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흙 위에 쌓인 목조관과, 아이의 몸 위로 포개진 아내의 그림자
노트북 옆 액자들에 시우의 시선이 닿는다. 주름진 갓을 쓴 스탠드의 차분한 불빛이 액자 속 사진들을 비추고 있었다. 갓 태어나 요람에서 잠든 아기의 모습부터 시작해, 아이의 배에 얼굴을 비비자 까르르 웃던 순간, 플라스틱 욕조에서 물장구치며 즐거워하던 아이의 모습까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듯 이어졌다. 아내와 아이가 서로의 입안에 과일 조각을 쏙 넣어주는 다정한 사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일종의 자부심과 관련 있는 듯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사오 년 전,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아이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세상에 겁먹지 않겠다는 듯 당차게 웃고 있다. 나른한 해 질 녘 오후였을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재택근무 중이었다. 지금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처음에는 집에서 일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했다. 그 '이상한 일' 때문에 현실감 없는 일들이 주변에 넘쳐났다. 그 이상한 현실을 처음 접한 건 TV 화면을 통해서였다. 뉴욕 외곽지역에 붉은 흙을 파놓은 긴 구덩이가 보였다. 그 옆으로 굴착기와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구덩이에는 목조 관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는 시신을 가득 채운 냉동트럭이 있었고, 앰뷸런스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활기 넘치던 카페는 텅 비고, 북적였던 거리는 쓸쓸한 침묵에 잠겼다. 방역 관계자는 수시로 나와,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질 거라고 경고했다. 사람들은 왜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없는지, 왜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어 낼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이 도시에도 상륙했다. 매일 바이러스 관련 뉴스로 넘쳐났다. 눈앞에 닥친 기이한 상황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날마다 환자가 늘어났고, 감염된 사람들의 동선이 추적당했다. 사람들의 이동은 제한되었고, 어딜 가든 체온을 측정해야 했다. 악수 대신 고개 숙여 인사했고, 서로에게서 두세 걸음 떨어져 섰다. 마스크는 사람들의 표정을 감추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등한시했던 가족의 얼굴을 비로소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날도 줌(Zoom)으로 비대면 수업을 앞두고 그는 아이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쪽창으로 백묵처럼 하얀 볕이 스며들고, 그 볕 사이사이로 금빛 먼지들이 유영하듯 날아다녔다. 벽에는 사물의 사진과 그 이름이 적힌 커다란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 앞에,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를 입고 색연필을 단단히 쥐고 있는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직 글자가 낯선 아이에게 그것들은 마치 금지된 세계의 비밀스러운 부호 같았다. 아이는 그 신비로운 부호를 해독하며 미지의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곧 세상의 일원이 되고, 인간 사회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서는 경이로운 과정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아이는 분명 많은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울 거다. 세상에 대항할 용기를 가지고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굳게 믿을 거다.
그때 그의 아내는 하얀 문을 열고 들어와 TV 앞에 앉았다. TV 화면 위로 고개를 비스듬히 둔 그녀의 뒷모습이 비친다. 그녀는 반쯤 뜨다 말아 아직 바늘이 꿰어진 스웨터를 아이의 가슴에 대 보고, 덜 감은 동그란 털실을 손에 쥔 채, 유별난 애착의 눈빛을 아이에게 보내고 있다. 들어 올린 아내의 양팔이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그림자가 아이의 몸 위에 포개졌다. 먹고사는 근심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순간, 그녀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녀를 만난 건 시내에서 한 발짝 떨어진 학원이었다. 겨우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녀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사회를 가르쳤고, 그는 국어를 가르치면서 틈틈이 글을 썼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그녀는 중고등학교 교사가, 그는 소설가가 되었을 터였다.
두 사람은 두 살 터울이었다. 그녀가 서른둘, 그는 서른이었다. 여자가 연상인 것은 그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무렵에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이 많아, 솔직히 나이 차이 따위를 일일이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나이 차이를 손가락 길이,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말버릇, 왼손잡이냐 오른손잡이냐, 신발 끈 묶는 방식의 차이처럼 사소하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학원은 학부모와 아이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해 돈을 버는 사업이었다. 그들은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단 1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다. 우리 어른들이 겪는 어려움을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와 같은 말로 초조함을 부추겼다. 마치 사회 계층 상승의 기회가 여전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을 경쟁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그가 만난 강사들은 겉으로는 영리해 보이지만, 학원이라는 울타리 밖에서는 사기당하기 십상인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좁은 새장 안에서만 잘난 척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학생들에게 "자기에게도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이 존재했음"을 들먹이며, 너희들의 젊음도 한때라고 질투 섞인 말을 하곤 했다. 언젠가는 너희들도 자신과 같은 굴레에 묶이는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오래 새장 안에 있던 새들은 문을 열어두어도 도망갈 생각을 않는다. 날갯짓하는 법을 까먹은 것이다. 혹여 누군가 그들을 새장에서 내동댕이치면, 그들은 한쪽 구석에서 가까스로 날갯짓하는 법을 기억하고서는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려고 주변에서 푸드덕거릴 것이다. 딱 그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강사들을 위선적이고 허세 가득한 존재로 여긴 반면, 그녀는 강사라는 직업이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이라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랬다. 남들 다 출근하고 점심을 먹을 무렵에야 겨우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퇴근했다. 간혹 잠에서 일찍 깨어나 세상이 소란스레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때면, 이불 속에서 자신만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아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 월급은 학생 수에 따라 고무줄처럼 들쭉날쭉했고, 명절 때는 보너스 대신 들고 다니기 불편한 과일 상자를 받았다. 퇴직금을 받기 위해서는 원장과 얼굴 붉히는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지만, 좋지 않은 소문은 옆 학원으로까지 퍼져나갔다.
