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냉동창고, 그리고 페이지 밖에 멈춰 선 초고
그와 그녀가 꿈꾸는 길이 같은 길이기를 바라지만 그 길은 각자가 꿈꾸는 다른 길이고 그 길은 반복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는 그런 길...이라는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 보다가 시우는 뭐라 중얼거리고, 핸드폰을 닫는다. 이른 새벽, 조도를 낮춘 셔틀버스 안. 잠을 이기지 못해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손에 든 핸드폰 빛이 작은 섬처럼 드문드문 떠있다. 한편에서는 누군가 인스타 피드를 스크롤하며 게시물들을 훑는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흘러가는 이미지들 속에서 마음을 끄는 게시물 앞에 손가락이 멈칫한다. 약간의 진심을 담아 '좋아요'를 누른다. 이내 화면을 밀어 올리고 다른 앱에서 주문한 상품이 제대로 배송되었는지 확인한다.
건너편 좌석의 시우는 혹여 공모 기간을 놓칠까 하는 조바심에 다시 휴대폰 달력을 열었다가, 그날이 자신의 생일임을 깨닫는다. 주민 등록과는 달라 집에서만 챙기는 날이다. 나이를 헤아려본다. 벌써 옹근 마흔 살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지만 그 나이가 낯설긴 하다. 급하게 잘못 올라탄 차에 정신을 차려보니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한 기분이다. 지난 생일, 식탁 위에 케이크가 놓여있고 아내는 거실의 조명을 껐다. 식탁을 둘러싼 어둠 속에, 케이크 위의 노란 촛불이 스며든 바람에 너풀너풀 대고, 아내와 아이의 얼굴 위로 그림자들이 일렁였던 모습이 스쳐간다.
크고 차디찬 빗방울이 후드득 유리창에 부딪친다. 시우는 고개를 돌려 검은 차장을 바라본다. 미끄러지는 빗방울 위로 가로등 불빛과 흐릿한 얼굴이 겹친다. 그는 유리창에 멀뚱이 이마를 대고 몽롱하게 번진 자신의 모습과 물러서는 불빛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 언젠가 그의 꿈은 택시운전사였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꿈이었다. 차 안은 세상의 어수선함을 단절하는 공간이다. 늘상 그를 둘러싼 외부와 차단된 체 허공 속에 혼자 떠 있는 느낌이다. 도시는 비에 젖고, 지면에 반사된 불빛은 살아 움직이고, 늘어선 가로수는 전조등 불빛에 다가섰다 사라지고, 창문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초점을 잃어버린 불빛은 흔들린다. 빗방울은 투덕투덕 차를 때리지만 그의 몸에는 닿지 않고, 빗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이지만 소리는 삭제된다. 닿을 수 없는 빗방울과 삭제된 소리처럼, 그의 인생은 바람대로 실체에는 닿지 못하고 모호함 속에 몸을 맡겼다. 삶의 본질이 그에게 닿으려 할 때면, 그는 의도적으로 피해 갔다. 세상은 그의 바깥에 있었고, 그 자신마저 간혹 그의 바깥에 존재했다.
셔틀버스는 젖은 길을 달려간다. 빗물은 거리를 따라 흐르고, 띄엄띄엄 떨어진 가로등은 불빛을 보도에 흘린다. 작은 웅덩이에는 가로등 한 조각이 떠 있다. 나른한 소음, 바쁘게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 시큼한 쇠냄새, 드르렁거리는 엔진 소리가 그의 마음을 긁는다. 문득 귀가 먹먹해지고 한 가닥의 '삐' 소리가 들린다. 마치 물속에 가라앉아 피리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조금 전만 해도 그는 냉동창고에서 물건을 옮기고 진열작업을 했다. 일용직으로 근무한 지 서너 달째다. 때는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11월, 다가올 겨울은 온 세간이 들끓었던 바로 그 겨울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초현실적인 일들이 어김없이 현실이 되던, 국회에 낯선 그림자들이 서성이던 그 겨울 말이다.
