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아래 흐르는 강물과 슈트의 블루 스트라이프 안감에 대하여
그의 나이 정도가 되면 여러 가지를 축적해 놓아야 한다. 풍부한 경험, 꿰뚫는 직관, 현명한 지혜, 남다른 성취 같은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돈'은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그가 이렇게 된 것도 겉으로는 여러 문제가 얽혀 있는 듯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돈 때문이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는 말을 어쩌면 들어 보았을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고,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불행하다는 그 말. 하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행복은 저마다 다른 모습이지만 불행은 늘 돈의 문제로 다가온다고 결론지었다. 마치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결국 검정이 되는 것처럼. 돈과 무관한 관계는 있을 수 없으며, 관계의 질 역시 돈에 의해 좌우된다고 그는 믿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초등학교 시절이었을 거다. 그는 돈을 모으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다고 저금의 형태는 아니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동전 한 개를 다른 동전 위로 떨어뜨릴 때 생기는 ‘쨍그랑’ 소리를 좋아했다. 그 돈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연대별로 배열하면 항상 빠진 연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채우지 못한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그랬던 돈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인생의 모든 측면을, 날렵한 바늘이 검은 옷감 위를 들락날락하며 관통하듯, 공격해 왔다. 전부였던 하나를 잃자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마저 잃었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은 안정된 직장에서 적지 않은 성과급을 받았고, 약간의 투자 성공까지 있었다. 그 결과 풍족한 편이어서, 대다수 사람을 괴롭히는 빈곤과 박탈감은 모르고 지냈었다. 그렇다고 자잘한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돈벌이가 좋았기에 모든 것을 이래저래 굴러가게 만들었다. "노력하면 안 될게 뭐가 있어"라고 운 좋은 사람들이 말하듯 따라 했으며, 씀씀이가 헤픈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는 곧잘 일의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었다.
발레주차를 하고 백화점의 명품관을 드나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제품을 보면 흥분되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매장 안은 서늘하여 몸에 아스스 소름이 끼치고, 조용한 분위기에는 엄숙함이 묻어있었다. 높은 가격으로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들이다. ‘피부색이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우린 함께 웃어요. 우린 누구나 평등하니까.’ 라며 함께 모여 두루뭉술 행복한 모습을 짓는 그런 만만한 브랜드가 아니다. #합리적가격#만인평등#환경보호#사회적책임 같은 해시태그대신 #프리미엄#VIP#장인정신#역사와전통의 해시태그가 붙어있는 브랜드다. ‘우린 하찮은 것들은 상대 안 해. 우린 얼음처럼 차가워, 함부로 다가오지 마. 신분상승하고 싶으면 돈을 많이 내면 돼.’라고 턱을 반쯤 올리며 더없이 도도한 모습을 보이는 브랜드였다.
매장의 정면에는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을 설명하는 디스플레이가 있고, 양옆에는 상품들을 예술 작품처럼 전시하여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뒤편에는 젊은 세대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한 최신 트렌드의 제품들이 있다. 쇼핑에 전혀 방해할 뜻이 없다는 듯 우아한 미소를 짓는 판매원은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라며 한발 떨어져 있다. 그녀는 그가 매장을 떠날 때까지 매뉴얼대로 친절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부드러운 조명이 공간을 감싸고, 세련된 선율이 낮은 음량으로 잔잔히 흐르고, 은은한 가죽냄새와 우아한 아로마 향이 코에 닿는다.
그는 매장 옷걸이에서 고른 옷을 들고 탈의실 안쪽, 커다란 거울 앞에 선다. 옷에 달린 가격표를 꼼꼼히 확인한다. 매장에서 흘끗 보았던 가격과 다르지 않다. 망설일 수밖에 없는 가격에 살지 말지 고민한다. 그 옷은 마치 “이 옷을 입으면 너의 고개가 빳빳이 세워지고 몸에서 윤택함이 배어 나올 거야”라고 속삭이며 부추기는 듯했다. 그는 ‘좀 더 열심히 벌면 되지’라는 생각과 함께,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쇼핑백을 들고 약간은 연극적인 몸짓으로 당당하게 매장을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될 리 없다면, 서로가 알 만한 연기를 해야 한다. 그는 옷을 살 능력은 되지만 막상 입어보니 취향이 아니라는 듯, 멋쩍은 미소를 띠며 매장을 나설 터이다. 판매원은 여전히 미소를 띠며 인사하겠지만,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놓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특히 슈트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한창때인 마흔 무렵, 잠들기 전 다음 날 일정을 정리하고 입을 옷을 미리 골라두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붙박이장의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슈트들을 살폈다. 사놓고 거의 걸쳐보지 않은 슈트, 얇은 종이로 가득 찬 정체 모를 상자들, 세탁소 비닐에 싸인 셔츠를 볼 때면 왠지 모를 미안함이 일었다. 빼곡한 옷 사이로 손끝이 미끄러지자 간지럼이 났고, 머릿속 선율에 맞춰 손가락은 리듬을 타듯 움직였다.
