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 00 AM

마들렌 냄새와, 내가 되지 못한 단어들에 대하여

by 김영


키보드에서 손을 뗀 시우는 자신이 쓴 글을 훑어본다. 검지로 입술을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다. ‘평범한 사람의 그저 그런 하루가 과연 쓸 만한 이야기가 될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고민에 빠진다. 이야기의 쓸모는 있을 것 같은데, 어떤 하루를 기록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일상적인 하루와 특별한 하루 사이에서 망설인다. 권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하루가 낫다고 판단한 그는, 하루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잡을지, 그리고 그 시작을 남다르게 할 방법은 없을지 골똘히 생각한다.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의 얼굴빛이 변한다. '권태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일상을 흔드는 작은 사건을 만들어야 해.' 무언가를 결심한 그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는 글을 쓸 때 내면의 낯선 힘을 느낀다. 그 힘을 빌려 스쳐 가는 모든 순간과 기억들을 붙잡아 기록하고 싶었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시우는 프루스트가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 죽은 나는, 마들렌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방식으로,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라고 묘사했듯,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으로 유년 시절 콩브레 마을에서의 모든 추억이 떠올랐듯, 그도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는 그 순간이 곧 영원한 현재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현재란 시간이 문득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믿는 선형적인 시간관과는 구별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는 순간, 어린 시절 콩브레 마을에서의 행복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처럼 말이다. 이는 시간이 주관적인 경험이나 의식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들고 심지어 멈출 수도 있는 비선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예시가 된다.


그런데 문득, 시공간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과 공간은 분리할 수 없지 않은가? 시공간을 구부러뜨리는 힘이 바로 중력이라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친다. 시공간을 구부러뜨린다는 것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우주의 시공간이라는 '면' 위에 놓일 때 시공간이 왜곡되고, 주변의 물체는 그 곡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끌려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운동하는 물체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즉, 각자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각자가 운동하는 상황에서는 나의 현재가 누군가의 미래가 될 수 있고, 그 누군가의 미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과거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누군가의 과거는 다른 이의 현재이며, 그 현재는 또 다른 이의 미래가 된다. 나아가, 그 누군가의 미래가 나의 과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상대성 때문에 나의 현재는 과거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단순히 책장을 넘기듯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직선적 형태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연결된 순환형이 된다. 만약 순환형이 가능하다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도 가능하지 않을까?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시간이 선형성도, 비선형성도 아니라면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기억이 모래시계처럼 쌓이는 형태는 아닐까? 우연한 사건이 특정 시공간과 만나 '기억'이라는 관념의 모래를 쌓고, 그 모래는 어떨 때는 금빛으로, 어떨 때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때로는 아무것도 반짝이지 않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로 존재한다.


금빛 기억과 은빛 기억 사이, 사라진 수많은 기억들. 작고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머릿속에서 지워졌을까? 하지만 그런 작고 사소한 기억들은 언젠가 마들렌의 냄새와 촉감이 과거를 되살리듯, 무의식적인 감각 자극을 통해 문득 떠오를 것이다. 그 기억들은 누군가의 의지나 선택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듯 불쑥 우리를 찾아온다.


