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과 소수(素數), 그리고 두 종류의 비극에 대한 고찰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모순'이라는 단어는 흔히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수학 교사로 살아온 그에게는 '참과 거짓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먼저 다가왔다. 평생 숫자를 다뤄온 그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는 숫자였으며, 개개의 숫자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다고 믿었다. 소설가가 언어를 직조하여 세상의 풍경을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실제로 재구성하듯이, 그는 숫자 하나하나가 자연의 법칙이 응축되어 수로 발현된 형태라고 여겼다. 결국, 언어와 숫자는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고유한 두 방식이었다.
가령 0, 1, 2는 확연히 다른 얼굴을 지닌 숫자들이다. 0이 밑도 끝도 없는 허전함을 드리운다면, 1은 고독 속의 자유로움을, 2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느끼게 한다. 0의 허전함이란, 스스로 내세운 전제들을 안쪽으로 무너뜨리며 부정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함이다. 이를 설명하자니, 나방 한 마리가 떠오른다. 낮 동안 바위틈이나 나무 그늘에 숨어 잠들었다가, 저녁 어스름에 깨어 날개와 다리를 뒤척이며 땅바닥을 빙빙 맴돌다가 달을 길잡이 삼아 날아오르려 했건만,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이 등불에서 저 등불로, 또 다른 등불로 쉼 없이 길을 헤매다 비로소 올바른 길이라 확신한 듯, 탐스러운 눈송이처럼 가로등 불빛을 밤새도록 휘감아 돌다가 몸과 마음이 기진하여 어느 담벼락에 달라붙어 버린다. 그곳에서 마지막 숨결이 끊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머무르며, 자신이 잘못된 길에서 헤맸음을 이제야 깨닫지만, 날아갈 힘을 잃고 미세한 발톱으로 버티던 힘도 다하여 불어오는 바람에 몸은 땅에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휩싸이다가 먼지 쌓인 우중충한 구석 빼기로 보내지는 그런 나방. 0이 현실의 단단함에 무릎 꿇은 상태라면, 1은 그 단단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느낌이다. 마치 세상의 단단함을 온몸으로 시험하는, 앞뒤 잴 줄 모르는 아이가 떠오른다.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질주하고, 경사진 곳에서는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리며, 높은 곳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다. 세상과 부딪혀 발가락이 차이고, 손가락이 찧이며 무릎이 까진 아픔에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리지만, 귓가에서 격렬하게 고동치는 맥박 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시간을 머뭇거리며 저물어가는 여름날, 여전히 옆구리가 뻐근하도록 달리고, 텅 빈 운동장에서 홀로 공을 던지고 받는다. 연녹색 테니스 공은 파란 하늘 아래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세상은 그와 연녹색 공, 그리고 파란 하늘뿐이다. 비로소 자신이 한 명의 개별적 존재임을 느낀다. 1이 허술함 없이 야무진 느낌이라면, 2는 신비로운 아우라로 타인을 매료시키는 카리스마를 풍긴다. 2는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숫자로 나눌 수 없는 소수(素數)다. 마치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가 원자인 것처럼, 수를 이루는 기본수가 바로 소수다. 수의 근원적인 비밀을 간직한 만큼, 수학에서 소수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가문의 비밀을 간직한 체, 명문가에 태어난 자제쯤 된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그 비밀은 그를 고립시키는 벽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가 된다. 수수께끼 같은 소수의 비밀을 탐구하면서 아름다운 패턴과 새로운 질서가 모습을 드러낸다. 2가 특별한 이유는 가장 먼저 시작되는 소수이자 유일한 짝수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선구자적 기백과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비범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기에 쓸데없는 곳에 기웃거리지 않으며, 난감한 순간에도 기품을 잃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감당한다. 2와 마찬가지로 3, 5, 7, 11 등도 소수지만, 2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반면 나머지 소수들은 어딘가 뾰족한 느낌이다. 다른 소수들이 서로 간격을 두며 다가서기를 주저할 때도, 2는 고독해 보이는 3을 곁에서 세심히 보듬는 모습까지 갖췄다.
글은 계속된다:
7이 단발적 비극을 의미한다면, 8은 반복적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숫자다. 단발적 비극은 한순간의 결정이나 사건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운명론적 비극을 말한다. 플롯이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급격히 극단으로 치닫는 형태가 그렇다. 스탕달의 『적과 흑』주인공 줄리앙 소렐이 떠오른다. 그는 사회적 모순과 개인의 야망이 충돌하여 파국을 맞이하는 인물로, 자신이 처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감정을 속이며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쓰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잠시 사회적 성공과 진정한 사랑을 얻는 듯했지만, 그의 삶은 극단이고 충동적인 결과로 귀결된다. 이에 비해 반복적 비극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고 역사가 되풀이되는 비극을 의미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마지막 문장,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언젠가 다시 깨어나 병든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다시 출몰할 것"이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7의 단발성이 운명과 우연이 빚어낸 단 한 번의 섬광이라면, 8의 반복성은 수축과 이완이라는 지속적인 순환 운동에 가깝다. 수축과 이완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속박과 자유가 교차 반복되는 것이다. 속박은 교차점에 검질기게 달라붙는 점성의 기운이고, 자유는 멀어지며 끈적이는 인력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교차하는 순간, 준비할 틈도 없이 사건을 맞닥뜨리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결과를 모른 채 선택을 내리고, 삶은 여전히 상상의 영역 밖에서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자신은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 선택은 반복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 거라고 다짐했던 한 인간이 결국 그와 다를 바 없는 길을 가고, 그 길 위에서 마치 교통사고처럼 만난 그와 그녀가 꿈꾸는 길이 같은 길이기를 바라지만 그 길은 각자가 꿈꾸는 다른 길이고, 그 길은 반복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는 그런 길. 그것이 8이 담고 있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