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억 년의 텍스트, 나의 픽션으로 다시 태어나다
그는 검지로 마우스 휠을 빠르게 스크롤하며 글을 위아래로 움직인다. 처음 시도하는 시나리오. 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야 할지, 내용을 바꿔야 할지, 아니면 도로 거둘지 고민에 잠긴다. 시나리오에 담고 싶었던 메시지는 명확하다.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로움을 주지만, 동시에 삶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매일 똑같이 출근하고,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끔 술 한잔 하며, 그 사이에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이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독자들이 학원이라는 공간의 속살을 엿보고, 인간관계의 미묘한 갈등, 고독, 상실감을 느끼길 바랐다. 누군가 말했듯, "소설은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를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처럼 그의 글도 그러하기를 소망했다. 그가 시나리오 형식을 택한 이유는 대화 구조를 통해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독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하고, 등장인물의 시선을 통해 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하며, 캐릭터의 감정을 체험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공감을 증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을 다시 읽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군더더기를 걷어내야 할 텐데, 자꾸만 무언가를 더 담으려 하고, '일상의 반복이 곧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설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식이라면 독자들이 한달음에 읽어내기는커녕, 시시껄렁한 말장난처럼 보여 거들떠보지 않을 거 같다. 글깨나 끼적이는 이들에게는 마치 바짓단이 뜯어져 거친 실밥이 다 드러난 듯 거슬릴 수도 있을 테다. 결국, 이 글도 의도만 앞섰을 뿐, 결말도 없이 흐지부지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를 감싼다.
그는 세상에 아직 나온 적이 없는 글을 쓰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소설이라고 큰소리치고 다닐만한 소설. 그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 "이거, 이 친구 대단한데!"라는 말을 들을만한 소설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오직 픽션일 뿐임을 아는 자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쓰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소설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주는 거대한 패러디다. 삼라만상은 138억 년의 '상호 텍스트'다. 너는 나의 텍스트이고, 나는 너의 텍스트이다. 수천만 페이지를 옮겨 적던 필경사들이 양피지 위를 기어간 자취를 따라 과거로 들어가듯이, 누군가의 글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다만,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읽었으면 한다.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의 따사로움과 빛 속 공기의 움직임,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온전히 가두었던 네모난 햇빛이 그를 지나치는 쓸쓸함을 아는 누군가.
그는 일어나 게으르게 네 걸음 옮겨 거실로 들어간다. 햇살이 눈부시고 나른했다. 그렇게 작은 빛의 입자가 태양에서 여기까지 여행 온 게 신기하다. 고양이는 유리창을 지나쳐 온 평행사변형의 햇빛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꿈속에서 따사한 햇빛을 쬐며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 듯하다. 그의 움직이는 소리에 일어나 등을 둥근 산처럼 말고, '니아음' 하품을 쩍 하고는 앞발을 길게 앞으로 늘어뜨린다. 발은 덜 마른 매니큐어가 서로 붙지 않게 손가락을 최대한 쭉 펴는 모양이다. 이내 다가와 그의 발치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몸을 구른다. 하얀 털실 같은 앞발, 하얀 솜사탕 같은 가슴께, 분홍색 젤리발바닥이 그의 마음을 몽글거리게 한다.
예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이 글에서 토마시와 테레자는 연인 관계이고, 카레닌은 테레자가 키우는 개다.
"테레사는 카레닌과의 사랑이 토마시와의 사랑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나 토마시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녀 간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느껴졌다. 카레닌과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었다. 테레사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누군가 헤게모니를 잡고 관계를 이끌어 가게 마련이다. 인간관계에서 작용하는 인력은 항상 그런 식이다. 그녀는 인간 커플을 괴롭히는 질문, 즉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와 같은 의문을 카레닌에게는 단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서는 대신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테레사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테레사는 죽어가는 카레닌을 보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 주는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깨달았다. 카레닌은 인간이 말하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모를 것이다. 육체가 죽어도 살아남는다는 고귀한 영혼,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육체와 영혼 중 무엇이 우월한지 따지지 않을 테다. 그건 카레닌에게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해지며 만지고 싶은 것, 그것이 전부였다. 거기에는 연민, 다정, 공감, 사랑이 신비롭게 결속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랑이 가능한 곳은 바로 자연의 세계였다. 그곳에서는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추측하여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종종 이런 상상을 했다. 그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일들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것을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글로 써야 할지, 그 글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궁금했다. 그는 창가로 간다. 오렌지 빛이 창문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햇볕으로 따뜻해진 창유리에 손바닥을 대본다. 본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빛 아래서 세상은 얼마나 밝을 수 있을까? 창밑으로 포플러나무의 그림자들이 놀이터를 가로지르고, 그네의 그림자는 흔들리고, 아이들의 목소리는 행복하게 울려 퍼지고, 건물들 사이로 햇빛이 얼씬 얼씬 비치고, 모퉁이를 도는 젊은 여인의 블라우스는 살랑인다. 길게 뻗은 그의 그림자는 식탁 의자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자신의 몸을 할짝할짝 핥던 고양이는 무심결에 앞다리를 세운 채 멍하니 창문을 올려본다. 백묵 같은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거실바닥에 고요하게 내려앉고, 햇볕 속에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먼지들이 있었다. 고양이는 그것들을 넋 놓고 보다가 잡으려 발돋움 친다.
그는 시계를 본다. 오후 2시.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았다. 잠시 거실을 서성이던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작은방으로 향해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첫 페이지를 펼쳐 짧은 구절을 읽어 내려간다.
"P가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성이 서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휘감겨 전혀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 커다란 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희미한 불빛 한 점 없었다. P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처럼 보이는 데를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