 만나면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입이 닳도록 떠들어댔으니, '내가 먼저 배신하면 안 돼. 남들이 보기엔 내가 더 윤리적이어야 해. 상대방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돼.' (사이) 그러다 마침 그 순간이 오면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면서 뒤돌아 미소 짓지는 않으려고. (주변을 보며) 그리고 상대방에게 이미 관심이 없는데도 누군가 자신의 연인에게 관심을 보이면 뺏기기 싫어 놓아주지 않는, 결혼해서 사랑이 없는데도 죽을 때까지 손을 놓아주지 않는, 적어도 그런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거지. 한때 사랑했던 상대방에게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싫증이 나서 헤어진다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의 솔직함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부원장 : (고개를 끄덕이며) 멋지다, 윤희! 근데, (좌중을 보며) 결혼식을 굳이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상대방에 대한 소유권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야. 하객 중에 연적에게도. 게임의 최종 승리자가 나임을 보여주는 자리인 셈이지.

윤희 : (말을 받아) 그리고는 이제 내 것이니까 금세 흥미가 떨어지겠죠. 그녀가 내 곁에 있을 수도 있고 내 곁을 떠날 수도 있어야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데...

부원장 : 그건,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야. 평생을 바쳐 충성을 하겠다는 사람은 언젠가 잘려.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제스처를 취해야 윗놈들이 신경을 쓰거든. (무슨 생각이 난 듯, 동윤을 보며) 동윤아, 은수 어머니랑 통화는 했어?

동윤 : (말을 받아) 네, 알다시피 매번 같은 이야기밖에 없어요. 기말고사가 다가오니 시험 좀 신경 써 달라고요. 중간고사가 다가오면 중간고사를 잘 보게 해 달라고, 수행평가 기간에는 수행평가에 신경 써 달라고. 오직 시험에 관한 이야기뿐이에요. 성적이 조금만 떨어지면 어찌나 호들갑을 떠는지. 정작 아이가 요즘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말끝마다 ‘우리 사랑하는 은수가...’라고 말하는데, 정말로 은수를 사랑하는지 궁금해요.

주훈 : (술을 제 잔에 따라 마시는) 은수도, 어머니도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할 거야. 서로가 자신의 존재감의 상당 부분을 상대를 통해 얻고 있으니까.

동윤 : (의아하게) 그럴까?

부원장 : (냉소적으로) 그렇지. 그게 그 어머니의 존재 이유인데. 은수가 어머니 존재감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잖아. 은수가 좋은 대학에 가고 계급 높은 남편을 만나면 은수 어머니도 신분이 상승했다고 생각할 거야.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고 이뤄낸 성과라고 말이지. 은수는 자신이 이렇게 된 게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덕분이라고,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겠지. (서글픈 웃음을 띠며) 서로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느낄 거야.

주훈 :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불쌍해요. (어이없다는 듯) 그들은 부모가 항상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착각해. 가끔 안아주고 그렇게 대해주긴 하지. (기분 안 좋은, 무심하게) 그들은 '부모나 선생님들의 사랑은 끝이 없다'라고 기억을 행복하게 날조해. (답답한 듯) 부모들은 아이들의 욕망을 빼앗고 그 자리에 자신의 욕망을 집어넣은 사람들인데. 부모들도, 아이들도, 서로 사랑한다는 판타지 속에 빠져있어. 갈등이 생겨도 하루 이틀 만에 눈물로 화해하며 서로를 껴안을 거야. 그걸 보는 아버지는 두 눈이 촉촉해지고. 만약 그들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니 사랑 안 하는 거지. (불쑥) 스피노자가 그랬어.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쉽게 말해 '나는 네가 말만 잘 들으면 너를 사랑해'라든가, '나는 네가 공부만 잘하면 너를 사랑해' 같은 말들. 그건 사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다들 주훈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윤희는 슬그머니 담배를 챙겨 나간다.