격식 있는 블랙, 샤프한 그레이, 스타일리시한 네이비, 트렌디한 체크무늬, 그리고 피부 감촉이 좋은 편안한 리넨 슈트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늘 신중했다. 핏도 고민했다. 클래식한 레귤러핏, 모던한 슬림핏, 타이트한 스키니핏 중 다음 날의 일과 만남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했다. 그는 깔끔하고 샤프한 드레스 셔츠와 캐주얼하고 편안한 셔츠 중 슈트에 어울리는 것을 고른 후에는 넥타이 차례였다. 넥타이 걸이에 걸린 다양한 타이와 슬림 서랍 속 액세서리들을 보면 마음이 설레었다. 재킷 안에 셔츠를 겹쳐 놓고 여러 넥타이를 얹어보며, 매는 방식과 딤플까지 상상했다. 벨트는 이미 결정되었기에, 그다음은 신발을 골랐다.
그는 이렇게 갖춘 차림으로, 때로 만남의 과정에서 갈등 상황이 벌어져도 통제력을 잃지 않는 자신을 상상했다. 일이 순조롭게 흘러갈 때조차 그는 일부러 갈등 상황을 조성한다. 긴장감을 즐기려는 듯, 그는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고 자잘한 무늬가 새겨진 짙은 남색 넥타이를 느슨하게 한다. 양복 소매를 걷어 올리자 블루 스트라이프 안감이 살짝 노출되며 의도된 스타일이 완성된다. 그 시크한 옷맵시에 맞는 포즈로 상상 속 갈등을 해결한다.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자, 그는 넥타이 매듭 부분을 단정하게 고쳐 매고 셔츠의 단추를 채운다. 걷어 올렸던 양복 소매도 원래대로 내린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설렘으로 달아올랐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과 스쳐 지나가는 시선까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럴싸하게 보일 것 같으면 비로소 잠에 들었다. 그러나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면, 그는 다시 옷들의 배치를 달리 해 보았다.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이 모든 과정은 그에게 단지 잠깐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련되게 입기를 좋아했던 그는, 지금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닌다. 옷들은 여행용 가방에 욱여넣어진 듯 주름이 지거나, 옷걸이에 서너 개가 덧걸려 한쪽이 축 늘어져 있거나, 닳아서 보풀이 일어났다. 심지어 녹슨 철사 옷걸이에 걸어 놓은 듯 희미한 녹물이 배어 있는 옷도 있었다. 그런 옷 속으로 밀어 넣는 몸에서는 눅진한 땀냄새와 알싸한 파스 냄새가 났다. 머리는 밤사이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힌 것처럼 곤두섰고, 귀 주변 머리칼은 들쭉날쭉했지만 대충 야구모자로 질끈 눌러쓰면 그만이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오직 '몰골사나움'뿐이었다.
별다른 계획 없이 집을 나온 지 벌써 2년이었다. 각방을 쓴 기간까지 더하면 3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지 6개월이 넘었고, 전화 통화는 몇 주 전이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사람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들은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했다.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 대신, 어떻게 하면 혼자 시간을 보낼지 궁리하기 바빴다. 인생의 짝을 찾아 그토록 헤매고 결혼해, 한집에 살며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거실에 나올 때면 뒤에서 발자국 소리라도 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면 멍하니 있다가도 황급히 컴퓨터 화면을 보는 척했다. 혹시라도 눈이 1, 2초라도 마주치면 그녀가 "뭐, 할 말 있어?"라고 물었고, 그는 "아니, 아무것도 없어"라고 대답했다. 그의 입에 붙은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 그는 그 말처럼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화 통화 중에도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화기 너머로는 라이터를 켜는 소리,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내쉬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어쩔 수 없이 마주 앉아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서로를 그저 멀거니 바라보며, 침묵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차곡차곡 쌓여왔던 감정들이 결국, 마치 고무장갑에 바람을 불었을 때 손가락들이 튀어나오듯이 터져 나왔다. 둘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려는 듯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녀의 분노는 그의 분노를, 그의 분노는 다시 그녀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그래도 그때는 체념 대신 미워하는 감정이 더 컸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첫 말다툼은 결혼 전, 교통 체증이 심했던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함께 탄 차 안에서였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 미리 약속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왜 모임이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야 했는지, 그리고 왜 단둘이 밤을 보낼 수 없는지 따져 물었다. 첫 말다툼이라 둘 다 서툴고 어색했다. 서로의 말에 맞서는 몇 마디가 오고 간 후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는데, 이는 사람을 쉽게 지치게 했다. 기대했던 로맨틱한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엉뚱하게 끝나버렸고, 전나무 그림이 그려진 포장지에 싸둔 선물은 전하지 못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간헐적인 다툼은 계속되었다.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다툼 후,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때로는 격정적인 섹스로 이어졌다. 