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00 AM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랑의 미분계수를 구하려는 남자에 대하여

by 김영


등장인물


부원장 (48세)

윤희 (32세)

주훈 (37세)

동윤 (39세)

연수 (34세)

어머니 (68세)

포장마차 주인 (40대 초반)

외국인 근로자 1,2,3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아저씨 1,2 ( 50대 초반)


S#1 집 안 (낮)


스무 평 남짓한 낡은 빌라. 볕이 좋은 한낮이지만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두운 실내. 침대옆 탁자에 충전기 꽂혀 있던 연수의 전화가 불빛을 발하며 진동한다. 액정엔 ‘어머니’. 침대 위의 이불 한 더미가 꾸물꾸물 움직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은 듯 모로 자던 연수가 힘겹게 일어난다. 머리카락은 앞으로 쏟아지고 얼굴은 과일좌판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져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차여 흠집이 생긴 몰골이다. 손을 허우적거려 핸드폰을 집는다.


S#2 연수 집 + 어머니 집 (낮)


연수 : (목이 잠긴 목소리로) 네...

어머니 : (다짜고짜)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어디 아픈 거냐?

연수 : (귀찮은 듯)... 아녜요!

어머니 : 근데, 여적 안 일어나고 뭐 해?

연수 : (당연한 듯) 어제 학원 일이 늦게 끝났어요.

어머니 : 늦게 끝나고 또 술 먹었겠지. (사이) 이제 보니 목소리에 술 냄새가 풀풀 난다. (울화통 나고) 그놈의 술 좀 작작 묵어.


[INS.]

어제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술을 들고 무기력하게 줄 서 있는 연수.


연수 : (듣는 둥 마는 둥, 한 손으로 코를 팽풀며) 알겠어요.

어머니 : (순간, 화가 나지만, 참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냐? 바빠도 굶지 말고 일해! 어미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연수 : (짜증 나듯)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어요.

어머니 : (식탁 위 보자기에 반찬 통 몇 개가 올려져 있고, 또 다른 반찬 통을 챙기며) 오늘 학원 가는 길에 집에 들러. 곰국이랑 새로 김치 담가 놓았으니 들러서 갖고 가. 곰국은 냉동실에 쟁여두면 오랫동안 먹을 거야.

연수 : (마지못해) 알겠어요.


연수는 잠이 부족한 듯 마저 눕는다. 누운 채, 친구들과 아이들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훑어본다. 잠시 후 일어나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바닥의 옷을 주섬주섬 줍는다. 입고 벗는 게 귀찮은 듯, 입으려 하지만 외투에 팔을 꿰지 못해 헛손질한다.


S#3. 연수 거실 (대낮)


둘러보는 연수의 시선 컷으로, 개수대에는 먹고 난 그릇이 한가득하고, 바닥엔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듯 잡동사니 가득하고 현관에는 신발들이 어지럽다. 거실로 들어온 볕 속에 먼지 입자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햇살이 연수의 종아리와 발목을 덮고 있다.


# 냉장고를 열고 무기력하게 서 있는 연수. 냉장실을 뒤지다가 유리 반찬통 하나를 꺼낸 후, 냉동실을 연다. 이리저리 살피다 까만 봉지를 꺼낸다. 꽉 묶인 매듭을 풀다가 풀리지 않자 옆구리께를, 북 하고 찢는다.

# 식탁모서리에 슬리퍼 신은 발가락이 부딪혀 너무 아픈 연수. 참고, 의자에 걸터앉아 한손으로 아픈 발가락을 꽉 잡고 한 손으로 식사. 꾸물꾸물 먹지만 먹는데 뜻이 없어 보인다. 뜻 없이 포털의 스크롤바를 상하좌우로 움직여 기사를 본다. 꼴 보기 싫은 대통령의 기사는 얼른 넘겨버린다. 어릴 때, 동물도감에 뱀이나 악어의 화보가 나왔을 때 빠르게 넘겼을 때와 같다. 날씨를 확인하고, 숏츠로 경기 하이라이트와 재미있는 영상을 보고, 퇴사하고 여행을 떠난 또래 인플루언서의 영상을 보고, 케이팝 걸그룹이 인천공항에 목격된 사진을 본다. 그러다 한곳에 집중한다. 논란에 휩싸인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이다. 수많은 기사와 악랄한 댓글이 넘쳤었다. 그녀가 속죄의 마음으로 뭐라도 할라치면 감성팔이라는 댓글로 도배되었고, 그 글에 수 천명이 좋아요,를 눌렀었다.


S#4. 빌라 앞 (한낮)


날씨가 추운데도 연수는 맨발에 뒷굽이 갈라진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현관문을 나선다. 양손에는 꽤 두툼한 쓰레기봉투 두 개가 들려 있다. 현관문에 붙은 전단지를 떼어내려 봉투를 바닥에 놓자마자, 구겨진 캔과 페트병이 와장창 쏟아진다. 다시 캔과 페트병을 주워 담고 전단지는 구겨 넣는다. 봉투는 곧 터질 듯하다.


