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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C12 32 503' 의 탐욕적 선택

by 김영


PDA 화면에 'ZC12 32 503'이라는 신선제품 코드가 뜬다. 준하는 오후에 집품(picking) 작업을 배정받았다. 집품이란 고객이 주문한 상품을 찾아내는 일이다. 겉보기엔 보물찾기 같겠지만, 놀이가 아닌 엄연한 노동이다. 보물을 찾아 떠나는 설렘이나 숨겨진 단서를 발견하는 짜릿함은 없다. 그저 하염없이 카트를 끌며 이만 보 넘게 발품을 파는 일이다. 속 없는 친구들이 "그걸 사람이 다 해?"라고 물으면, 그는 늘 "그럼 사람이 하지 누가 해"라고 답했었다. 그가 대신 상품을 찾아 카트에 담아주는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려는 사람들이다. 한 부류는 넓은 매장을 헤매며 상품을 비교하는 대신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다. 잔디밭 식탁 위 체크무늬 냅킨과 신선한 야채, 고급 탄산수가 놓여 있고, 남편은 그릴에서 고기를 굽고, 아내는 유모차 속 아이를 보며 미소 짓는다. 아이가 호스로 물을 뿌리면 물방울은 빛에 반사되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마치 행복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부류는 그처럼 상품을 사기 위해 누군가에게 시간과 노동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동을 팔아 임금을 받고, 그 돈으로 다른 노동자가 만든 상품을 산다. 이들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지만,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는 신선식품 코너로 서둘러 움직인다. 철제 진열대에 쌓인 방대한 상품들 속에서 물건 찾기는 의외로 쉽다. PDA 화면에 상품 위치, 사진, 수량이 상세히 표시되기 때문이다. PDA가 지시하는 장소에서 위치 바코드를 스캔하면 상품 정보와 수량이 뜨고, 화면의 수량만큼 꺼내 스캔 후 확인 버튼을 누르고 카트에 담으면 된다. 이는 꼬박 반나절 동안 주인을 대신해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덕분에 포장 작업보다 지루함은 덜하다.


'ZC'는 신선구역, '12'는 통로, '32'는 진열대, '503'은 칸을 의미한다. 즉, 신선제품 코너 12번째 통로, 32번째 진열대의 5층 세 번째 칸이 목적지다. 그는 끽 소리를 내며 카트를 요란하게 움직인다. 정해진 진열대에는 생연어 필렛, 담양 딸기, 무항생제 닭가슴살 세 가지 상품이 놓여 있다. 위치 바코드에 PDA를 대자 '삑' 소리와 함께 상품 정보가 뜬다. 그가 집어 든 것은 털이 벗겨진 토막 난 닭가슴살이다. 평생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한 채 종국에는 잔인한 칼을 피하지 못한 닭. 옆에서는 희미하게 달콤한 딸기 향이 스쳐 온다. 상품을 카트에 넣고 PDA 화면을 보니 '3C6 25 205'가 떠 있다. 카트를 유제품 코너로 옮긴다. 카트 하나를 가득 채우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나마 오후 집품 작업은 '긴급' 경고 문자가 뜨지 않아 다행이다. '긴급' 문자가 뜨면, 마치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정신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 게임은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처럼, 그들의 불행은 결코 엇비슷하지 않고 제각각의 고유한 서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좁은 통로에서 진열 직원, 검수 직원, 마감에 쫓기는 집품 직원들이 뒤엉켜 "죄송한데 먼저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말 대신 끽끽거리는 바퀴 소리로 길을 터달라고 무언의 신호를 보낸다. 집품이 빨라야 포장 마감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상품 입고, 적재, 집품, 포장, 배송으로 이어지는 시스템 때문이다.


물론 애플리케이션이 동선을 최적화해서 알려주지만, 마감 시간에는 알고리즘도 고뇌하는 듯 로딩이 길어진다. 최적화 문제를 해결하는 기법 중 하나인 '탐욕 알고리즘'(Greedy Algorithm)은 매 순간 가장 최적의 선택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를 '탐욕적 선택'(Greedy Choice)이라 부른다. 문제 전체를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각 단계에서 탐욕적 선택을 통해 최종 답을 찾는다. 이때 각 단계의 선택은 독립적이어서 현재 선택이 미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즉, 탐욕적 선택이 항상 최적의 해(solution)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문득 궁금해진다. 집품 작업에서 탐욕적 선택은 무엇일까? 아마 이런 것일 테다. 시간이 가장 빠른 활동 선택, 선택 지점까지 최단거리 지점 선택, 장애물 회피 선택, 체증이 적은 간선으로 인접 지점 선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