S#13 포장마차 앞


윤희가 비닐 문을 밀치고 포장마차를 나선다. 길가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술 취한 듯 쪼그려 앉는다. 지나가던 행인이 길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녀를, 망조 들었다는 표정으로 흘기며 지나간다. 포장마차 앞으로 나온 연수. 길가에 쪼그려 앉은 윤희를 한동안 서서 보다가 그 옆에 함께 쪼그려 앉는다. 윤희는 담배 연기를 깊게, 연거푸 들이마신다. 들이마신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이 매워서인지,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연수 : (걱정된다는 듯) 괜찮아?

윤희 : (잠시 멍하게 바라보며) 어, 지금은 괜찮아. 내일은 술 때문에 힘들겠지만.

연수 : (별스럽지 않게) 수업 없는 날은 뭐 해? 뭐, 특별히 좋아하는 취미라도?

윤희 : (좀 이상하다는 듯) 왜? 나한테 관심 있어?

연수 : (멋쩍은 듯) 아니, 뭐..

윤희 :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농담이야. 내가 좋아하는 건,‘다림질!’

연수 : (신기한 듯) 다림질..? 어.. 근데 왜?

윤희 : (진지) 간혹 다림질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구겨진 게 펴질 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망친 것을 다시 펴주는 느낌이야. 순간, 나도, 사람들이 말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어. 다림질에서 희망을 본다는 게 웃기지?

연수 : (잠시 가만 뚫어져라 보다가) 아니, 이거 아주 신선한데!.

윤희 : 근데 단춧구멍 앞에서 주저해. 지금처럼 다림질을 잘할 수 있을까 하고, 근데 여지없이 어긋나. 그게 내 삶인 거 같아 우울하지만, 어쨌든 다림질할 때 기분은 좋아. 구겨진 깨끗한 걸 펴는 느낌!


S# 14 포장마차 안


부원장 : (고집스럽게) 형은 말이야, 우리 강사들이 학생들한테 "노력하면 다 된다"라고 하잖아? 나도 초짜 때는 무슨 진리인 양 "I can do it. Just do it now."라고 신념처럼 부르짖었지. 근데 우리 알잖아? 아무리 "I can do it."이라고 외쳐도 잘 안 된다는 거.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거 말이야. “

주훈 : (부원장의 빈 잔에 술 따라주며) 전적으로 동감해요. 저는 이런 류의 드라마가 싫더라고요. 어떤 눈먼 장애인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그러면 사람들은 뜨거운 감동을 느끼고. 저도 손뼉을 치고 싶어요. 근데 그가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그 드라마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겠죠. 그 장애인도 할 수 있는데 사지 멀쩡한 너희들은 왜 못하냐고? 그런 거 아닐까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해요.

부원장 : (받아서) 사람들은 열심히 해서 어떤 결과를 얻으면 착각을 해. 내가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사이) 그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데. 반대로,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됐을 텐데 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주훈 : 전에 왕충의 글을 읽었는데, 충신은 죽임을 당하고 간신이 오래 살기도 하며, 큰 도둑은 붙잡히지 않고 작은 도둑만 잡히며, 오래 살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는 등,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헛수고가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이는 세상사가 필연이 아닌 우발적인 현상이며, 결국 운에 달려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따라서 저는 노력할 수 있는 경계까지 시도한 후에, '아니면 말고'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부원장 : (눈이 번쩍) 듣고 보니 그 말이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었네! 쿨한 말이었잖아!

주훈 : (말꼬리 자르며) 아, 그리고, 김수영 시집에서 '우리들의 웃음'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런 시구가 나오더라고요. "선생과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표현이 나오는데, 뭔가 둔중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부원장 : 그게 무슨 말인데, 아이를 가르친 게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말이 뭐가 대단한데? 동윤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

동윤 : 저는 수학강사입니다. 주훈선생은 국어강사고요. (주훈을 바라보며) 무슨 말이야?

주훈 : 획일적인 교육방식이 아닌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했어요. 평범한 말로 심오한 뜻을 전달한다는 게 놀랍더라고요. 들뢰즈의 단독성과 특수성이 연상되기도 하고. 왜 시인들이 ‘김수영, 김수영’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부원장 : 들뢰즈는 또 누구야?


#윤희와 연수 들어온다.