# 쓰레기장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라이터가 계속 헛돈다.


S#5 빌라 주차장 (오후)


서둘러 출근하는 연수. 주차장에서 주머니를 골골샅샅이 뒤진다. 열쇠를 찾지 못해 자동차 보닛 위에 백팩을 올려놓고 가방 속을 헤집고 있다.


S#6 도시 일각 + 달리는 차 안 (오후)


나뭇가지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몇 개 남은 나뭇잎들은 위로 펄럭인다. 연수가 차창을 열자 유리창에 미끄러진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화난 듯 들어온다. 차 안과 몰래 내통한 바람은 연수의 머릿결을 한쪽으로 쓸어주고 눈두덩과 콧날을 스치고 간다. 간밤에 사라진 것만 같던 희망을 다시 품는 듯,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쩌구로 시작되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Sometimes I feel so happy 어떨 땐 기쁘고

Sometimes I feel so sad 또, 어떨 땐 슬프다


S#7 상가건물 엘리베이터 앞 (오후)


서로 거리를 두고 데면데면하고 서 있는 네 명의 사람. 입구를 등지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상단의 숫자를 올려다보는 연수. 정전기가 일어나 스타킹에 달라붙는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여자. 붙박이처럼 벽에 기대고 있는 사람. 별일 없다는 듯 괜히 핸드폰을 열고 빠르게 스킵하는 사람. 멀리서 뛰어오는 부원장. 다가서자 사우나의 스킨로션 향이 진동한다.


부원장 : (피식) 회의 있는 줄 모르고 늦장 피웠네.

연수 : (가만히 보며 작은 소리로) 부원장님이 모르시면 어떻게 해요?

부원장 : (당연하다는 듯) 종일 애들 가르치느라 힘든데, 염병할 원장이라는 작자는 수시로 멍청한 회의만 열어.


# 오 층에서 멈춰서는 숫자. 엘리베이터 문이 띵하고 열리자, 내리는 사람들.

# 엘리베이터에는 부원장과 연수만이 있다.


연수 : (미소 지으며) 겨울방학 프로그램 때문에 모이는 거 같던데요.

부원장 : 방학프로그램은 이미 광고로 나갔는데 또, 뭘 하겠다는 건지.. 메뚜기처럼 학원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봐서 아는데..(뜸을 들이다가) 학원 회의는 하나도 다를 게 없어. 안 그래?


# 칠 층에서 멈춰 서는 숫자. 둘 다 내린다


S#8 교무실


복사실에서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연수는 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고,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 앉는다. 책상의 잡동사니를 한쪽으로 치우고 노트북을 켠다.


# 맞은편의 동윤은 어제 과음한 듯 의자에 몸을 묻고 있다.

# 복사기를 붙들고 씨름 중인 주훈.

#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는 윤희.

# 계속 자판을 치고 있는 연수 곁으로 부원장이 슬쩍 의자를 끌어당겨 온다.


부원장 : (연수를 보며) 뭘 그리 열심히 해.

연수 : 아녜요.. (얼른 화면을 내리고 가만. 부원장을 본다)

부원장 : (희희낙락하며) 오늘 끝나고 종합반 회식이다!

연수 : (쳐다보고) 무슨 일인데요.

부원장 : 겨울방학 준비 때문인데, (나름 소리 죽여) 핑계 삼아 술 먹자는 거지. 빌어먹을 선생들이 어떻게 하면 애들을 더 들들 볶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회식.(피식)

연수 : (따라서 피식)


# 동윤이 체중을 옮겨 고쳐 앉는 소리. 동윤이 고개를 든다.

# 일어난 동윤,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벌떠벌 떠들어 댄다.


동윤 : (얼굴을 쓸어내며) 장소는요?

부원장 : 이제 일어나셨구먼. (원장실을 힐끔 보며) 원장 눈치 보면서 자. 자꾸 그러다가 잘리는 수 있다.

연수 : (부원장을 보며) ‘마냥집’ 이겠죠?

부원장 : 맞아. (동윤을 보며) 속 쓰리면 탕비실 가서 컵라면이나 먹든지..

동윤 : (속이 쓰린 듯 얼굴을 찌푸리며) 역시, 부원장님 밖에 없습니다!

부원장 : (동윤을 보며) 속이 쓰린 거야, 마음이 쓰린 거야. 회사는, 일 못하는 순으로 자르지 않는다, 거슬리면 자르는 곳이다.(사이) 아참, 은수 엄마한테 전화 왔던데. 바쁘지 않은 시간에 전화 달라고..

동윤 : (부원장을 보며) 혹시, 은수 엄마가 뭐 때문에 전화를 한 건지는 모르시죠?