그것은 갈등이 해소되면서 찾아오는 해방감이 뒤섞인 섹스였다. 오직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강렬한 연결감이었다. 하지만 간혹, 그들은 관계 중 서로에게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고 겉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차가운 버터를 억지로 토스트 위에 펴 바르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들도 한때는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였다. 그는 그녀의 반복적인 특정 낱말에도 매력을 느꼈고, 그녀는 그의 이상적인 이야기에 몸을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때로는 서로 연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그 연기마저도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은 서로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
함께 한집에 살게 된 순간은 더없는 행복이었다. 집은 마법에 걸린 듯, 부드러운 공기와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가득했다. 매일 밤 그가 그녀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그의 몸을 열렬히 원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맨몸을 찬찬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볼까 상상하며 서툴지만 관능적인 몸짓을 취해보았다. 그때의 모습은 어릴 때 물기를 닦아주기를 기다리며 욕조 안에 서서 목적 없이 보던 때와 달랐고, 지금처럼 여기저기 처지고 움푹 꺼지고 고무줄에 눌린 자국이 있을 때와도 달랐다. 풋풋한 미숙함도, 쇠락한 미모도 아닌, 긴장감 넘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대담하면서도 긴장감 넘쳤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기보다는 삶에 대한 큰 믿음이 있었다.
벤야민의 말, '부르주아적 삶이란 사사로운 일들의 체계이다'가 떠오른다. 그 말처럼 그녀는 카페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안정성이라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엉덩이만을 겨우 가린 듯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옷가게에서 자신 취향의 옷을 고르며, 자박거리는 소리를 내는 하이힐을 신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문학 수업을 들었다. 네일숍에서는 다이어트에 관해 수다를 떨었고, 미용실에 가서는 유행하는 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는 느지막이 커피를 마시며 미래를 이야기하고, 재즈를 들으며 조각조각 파편화된 삶을 어떻게 채워갈지 고민하곤 했다. 그렇게 사사로운 일상 속에서, 그와의 순간들은 유독 그녀에게 선명하게 빛났다. 산책길에 그녀의 팔이 그의 팔꿈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면, 그는 그녀의 팔짱 낀 손을 지그시 힘주어 잡았고, 그녀는 스르르 힘을 뺐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옆 얼굴에 닿으면 그녀는 미소를 지었고, 그도 따라 웃었다. 그의 미소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었다. 세상 어떤 의심도 없는 깊은 믿음과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녀는 그 미소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햇빛이 쏟아지는 조그만 창문 밖을 내다볼 때면, 그녀는 다시 살아난 희망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쉽게 옮길 수 없는, 오직 그와의 관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들의 사랑은, 여름 내내 싱그러웠던 담쟁이덩굴이 겨울이 되자 잎사귀 하나 없이 어두운 갈색 담벼락에 해골처럼 줄기만 남은 상태로 바뀌듯, 이젠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었던 그 '사랑'이라는 단어, 모든 어려움을 비껴가게 했던 그 단어, 오용되어도 싫지 않던 신비스러운 그 단어는 이제 거짓말이라도 쓰기 싫은 말이 되어버렸다. 뭐, 그녀에 대한 욕망도 오래전에 사라졌다. 물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이름을 나직이 속삭이며,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그녀의 벗은 몸을 상상하고, 맞닿은 그녀의 몸을 강하게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던 순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 호기심과 기대감은 혐오감과 거북함으로 바뀌었다. 각방을 써서 좋은 점은 침대에 들기 전 과장되게 하품을 하거나 "미안해" 하며 옆에 있는 트윈베드로 몸을 옮기지 않아도 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눈으로 좇고 있음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간간이 보여주어야 했던 행복한 척을 안 해도 된다.
아이도 그로부터 멀어져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결혼 이듬해에 태어났고, 몇 달 동안 둘은 매일 녹초가 되었지만 더없이 행복했다. 그가 30대 후반이고 그녀가 30대 중반이었지만, 서로 꼬마처럼 행동하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은 약간은 연극적이었다.
아기용품들을 마구 사들이고, 신나게 놀아주며, 젖은 기저귀를 동그랗게 말아 용기에 버렸다. 목욕을 시키고 작은 몸에 분을 발라주고, 늘어진 입에 이유식을 먹이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아이가 잠든 후에는 둘도 곧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문밖으로 택배를 가지러 가는 몇 분 동안에도 조바심을 내며 돌아오곤 했다. 아이는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넘어지거나 낯선 것을 입에 대거나 구석진 곳에 머리가 끼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도 점차 익숙해졌다.