부원장 : (연수와 윤희를 돌아보며) 들뢰즈 알아?

윤희 : 프랑스 철학자인 거밖에 모르는데요.

부원장 : (놀리듯) 그럼, 단독성과 특수성도 모르겠네.

윤희 : (짜증 난다는 듯) 아, 재밌는 얘기나 해요.

동윤 : 술이나 먹자고요. 건배!


# 부원장은 다시 핸드폰화면을 문질러 문자를 확인한다. 답장은 여전히 없다.


시간 경과. 소주가 예닐곱 병 까져 있고. 얼추 취한


부원장 : (말을 돌려) 형이 조금 있으면 쉰 살인 거 알지? 놀랍지 않아? 지금까지 뭔가 죽어라 하긴 한 거 같은데,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 그냥 먹고 자고 싸다가 다 지나간 거 같아. 애초부터 글러먹었던 건 아닐까 생각도 해봤어.

윤희 : (쳐다보며) 부원장님, 오늘 좀 센티하시네요. 그래도 잘해오셨잖아요. 따르는 사람들도 많고.

부원장 : (한숨 쉬고) 잘하긴 뭘. 후회되는 일 투성이지. 내 말이 꼬리꼬리하게 들릴 수도 있어. (이쪽저쪽 바라보며) 내가 이혼하고 지금 아내를 만난 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났잖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내를 사랑 안 하는 건 아닌데 사랑이라는 게 느껴지지가 않아. 한때는 아내의 사랑을 받으며 나도 아내를 사랑하면서 '아,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지금은 가장 옆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있어. '이게 대체 뭔 짓인가' 싶어서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냐. 아내는 아마 형을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할 거야.

동윤 : (머뭇거리며)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부원장 : (두 손으로 얼굴 부비고) 집 안에 별일은 없어. 아이들도 애 엄마랑 관계도 나쁘지 않고. 그냥... 사랑이 별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지금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내가 전처 역시 사랑했다는 사실, 그녀를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가끔 혼란스러워. 만약 내일 당장 우리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결국 그렇지 않겠어? 남은 사람은 한동안 슬퍼하겠지. 그리고 얼마 안 가 기운을 차리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겠지. (씁쓸하게 웃으며) 지금은 둘 다 마치 묶인 개가 제자리에서 뱅뱅 돌며 왈왈 짖어대기만 하는 것 같아. 그래서 끝낼까도 했는데… 어떻게 끝내야 할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크게 숨을 몰아쉬며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그냥 해결되지 않은 채 살기로 했어. 이 결혼을 깨고 싶지 않은 게 아내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도 아니고, 그냥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서야. 날아가는 마음을 억지로 당겨와 언제까지 살지가 궁금해.


분위기 어색해 각기 잔을 기울이고.


주훈 : (주저하며)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의미는 시간이 쌓여야만 제대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여기서 멈춘다면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겠죠.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일들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같은 자리만 맴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윤희 : (생각 많은)...(침묵)

연수 : (조금 놀라, 부원장 보며) 힘내시라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주훈 : (담담하게) 저도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변하는 게 있더라고요. 제가 열망하는 소설가라는 직업도 사실 거짓 속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결혼 생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이) 설령 결혼이 서로 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일지라도, 각자가 역할을 해야만 유지가 되고요. 물론 제가 역할 놀이에는 별 재능이 없지만, 어쨌든 남편으로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더군요. 그런 충실한 역할 속에서도 간혹 다른 사람에 대한 욕망을 못 느끼는 건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시스템에 이왕이면 머물려고 해요. 가급적 궤도이탈은 하지 않고요.

윤희 : (주훈을 가만히 보며) 역할극 속에서 궤도 이탈은 하지 않고 남편과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생각은 이해하지만, 생각을 가둘 수 있나? (담백하게) 바깥으로 향하는 관능적인 생각을 막아내면 행복한 건가? 그건 인간의 본성에도 맞지 않아! 충실한 것을 배반할수록 한 번뿐인 삶에 더 충실한 것 아닌가? (달래듯) 무리들이 따르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예상치 못한 미지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해.