그 과정 속에서 그에게 다가온 파편들은 이러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옷깃을 여맨 옷핀이 살갗에 닿아 느껴지던 차가운 감촉, 신발을 벗고 들어간 잔디밭의 간지러움, 햇살 좋은 날 카페 테라스에서 얼굴과 팔을 간질이던 햇살의 온기, 엄마 무릎에 누워 귀 청소를 받을 때 뺨이 허벅지에 닿았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햇볕이 가득한 마당에서 엄마와 잡고 턴 이불의 출렁거림, 그녀와 함께 야간 조명 아래 오르내리며 돌던 회전목마를 탔던 순간,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물방울을 맺고 떨어지던 순간, 여름 방학 전날 끈적한 의자에 앉아 버스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던 순간, 가족이 억지 미소를 짓고 사진사는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쓴 채 카메라 뒤에서 번쩍이며 플래시를 터뜨리던 순간, 산책길 햇살이 그녀의 눈썹 위에 매달려 빛나던 순간, 여름날 마당에는 하얀 빨래가 펄럭이고 그 사이로 발랄하게 뛰어가는 다리만 보였던 순간,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 빨강 노랑 파랑의 물결이 들어간 구슬을 햇빛에 비추어 보던 순간, 눈을 뜬 아침 눈 덮인 세상은 고요하고 유리창에는 얼음꽃이 피어 손으로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렀던 순간, 하늘에는 함박눈이 날리고 그녀는 입을 벌리고 눈송이가 입안과 눈썹에 떨어졌던 순간, 자전거를 배운 후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듯한 순간, 풍선의 끈을 잡고 있던 손의 간지러움 그리고 달아나는 풍선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순간.


하지만 시우는 이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감각적 기억들을 글로 옮기는 일에 번번이 좌절했다. 그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과연!' 하고 독자가 무릎을 탁 치게 할 만큼 번뜩이는 글이기는커녕, 그가 끄적거린 글들은 누군가의 글을 흉내 낸 것이거나, 아니면 읽고 또 읽어 마침내 자신이 쓴 글처럼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단어들은 도드라져 눈에 거슬렸다.


작가들이 그러하듯, 그도 군더더기 없는 알찬 명사들, 다채롭고 생생한 형용사들, 풍미를 더하는 부사들, 당장이라도 행동에 돌입할 것 같은 동사들을 찾아 우왕좌왕 헤맸지만 수시로 길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일부가 될 단어에 진정으로 닿고 싶었다. 마치 두레박으로 물을 긷듯, 필요한 순간에 솟아나는 단어를 자유롭게 퍼 올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단어를 고르는 일은 흡사 체로 섬세하게 거르는 일과 같아, 꽤나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겨우 얻어낸 단어들도 그의 일부가 되기는커녕,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 단어는 그에게서 멀어지고, 그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갈증 속에 고뇌했다. 심지어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책을 한 번 읽고 그 모든 활자의 배치와 각 페이지의 미세한 얼룩까지 기억한다고 해도, 그가 전달하려는 내용의 근사치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떤 단어를 골라도 늘 어색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가령, '그녀 말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는 문장만 하더라도 앞뒤 단어와 문맥에 따라 표현 방식은 다양했다. '어렴풋이'라는 단어만 하더라도 '어슴푸레', '아슴푸레', '막연히', '오련히', '간곳없이', '아련히', '까마득히', '묘연히'와 같은 말로 대체할 수 있었다. 처음에 선택한 단어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각각의 단어들은 단순한 의미를 넘어 독자를 사로잡는 마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는 왠지 모를 인연에 이끌려 처음부터 친근한 구석이 있었고, 그 후에도 줄곧 인연이 이어지는 듯한 단어이다. 어느 날 우연히 또다시 만나도 금세 애정이 느껴지는 단어랄까. '어렴풋이'가 오래전부터 알았던 친구 같은 단어라면, '어슴푸레'나 '아슴푸레'는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 중 우연히 그날따라 눈에 들어오는 친구와 같다. 이 둘에 대해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많지만, 이상하게도 전부터 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둘 다 뚜렷하지 않고 희미함을 나타내지만, 묘하게도 둘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다. 마치 다각형에서 이웃한 꼭짓점의 거리 정도랄까. '아슴푸레'가 새벽의 희미함을 담고 있다면, '어슴푸레'는 해 질 녘의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아련히'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애틋한 감정을, '묘연히'는 행방이 분명하지 않아 답답함을, '막연히'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간곳없이'와 '까마득히'는 거리가 멀어 보고 듣는 것이 희미한 상태를, '오련히'는 윤곽이 약간만 드러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고심 끝에 하나의 단어를 골라도, 그 어렵게 선택한 새로운 단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잠시뿐이다. 그 단어가 너무 도드라져 다른 단어들이 배경으로 밀려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괜찮지만, 잘못 고른 단어 하나가 문장의 균형을 깨고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 옷장에서 치렁한 드레스에 무거운 목걸이를 걸고, 큰 모자를 눈썹까지 눌러쓰고, 커다란 하이힐에 발을 엉성하게 꿰어 넣은 채 어기적거리며 넘어질 듯 걸었던 때와 같다.