그녀는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키가 작지도 크지도 않은 보통 체격이었다. 마치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어떤 사람들 틈에 놓아도 눈에 잘 띄지 않을 평범한 얼굴이었다. 숱이 많은 머리를 가운데 가르마로 나누어 뒤로 느슨하게 묶거나,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곤 했다. 그녀는 말아 올린 속눈썹을 깜박이거나 동그랗게 안으로 말린 파마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늘 변하는 패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디자인은 심플하고 장식은 최소화했으며, 경쾌함보다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스타일을 선호했다. 가령, 간절기부터 겨울까지는 다채로운 색감의 니트와 넉넉한 길이의 플리츠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패션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 영역, 이를테면 화제의 드라마, 연예인, 혹은 지인들의 뒷담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치 자신만의 관심 영역을 명확히 정해둔 듯했다. 타인의 사적인 부분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태도는 그녀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다만, 때로는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굳이 사과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미안해요"라고 말하거나,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일조차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느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며칠 있으면 생일이라고 먼저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이는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그날을 특별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비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그녀의 그런 모습들은 자유로운 생기는 없었으나, 안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어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꽉 막힌 듯 수동적으로 비칠지 몰라도, 그와 그녀가 관계를 편안하게 유지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고 있으면 이내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냈고, 그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그녀는 더 많이 웃고, 더 따뜻해 보였으며, 정신적으로도 온전한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그의 진지하고 침착한 면을 좋아했는데, 특히 목소리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다.낮고 안정적인 그의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호수 같았다.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그녀의 귀에 닿았고, 그가 말을 멈추면 주위의 소음조차 사라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과장하거나 꾸밈없는 그의 목소리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목소리에서 그의 진중함과 깊은 생각을 느꼈고, 그것이 그를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의 생활기록부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1) 침착하고 조용하다
(2) 사교성이 없다
(3) 학습 의욕은 없으나 독서를 좋아한다
기록만 놓고 보면 그는 그저 '고독하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그의 입장에서 학교 교육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적인 암기나 '이러저러한 것을 해라'는 식의 선생들 지시를 싫어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끌려 나가는 체육 수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아, 이제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학습 의욕이 없다는 건 그의 입장에선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다. 우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과서보다 다른 흥미로운 책들을 즐겨 읽었다. 다행히 성적은 좋게 말해 중상 정도였다. 사교성이 없다는 건, 또래 아이들 틈에서 자기만의 구석에 조용히 머물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였다. 달리 말하면 일찍부터 자아를 인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머리가 특별히 좋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작은 소동에도 허둥댈 때 그는 무심했다는 정도였다. 그의 무심함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 형이 밥을 안 먹었다며 소리치며 집에 들어와 엄마가 미처 상을 다 차리기도 전에 뒤에서 손을 뻗어 음식을 집어 먹을 때, 그는 그저 형의 모습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좋든 나쁘든 그는 그런 성격 덕분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어릴 적 긴 배차간격의 통학버스를 기다릴 때도 지루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목적 없는 공상을 하거나 운동화의 앞코로 마른 황토 위에 이름 모를 그림을 그렸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친구들과 다툼도 없었다. 정말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약간 자신이 없긴 하다. 다만, 타인과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되는 우열, 이를테면 점수나 순위를 다투는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효율성이 떨어지고 멀리 에둘러 가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꿈꾼 건 아닐까.
그녀는 그런 그를 무해한 남자라고 생각했고, 그의 본연의 모습보다 더 우월한 사람으로 대했다. 어딘지 외로운 날, 그녀는 그가 연인으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주 잠겼다. 다만,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에 대한 걱정은 있었으나 그녀 자신이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걱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햇살 좋은 긴 드라이브를 하고 볼록한 달이 뜬 저녁, 둘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달빛은 그녀의 머리에 촉촉한 빛을 드리웠고, 바람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그녀에게 함께하고 싶다고 서툴게 고백했다. 그의 서투름을 그녀는 정직과 신실함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와 나란히 앉아 멀찍이 떨어진 건물들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최상의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녀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승낙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은 그날 밤 부드러운 온기에서 서로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머리핀을 꽂아 두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흘러내린 것을 보았고,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의 팽팽함이 손끝에 전해졌고, 심장이 빠르고 격렬하게 뛰는 걸 손바닥으로 느꼈다. 그는 근원적인 해방감과 어른이 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집착하는 어머니라는 대지로부터 해방감이었고, 의존적인 아이에서 독립적인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예전에 부모가 못하게 하던 일을, 부모가 알면 펄쩍 뛸 일을 몰래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후,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숨길 수 없는 무언가가 바뀌었지만 좀 더 편안한 사이가 되기까지 몇 주가 더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