주훈 : (윤희를 보며) 쉽지 않은 얘기인데..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느껴져.

윤희 : 이상적이라는 얘기라는 거, 나도 알아. 근데, 우리가 진실된 삶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어? 부모는 부모 역할에, 남편은 남편 역할에 맞춰 행동하잖아. 그건 진실된 게 아니라 관객을 의식해서 사는 거라고 생각해. 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거짓말처럼 사는 거지, 안 그래? (술잔을 빙글 돌리며) 내가 좀 별종 같아 보이겠지만, 한때는 나도 그 누구보다 여성스러웠어.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야. 아버지는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식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이었어. 게다가 간혹 종교적으로 독실해서 세상의 타락과 싸우는 금욕주의의 신봉자라고나 할까? 내가 여대에 간 것도 아버지 때문인데, 결혼 전에는 남자를 만나면 안 된다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 나는 그때 바보같이 그 말이 다 맞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버지는 토할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었어. 남자에게는, 결혼에 관련한 모든 규칙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걸 몸소 실천해서 보여줬지. 정말 역겨웠어. 그런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이제는 편견이나 통념에 갇힌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단호하게)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면 후회 없이 나답게 살다 가는 거지. 사랑도 언젠가 끝날 테니, 감정이 남아있는 동안은 남 눈치 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랑할 거야. 그러다 다시 권태로워지면 또 일을 저지르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한때는 그저 반항이었는데, 이제는 일상이 됐어.


윤희의 표정이 갑자기 화나고 속상한 듯 변한다.


윤희 : 내가 골초에 술에 절어 있고, 술 취하면 '씨발' 하는 것 때문에 별 시답잖은 놈들과 정말 많이 싸웠어. 근데 그런 인간들이 나랑 자고 싶어 해. 이해할 수 있어? 만약 내가 그놈들 한 놈씩 자 주면 그 새끼들은 날 이해하게 될 거야. 숭배를 하든, 편견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사랑을 하는 구도자처럼 폼을 잡든 하겠지.

연수 : (난감하게, 윤희 보는)

부원장 : (아, 이거 뭐지 싶은 듯. 약간 당황해서) 이야기가 왜 이리 흘러가는 거야?

동윤 : (눈치 보며 빠르게) 술은 놔뒀다 국 끓여드시려고 그러시나. 건배나 하죠!

주훈 : (별일 아니라는 듯) 흥미로운데요, 뭐. 수긍이 되는 면도 많고요. 감정이 어디 논리대로 가나요? 충실함을 배반하라는 그 말, 인상적인데. 행복도 반복되면 권태롭고, 이상적으로 여겨진 상대와의 섹스도 반복하면 권태롭고. (사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도 낙원에 사는 게 권태로워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죠.

윤희 : (생각하며) 사내놈들이 가끔 지나간 연인에 대해 물어볼 때가 있어. (어이없어) '그놈 하고 좋았어?'라거나 '잘 맞았어?'라고 묻는데, 뭐가 잘 맞았다는 건지… 성격이? 아니, 얼굴도 모르는 놈이 그 짓은 자기보다 잘했을까 하는 열등감, 그런 거지. 그건 물건 성능이 어떤지 따지는 품평회나 다름없어. 겉으로 볼 때 멀쩡한 인간들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코 현명하지 않더라고. (화나는 듯) 그런 인간들은 바람은 피우면서도 결국 돌아와서 흐느끼며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고 말해. 이토록 이기적일 수 있을까? 남의 실수는 용서 못 하면서 자신의 실수는 용서해 달래. 그런 인간들은 돌이킬 수 없는 아내의 과거에도 집착하고 질투하더라고. 대단한 놈들인 것 같아. (떠보듯, 아무렇지 않게) 근데, 중년의 유혹자들이 쿨하고 솔직한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그들의 오만함이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조급함 때문이야. 그래서 뻔뻔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지. 그리고는 자기 볼일 보고 끝이야. 그러니깐 자기가 낳은 아이가 진짜 제 아이인지 몰라 불안해하지. 여자는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어도 누구의 자식인지 알거든. (같잖게 보는) 그러니깐 플라톤이 처자식을 공유하자고 한 거야. 어차피 어느 놈이 자기 새끼인지 모르니까. 비겁한 거지.


