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감과, 말이 나오지 않는 혀, 춤추지 않는 플로어의 이방인
하나의 꿈.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손을 집어넣었어. 아득한 동굴처럼 입을 벌린 그곳에서 뭔가 미끄러운 것이 날름거렸지. 잡으려고 하면 미끌미끌하여 이리저리 빠져나가 버렸어. 실랑이를 벌이다 간신히 물컹한 그것을 잡아당겼어.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았지. 방금 허물을 벗은 연분홍색 뱀 같기도 하고, 미끄덩한 붕장어 같기도 했어. 자세히 보니 좁쌀 같은 것이 도톨도톨 돋아있는 검붉은 놈이었어. 난 그 흉하고 끔찍한 그놈을 잘라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급히 손으로 베갯 속을 더듬거렸어. 숨겨놓았던 식칼이 잡혔어. 이때다 싶어 한 손으로 발버둥 치는 그놈의 끄트머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식칼을 힘껏 내리쳤지. 식칼은 점액질이 흐르는 그놈의 미끄덩한 살점을 철퍼덕거리며 가르고 들어갔어. 순간 통쾌했지. 그런데 미끄덩한 그놈은 잘리지가 않았어. 힘을 줄수록 그놈은 버둥거렸고, 그 힘이 손에서도 느껴졌어. 식칼은 물컹한 그놈 몸에 반쯤 걸려있고, 열개(裂開)된 그놈 몸에서 끈적한 점액질이 나와 식칼을 감쌌어. 그리곤 더 날름거리는 검붉은 놈으로 변했어. 더 센 놈이 된 거지.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쳤어. 근데 말이 안 나와. 나의 혀는 날름 대기만 할 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어.
드르륵드르륵, 휴대전화의 진동과 함께 알람이 울린다. 오전 5시 30분. 준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더듬더듬 손을 뻗어 화면을 쓸어내린다. 뒤숭숭한 꿈 때문인지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가득하다. 매일 밤 스스로 잠들기를 갈망하지만, 여전히 약에 의존한다. 의식이 돌아오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댕투성이 미지의 힘들이 엎치락뒤치락 뒤엉켜 살육을 벌인다. 그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전쟁터다.
그는 방 안을 서성이다가 붙박인 듯 창가에 선다. 새벽 유리창에는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 있다. 창 속의 그는 꽤나 닮은 이쪽의 그를 마주본다. 겉모습은 그리 젊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괴이한 존재로 취급받을 나이임이 분명하다. 눈은 더 이상 맑지 않고, 머릿결은 윤기 없이 푸석했으며, 피부는 탄력을 잃었다. 애석하게도 요즘 그의 눈에는 웬만한 사람들이 다 젊어 보인다. 아름다운 노래에 취해 플로어에서 춤이라도 추려한다면, 젊은이들은 하나둘 자리를 피할 것이다. 이제 그는 길모퉁이를 돌다가 어떤 사랑의 꿈이 펼쳐질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여인들이 더 이상 그에게 한눈을 팔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치명적이다. 자신이 볼품없는 수컷이 되었다는 증거다. 간혹 젊은 여자의 거만한 시선을 받으면 그의 노화는 햇빛을 쬔 뱀파이어처럼 급속도로 진행된다. 그녀들 앞을 스치듯 지날 때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은 가빠진다. 마치 그녀들의 시선이 등 뒤에 칼처럼 박히는 것만 같다.
창가로 더 다가서자 그의 모습은 뿌옇게 번진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그는 거울 속 자신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친애하는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으로 실현 불가능한 생각들, 이루어졌을 뻔한 일들, 체념한 꿈들, 원했으나 행하지 않은 것들, 충족되지 않은 그리움, 희망도 목적도 없는 생각들,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들까지, 너절한 감정의 잡동사니가 파고든다. 언젠가는 많은 것이 해결되리라 막연히 기대하며 시간에 기대보기도 했다. 하루는 희망을 품고, 어떤 날은 주저했다. 허둥대고 머뭇거리며 갈팡질팡하다 엉거주춤했던 날들을 지나, 그는 결국 희망을 놓았다.
희망을 품었다가 놓아버리는 그 간극 속에서, 그는 어지러운 단어들의 관계에 갇혀 있었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그가 어떤 종류의 고통도 겪지 않고 지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시간은 매정하게도 그를 짓이겨 납작하게 만들고, 그의 영혼을 이리저리 찢어발겨버렸다. 그는 시간에게 묻는다. "내가 너를 느끼기 전에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나?" 다시금, 내면 깊숙한 곳에서 피로감이 치밀어 오른다. 한때 평온함과 안정감을 주던 것들조차 결국 짙은 피로감으로 변해 다가온다. 마치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결국 검정이 되는 것처럼. 그는 좁은 방 안을 서성이다 침대 끝에 앉아 얼굴을 쓸어본다. 모든 사물이 무게중심을 잃고, 중력에 이끌려 바닥을 뚫고 광대한 빈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이야기였다. 단 한 권의 깊이 있는 책조차 읽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는 요구. 젊은 그들에게 살아온 인생을 죄다 끄집어내며 울고불고할 것까지는 없지만, 결국 스스로 감정에 취해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자신을 폄하하며, 이런 사적인 삶을 엿볼 기회를 주었다는 모멸감을 안고 처방전을 받는 경험. 그리고 약 타러 가는 순간에도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는 기분, 약을 타고나서도 다음번 약을 탈 때까지는 별일 없으리라 안심하는 씁쓸함까지. 마음을 고쳐먹기로 결심하고, 한참을 서슴서슴 망설이다 첫 예약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는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간단한 증상을 물었다. 증상을 말해야 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강박증상이 있다고 해야 할까, 혹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은 듯 외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빈 나무의 단풍 몇 잎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가르랑대느라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바람이 빠져 쭈그러진 공처럼 구석에 처박힌 상태라고 할까, 아니면 실오라기 하나로 간신히 매달린 단추처럼 달랑거리는 상태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힘껏 달리다가 거대한 유리벽에 부딪혀 정신이 멍한 상태라고 할까, 혹은 다리 많은 벌레가 몸이 뒤집힌 채 허공을 향해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지켜보고 있는 듯한 상태라고 말할까, 고민했다. 그는 상태가 어찌 되었건, 잘못 들어간 길 위의 그를 아는 길목까지 데려다주거나, 데려다줄 수 없으면 그곳을 지나는 다른 이에게 체면 불구하고 부탁이라도 할까 생각했었다.
그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이들은 분명 사적인 이야기에 관음적인 흥미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비참함에 이내 듣는 둥 마는 둥 지루해할 터였다. 그리고는 다른 이의 불행을 볼 때 반사적으로 느끼는, 측량할 수 없는 희미한 악의적인 기쁨과 자신은 그 불행을 비껴 나 있다는 묘한 안도감에 젖을 것이 분명했다. 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엉켜버린 인생이 '힘내'라는 위선을 던지는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삶의 용기를 선사하고, 적어도 자신은 저 정도는 아니라는 묘한 만족감을 안겨준다는 것을. 누군가의 존엄을 희생시켜 기쁨을 얻는 자들. 그 친구들은 슬픔을 약간 흉내 내며 위로랍시고 "딱하기도 하지, 끝이 좋아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됐다 그래, 누구의 인생도 끝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