간간이 서로 편안하게 마주 앉아있을 때면, 그들은 하루 중 일어났던 사소한 일들을 선물처럼 풀어놓았다. "이거 정말 신기하지 않아? 그렇지?"하고 누군가 물으면 상대는 기꺼이 동의했다. "응, 정말 신기해." 그때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그들 사이를 파도처럼 오갔다. 집안이 보통 시끄러운 정도가 아닌 아이의 울음소리로 잠을 설쳐도,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이 행복했다.
그 아이는 이제 그의 인기척이 나면 문 뒤로 숨어 버리고, 다가가 끌어안아도 아이의 두 팔은 몸 옆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말을 들을 때는 커다란 거북이가 앉아서 멀뚱히 눈을 깜박이듯 나른함이 배어 있고, 대꾸할 때는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거나 물고기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는 듯했다. 늘 자세는 비스듬하고 손목에 얼굴을 기대는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유아용 침대에서 하루 종일 구르고 자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면 어느새 아이도 소리 없이 눈을 떴다. 그 빛나던 까만 눈동자를 기억한다. 아이는 버둥대며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고 까르르 거리며 웃었다.
애초에 잘못된 지점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분명히 있었다. 마치 블라우스 단추를 급히 채우다 잘못 끼워졌을 때처럼 말이다. 결국 단추 구멍 하나가 비고, 거울에 비춰보면 옷이 한쪽으로 찌그러져 아무리 애써도 바로잡을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황과도 같았다. 단추가 어긋난 블라우스처럼, 잘못된 시작점으로 돌아가 바로잡아야 했는데,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그것도 수차례 되풀이하거나 방치했다. 불길한 전조와 예감이 온몸을 관통하던 순간을 단 한 번이라도 포착해 현재의 상황을 되돌렸어야 했다. 어쩌면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에라도 멈췄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강한 자기 확신이 넘치던 젊음이었다. 그의 기대는 타인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자신에게는 충분히 성취 가능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한참을 지나갈 때도 그는 틀림없이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설령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결국엔 행운이 뒤를 받쳐줄 거라 믿었다.
그는 어릴 적, 이런 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죽은 듯 잠든 공주는 잘생긴 왕자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고, 신데렐라는 무도회에 제시간에 도착하며, 계모의 학대는 만천하에 드러나는 이야기. 전쟁으로 헤어졌던 남녀는 재결합하고, 칼싸움은 잘생긴 쪽이 이기며, 죽었던 연인은 환생하고, 저주는 풀려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는 이야기. 방해받던 사랑은 행복하게 끝나고, 불행했던 과거는 시간여행을 통해 치유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고난은 극복되고 신분은 상승하며 정의는 실현되고 터널 끝에는 빛이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은 미래가 이미 지나가 버린 듯, 좋은 날이 올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갈라지는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지치는 사람 같다. 얼음 아래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강물이 흐르지만 아직은 괜찮다며, 무릎을 굽히고 주먹을 쥔 채 양발에 힘을 주어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알람이 다시 울리자, 그는 습관처럼 품 넓은 후드티를 대충 걸치고 집을 나선다. 문 앞에 놓인 배달 박스는 발끝으로 슬쩍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가 떠난 어둠에 잠긴 원룸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유독 텅비어 커 보였다.
버스 안은 잠이 덜 깬 채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마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떠밀리듯 나선 이들이다. 필라멘트처럼 빛과 열기가 넘치는 젊은이부터 당장 살아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사람들까지. 셔틀버스는 침묵 속에서 출발하고, 잠들지 않은 몇몇은 슬퍼 보인다. 그 옆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빗방울 몇 개가 망설이듯 바람에 날려 창문에 부딪친다. 하늘은 흉한 회색 음영을 드러냈고, 나뭇가지들은 휘청거린다. 단풍잎은 한 장씩, 어쩌다 두세 장이 수선스럽게 떨어진다. 비로 생긴 작은 웅덩이에는 축 늘어진 단풍나무 잎사귀와 하늘 한 조각이 떠 있다. 젖은 타이어들이 노면을 스치고, 전조등 불빛에 아스팔트는 번들거린다. 동쪽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올 무렵, 버스는 회사에 다다른다. "오늘도 수고하십시오, 저기 뒤에 주무시는 분 일어나세요, 다 왔습니다." 버스 기사가 소리친다. 셔틀버스의 문이 열리자 바람에 올라탄 빗방울 몇 개가 들이닥친다. 그는 빗방울을 잡을 듯이 손바닥을 위로 내밀어 본다. 빗방울 몇 개가 손 위에 떨어진다. '오늘도 이런 하루가 되겠구나' 그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