# 시간경과. TV에서는 영화감독의 시상식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주훈 : (미소 지으며) 지난밤 꿈에 봉준호 감독이 나왔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동윤 : (어이없는 웃음 지으며) 봉준호가 꿈에 나와서 기뻤다고?

주훈 : (따뜻하게)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에서 송강호를 안아주듯 나를 안아주는 거야. 전날에 '설국열차'를 봐서 봉 감독이 나온 것 같은데. (웃으며) 여하튼 동경하는 대상이 꿈에 나와 안아주니 기뻤어.

부원장 : (의아한 듯) 아름다운 여인이 안아준 것도 아닌데 기쁘다고? 여하튼 (술을 마시며, 순간 진지하게) 무슨 영화인데?

주훈 : (안주를 뒤적이며)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거대한 열차에서 벌이는 계급투쟁을 그린 영화예요.

부원장 : (가만히 보며) 우리가 질리도록 싫어하면서도 실은 동경하는 계급 말이지?

주훈 : (담담히) 네, 맞아요. (가만, 눈치 보며)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어찌어찌해서 '설국열차'의 바닥을 열어보니 어떤 아이가 좁은 공간에서 기계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선택은 기차가 멈춰 얼어 죽을 수 있는 것을 감수하고 아이를 구하는 겁니다. 아이를 구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누려왔던 행복은 사라지겠죠. 두 번째 선택은 우리의 지속적인 삶을 위해 애써 못 본 척하는 방법입니다. 양심은 잠시 찔리겠지만,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세 번째 선택은 그 아이를 착취하며 삶을 유지해 온 자신에게 분노하고, 다음 역에 내려 설원 속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연수 : (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하지만, 우리의 선택이 무엇일지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좁은 기계실에서 벌어지는 착취를 외면하고 그 사실을 지우려고 노력하겠죠. 그러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아이를 구할 거라 생각하고.

부원장 : (답답한 듯)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뭔데?

주훈 : (웃으며)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며 끝나요.

부원장 : (의외라는 듯) 봉준호답지 않은 것 아닌가? 냉소적으로 끝나야 하는 것 아냐?

동윤 : (순간 떠오르며) 학원에도 계급이 있잖아요. 동네 학원이나 EBS를 듣는 계층, 잘 나가는 일타 강사의 인강이나 고급을 표방하는 대치동 단과반을 다니는 계층으로요.

부원장 : (귀가 솔깃) 인강이 확대되면서 작은 학원들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입시가 복잡해질수록 학원이 망할 일은 없어. (단호하게) 게다가 우리 어머니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와 자신의 욕망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학원은 절대 망하지 않아.


S#15. 포장마차 (새벽/외부)


시간 경과. 포장마차에서 나온 다섯 사람. 부원장은 영수증을 구겨 길바닥에 버린다. 포장마차 앞 이면도로는 어수선하다. 동윤과 연수는 멀리서 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며 "택시!"라고 소리친다. 나머지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카메라가 연수의 뒤를 따른다.


S#16. 연수 집 (새벽/내외부)


현관문 앞에는 각종 전단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연수는 철제 현관문을 열고, 구두를 벗을 자리를 찾아 타일 바닥에 발을 붙인 채 더듬더듬 움직인다. 그리곤 손을 뻗어 벽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켠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이 부시다. 어둠 속에 숨어 버렸던 실내가 환하게 드러난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창문에 미끄러진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창문은 반쯤 열리는 들창이다. 맞은편에는 차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빌라 외벽이 단호하게 버티고 있다. 손만 뻗으면 차고 습한 외벽에 닿을 듯하다. 그 사이를 황소바람이 불면서 지나간다.


[부감]

연수는 침대의 옷가지와 책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옆으로 눕는다.


[천천히 F.O.]

꾸르륵 신음소리를 내는 배관 파이프 소리는 계속되다가 서서히 잦아든다. 그리고 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