부원장 : 뭐 때문이겠어? 학원에서 품행이 방정맞냐고? 사춘기이니까 잘 살펴달라고? 혹시 남자 놈 사귈까 봐?(흘러내리는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밀어 올리며) 뭐겠어? 당연히 성적이겠지!


# 다시 복사실에서 툭, 탁, 거리는 소리가 난다.


부원장 : (복사실을 보며) 어느 회사나 복사기가 말썽이야.

동윤 : (눈치 없게) 빠르고 고장 나지 않는 복사기로 바꾸면 안 되나..

부원장 : 말 참...(싸가지 없게 한다) 누구는 빠르고 고장 나지 않고 알아서 제본까지 해주는 복사기 쓰고 싶지 않냐? 겨울 방학 동안 애들 많이 모아, 그러면 내가 먼저 바꾸자고 할게. 동윤 (피하는 듯) 저는 이만 탕비실로 가겠습니다. 수업 끝나고(입맛을 다시며) 마냥집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뵙겠습니다.(너스레를 떤다)


S#9 수업 (밤)


# 연수는 수학 교재와 과제용 학습지와 태블릿 피시를 챙겨 강의실로 향한다.

# 복도에는 간식을 사러 겅중겅중 나가는 아이, 화장실로 털레털레 걸어 들어가는 아이, 그냥 좀이 쑤셔 복도에서 숙덕이는 아이들이 있다.

# 강의실로 들어서는 연수의 시점에 아이들의 절반은 이미 엎드려 자고 있다. 교탁에 물건을 내려놓고 교탁을 등지고 지우개로 칠판을 닦는다.


연수 : (둘러보며) 얘들아, 수업시작하자!


# 찌뿌둥한 얼굴로 겨우 일어나는 아이와 여전히 자는 아이.


연수 : (잠시 학생들을 뚫어져라 보며) 오늘은 새로운 정의, 아니 새로운 약속을 배울 거야.

그 약속만 잘 따르면 돼. 어릴 때부터 수의 체계를 배우고, 수식을 배우고, 방정식을 배우고, 함수를 배웠지?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 배울걸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만큼 중요해. (아이들을 둘러보며) 그건 바로 '미분'이란 거야. 미분을 말하기 전에 함수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 중학교 때 배운 함수가 뭘까?


[INT.]

연수는 첫 수업 시간에 "너희들은 인간의 느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니?"라고 묻곤 했다. 아이들은 느닷없는 질문에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우물쭈물하거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거나, '휙' 하고 날아온 질문에 낚이지 않으려 애썼다. 답변의 당사자가 자신이 아니길 바라며 시선을 피하는 아이들을 보며 연수는 말했다. "인간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느꼈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느꼈어. 인간의 느낌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짐작과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우쳐야 해." 이어서 그는 "우아한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질서와 패턴을 이해해야 해. 그 도구는 바로 수학이라는 언어야." 그리고 "여기서 수학은 인간의 감정이 배제된 가치중립적인 언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마치 몇 정거장을 지나면서 규칙적인 바퀴 소리와 다른 승객들의 조용한 잡담을 들으며 여행 중에 잠이 드는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학생 : (쭈뼛거리며, 눈치 보는) 수수.. 수요!

연수 : (웃음 짓고) 물론, 수와 관련은 있어. 근데 단정적으로 '수'라고 하는 것보다 수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수의 변화를 선으로 이은 거지. (잠시 생각하며) 중학교 때는 대응규칙을 통해 상호관계를 배웠을 거야.


잠시 주위를 보는 데 절반은 엎드려 자고 있다. 자는 아이 쪽으로 연수가 움직이자, 뺨 위쪽에 여드름이 몰려 있는 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 손톱을 물어뜯어 속살이 보이는 아이가 찌뿌둥한 얼굴을 든다. 연수는 여전히 엎드린 아이들과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크게 뜨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연수 : (애써 담담히) 좀 더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함수는 초기값과 몇 가지 변수를 알고 있으면 앞으로의 위치를 알 수 있어. 물리학에서는 이런 생각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해. 이 세계관이 맞는지 틀린 지는 나중에 따지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늘 말하려는 미분은 나눗셈의 일종이야. 흘러간 시간에 대한 어떤 변화량이야. 그 시간을 단숨에 압축하면 변화량도 압축이 되겠지. 이것을 순간 변화량이라고 해. 이 순간 변화량을 다시 이어 보면 다음 순간의 변화도 예측이 되겠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확장시켜 보면,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게 너무 많아. 우리의 마음도 변하고. 이 변화를 알려면 두 개의 변수만 알면 돼. (멋쩍기도 한 듯) 사랑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 마음과 그녀 마음의 변화만 알면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만약에 너희 마음의 현재 상태를 알고 싶다면, 시간에 따른 너희 마음의 변화를 알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