단어를 제대로 골랐더라도 재배열하는 순간 의미나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같은 조각이라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다프네처럼, 자신을 사랑해 쫓아오는 아폴론을 피해 도망치다 결국 월계수 나무로 변해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어도,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는커녕 그저 물리적으로 부딪히며 제각기 흩어지는 듯했다. 단어들은 서로에게 턱턱 걸렸고, 문장과 문장을 건널 때마다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덜 익은 사고는 사변적일 뿐 아니라 부자연스러웠다. 물론, 오랜 시간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고민하며 서성거린 흔적은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정확한 단어를 고르고, 단어들을 재배열하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쓰고 또 지우고, 겨우 몇 자 더 썼다가도 다시 지우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랬다 치더라도,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이 남다른 차원의 진지함을 더욱 강렬하게 건드리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감정을 부각해서는 안 되었다. 아련하고 섬세하며 함축적으로, 감정이 마르지 않으면서도 흠뻑 젖지는 않게, 그 모든 것을 유머를 잃지 않고 간결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민하지 못한 그의 머리 탓에 매혹적인 이야기, 깊이 있는 사고, 빛나는 묘사력은 그가 바라는 수준에 한참 못 미쳤다. 그가 생각하는 간결함조차, 그 간결함의 번득이는 칼날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잘라냈는지 모른다. 음성학적 재미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의 글은 내용은 구멍이 숭숭 뚫린 듯했고, 형식은 비 온 뒤의 땅처럼 어지러웠다. 읽다 보면 '에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글은 크고 작은 패배로 인한 고통을 지워주는 위로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면 자신을 잊고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처럼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음울한 '여기'는 미스터리한 '저기'로 연결되어 누군가의 삶을 엿보게 했고, '얼음 땡' 놀이처럼 흐르던 물이 얼음이 되어 멈춰버린 순간을 경험하게 했다.


그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소설의 내용과 형식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빈 공간이 있는 것과 같다. 온통 틈새투성이다. 채울 수 있는 공간은 무궁무진하다. 이야기의 빈틈을 풍부한 상상력과 세심한 표현력으로 채우고, 다양한 형태의 평범한 순간들을 가져와 자유롭게 변형하면 된다. 같은 소재로도 솜씨 좋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사건은 같더라도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풍요롭게 할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바꾸면 한정된 사슬을 끊고 보편적인 영속성을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제대로 된 글을 한번 써보겠다는 그는, 모든 것이 갖춰진 아름다운 글을 볼 때면 정체 모를 질투심이 솟아오르지만, 하찮은 글을 볼 때면 오히려 마음이 안온해진다. 간혹 스스로 만족할 만한 아름다운 글을 쓸 때면, 모든 힘듦이 잊히고 끈질기게 달라붙던 우울감마저 말끔히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잠시 비를 피하는 순간처럼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이자, 세상과 그를 잠시 차단하는 피안(彼岸)의 세계였다.


진정 글 한번 제대로 써보자는 그는, 별이 총총 떠 있는 하늘을 우러러보듯 순수한 소설에 대한 고귀한 희망보다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망을 더 크게 가지고 있다. 글로 인해 신뢰받지 못했던 이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성공해서는 자신이 남몰래 고생해서 쓴 작품조차 마치 대단한 노력 없이 나온 것처럼 태연히 행동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