그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그저 몸을 쓰는 일이었다. 회사는 출범한 지 십 년 남짓 만에 국내 1위 유통사로 성장했다. 매 분기 매출과 이익이 늘어나고 신규 사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미션인 '팡팡 없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 미션을 실현하기 위해 '번개 배송'을 한다. 수백만 개의 상품을 잠들기 전 주문하면 새벽에 받고,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받는다. 사람들은 모른다, 이 모든 편리함 뒤에 숨겨진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한낮에도 밤에도 같은 빛이 그곳에는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서는 순간,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삐-'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누군가 볼륨을 최대한 올린 듯하다. 냉각기, 집진기, 송풍기 소리부터 카트, 핸드 자키, 지게차가 내는 소음, 관리자들의 무전기, 마이크 소리, 테이프가 뜯겨 나가는 소리, 사방에서 바코드를 스캔하는 소리까지, 온갖 소리가 한데 엉켜 있다. 선반 진열장에 그저 '너무 많다'고밖에 형언할 수 없는 상품들, 회색빛의 구조물과 거대한 기계, 야단스러운 소음은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의 자신감을 꺾어버린다. 신경이 곤두선다. 이곳은 부서지기 쉬운 공간이다.
그곳의 소리는 대학 시절 그가 일했던 편의점과는 사뭇 달랐다. 손님이 들락거릴 때마다 울리던 차임벨, 가게 안을 배회하는 신발 소리, 냉장고에서 페트병이 빠져나가며 데구루루 미끄러지는 소리, 전자레인지의 경쾌한 작동음, 냉장고의 웅웅거리던 소리, 과자 봉지를 쥐는 소리, 계산대에서 삑삑 울리던 바코드 스캔 소리, 그리고 이 모든 소리들 사이로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소리는 단연 라디오였다. 편의점을 떠올리면 늘 심야 라디오가 생각났고, 심야 라디오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편의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야간 근무를 하던 그는 밤 10시부터 12시까지 '푸른 밤'을,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음악도시'를, 그리고 이후로는 '영화음악'을 들으며 밤을 보냈다. 세상이 잠든 시간,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는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청취자들은 옆에서 대화하듯 편안함을 느꼈고, 낮에는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도 밤에는 용기를 내어 털어놓곤 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 그는 멍하니 계산대 앞에 서서 인적 끊긴 길을 내다보거나, 폴폴 반짝이며 멀어지는 별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도 그는 소설 공모전에 응시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언젠가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는 망상에 젖어 있었다. 망상의 연원을 돌이켜보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동네 형과 누나의 이야기, 술래잡기하며 문 뒤에 숨어 자신이 문이 되어버렸던 순간, 하굣길에 주워온 돌 한 조각, 열두 살 때 읽었던 셜록 홈즈, 열여섯이 되던 해의 마이클 잭슨, 그 이듬해 영화 속의 주윤발과 장국영, 그리고 학창 시절 교과서 밑에 숨겨 보던 책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짐작컨데 중학교 2학년 무렵이던 1990년대 후반, 즉흥적으로 글을 쓰고서는 스스로 만족했던 적이 있다. 머릿속으로 글을 구상하고 종이에 옮겨 적던 처음의 순간, 문장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그때, 그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작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종이가 살짝살짝 들렸다. 보라색의 제비꽃 위로 얼쑹덜쑹 무늬 진 나비와 황금빛 날개를 가진 노랑나비가 꽃을 넘나들고 있었다. 꽃잎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잠시 멈춰 있다가 살짝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살포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묘사하고 싶어 나비의 양 날개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단어를 총동원하여 겨우 원고지 위에 첫 문장을 썼다. '나비는 나풀나풀 날아가 버렸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귀밑이 화끈거리고, 발가락은 간질간질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가 소설가의 꿈을 가지게 된 때는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즈음에 어떤 책을 읽고, 별다른 이유 없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쓰고 싶어"라고.그 책의 표지는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다. 머리와 가슴을 화면 밖으로 과감히 밀어내고, 기울어진 왼쪽 어깨 뒤로는 빨갛게 익은 꽈리와 쪼글쪼글해진 갈색 껍질이 보인다. 오른쪽 어깨의 선은 도드라진 턱뼈와 연결되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했지만 눈은 왼쪽을 바라본다. 붉은 눈동자는 불안한 듯 우울해 보이고, 갈색과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피부는 문지른 듯하고, 검은색 옷은 생채기를 내듯 긁어댔다. 소설은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고 시작된다. 그는 깊숙이 감동받고, 글이 가진 특별한 힘을 느끼며, 자신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그는 이런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인물들의 삶에 따라 슬픔과 환희를 느꼈다. 지금은, 표지 그림이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의 '열대'가 그려진 작품을 읽고 있다. 그림 속 연인은 우스꽝스럽게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려고 한다. 여자의 손은 남자를 끌어당기지만 여러 개의 눈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입속에는 또 하나의 입이 있고, 남자의 코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눈도 세로로 돌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의 집이 있다. 그림은 기성 예술의 규범과 관습을 무시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책의 표지가 이야기의 줄거리와 컨셉이 맞는다면 엇갈리는 사랑이야기쯤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