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무리와 손톱 반달에 맺힌 소실된 시간의 흔적에 대하여
그녀는 시우를 만나기 전, 이미 두 번의 이별을 겪었다. 첫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만난 두 번째 남자와는 3년의 연애와 1년의 동거, 도합 4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이별을 결심하고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그것은 울고불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오던 간헐적인 연락마저 완전히 끊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와 동거하는 동안, 하루하루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 깊은 행복을 느꼈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녀의 만족감은 커져갔는데, 그 대부분은 익숙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하루는 늘 같은 흐름으로 시작했다. 아침 6시, 반려견을 잠시 산책시키고 돌아오면 그가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갓 내린 커피 향과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식사 후 샤워를 마치고 지하철로 30분가량 이동해 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뽑아 들고 일을 시작했다. 점심은 주로 동료들과 구내식당에서 해결했고, 퇴근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청소기를 돌린 후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와 함께 식사를 마친 뒤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설거지를 했다. 저녁 8시쯤에는 그와 반려견과 함께 가벼운 산책을 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가끔은 서로의 손을 말없이 잡은 채 걷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는 유튜브 채널이나 웹툰을 보았고, 그녀는 책을 읽거나 다음 날 일을 준비했다. 평일 저녁은 그렇게 흘러갔고, 주말에는 굳이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거나, 가까운 공원에서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말의 산책은 평일의 산책과는 또 달랐다. 어딘가로 향하는 목표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는 목적도 없었다. 충분히 걷고 나면 어김없이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그는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는 얼음이 녹아 윗부분에 물의 투명한 층이 생기기 전에 빨대로 자잘한 얼음을 휘젓거나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었고, 커피잔이 비워지자 다시 함께 걸었다.
그녀는 이 모든 익숙함이 편안하고 좋았다. 감정의 파고가 없는 무미건조함의 연속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권태롭지 않은 권태'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은 더없이 평온하고 안정적이었고, 더 이상 세상과 불화하는 듯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모든 긍정적인 변화가 그로 인해 가능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흔들렸다.
"나랑 오래 사귄 거, 후회한 적 없어?"
그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망설임 끝에 그녀가 되물었다. "아니, 자기는 후회해?"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혼란스러움이 깊게 묻어났다. "후회라기보다는… 오래 사귀어 편안하지만, 설렘은 없어서." 그녀는 그의 속마음을 단숨에 읽었다. "다시 설레고 싶구나."
설렘을 좇는 남자와 익숙함을 지키려는 여자. 어느샌가 그들은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에게 설렘은, 그녀에게는 불안한 파도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익숙함은, 그에게는 숨 막히는 정체였다. 분명 그는 오래된 가구처럼 변함없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설렘을 찾아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마치 싫증 난 CD처럼 버려졌고, 그는 이따금 오래된 CD를 다시 꺼내보듯 간헐적으로 그녀에게 연락해 왔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 시우는 몇 명의 여자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만남은 매번 같은 지점에서 삐걱거렸고,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그녀들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실제로 사랑하기도 했지만, 헤어지고 나면 그는 늘 사랑에 서툰 초보자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가끔 동네를 걷다가 문득,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어쩌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갈 수도 있는 특별한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가 출판사를 그만두고 학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녀 또한 사무직으로 근무하다 같은 학원으로 이직하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가 잘 어울리고, 함께라면 적어도 불행할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상대가 자신을 통제하려 들 것이라는 의심도 없었고, 애초에 누군가를 오해하기 위해 상대방의 밑바닥까지 파고들 성향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 기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설렘과 익숙한 것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것이었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익숙함을 등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과거를 묻어버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다. 지난 경험은 현재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어른스러움은 사실 그녀의 가정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는 그녀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기억들이 있고, 묻어두고 싶은 과거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는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 한두 개쯤은 존재한다. 차라리 숙덕숙덕 가위질하여 오려내고 싶은 기억 말이다.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술만 마셨다 하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었다. 그런 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자는 척하거나 아버지를 피해 조붓한 골목길로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방 안에 있을 때면, 그녀는 골목길 불빛이 천장에 만든 달무리 같은 노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문 밑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뚫어져라 보며 귀를 세우거나,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집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낼 때면, 그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 아닐까 끊임없이 생각했다.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던 여러 가지가 이래저래 떠올랐다.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끼고 비비 꼬거나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면서 말이다. 살이 벗겨지고 피가 배어 나오면,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짜고 비릿한 따뜻함이 몸속으로 흘렀다. 너덜너덜한 손톱 가장자리를 보면서, 그녀는 간혹 자상했던 아버지의 면면을 떠올리며 정작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잘못이 없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며,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는 사랑을 받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여전히 아버지는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고, 지금은 아버지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 기준에 닿을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또래 아이에 비해 성숙해 보였던 것, 다시 말해 소녀의 삶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애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사랑받지 못한 결과였다. 자신의 미심쩍은 행위를 곁눈질하는 버릇, 그리고 자신 밖에 또 다른 자신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버릇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녀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존재가 비단 자신뿐 아니라 벽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틈도 없이 그녀를 가두는,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견고한 벽이었다.
아버지를 피해 밖에 있을 때는 달무리가 뜬 동네를 한참 돌다가 집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자신의 키보다 짤막한 그림자의 움직임을 바라보곤 했다. 그 움직임을 마치 다른 벽들이 둘러싸고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홀로 생각에 잠겨 이런저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이내 엄마가 찾아와 “아버지, 잔다, 들어가자”라고 했다. 헐렁한 소맷부리 밖으로 나온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으면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중, 고등학교시절은 그녀의 보호막이었던 엄마가 투병생활을 했다. 간혹,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과 찌릿하게 저려오는 느낌을 말하곤 했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갔던 병원은, 결국 더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어째서 사람들이 의사를 숭배하는지 알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을 잠재워 주길 간절히 기대했던 의사는 정밀검사를 위해 엄마를 병원 여기저기로 보냈다. 대기실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다는 생각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몰랐다. 마침내 의사의 표정을 보는 순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암은 소리 소문도 없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 있었다. 마치 나무줄기의 수줍은 꽃봉오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수술도 하고, 항암 치료하고, 방사선 치료를 했었다. 약봉지는 서랍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참을성 많던 엄마도 항암 치료과정은 많이 힘들어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엄마는 몇 분 만에 호흡곤란을 겪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했다. 그 이후에는 아프다면 진통제를 주고, 목이 마르다고 하면 수액을 놓아주고, 숨이 가빠지면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서서히 죽어가던 엄마는 임종실이라는 1인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동안 잠들었다가, 잠시 깨어나 멀뚱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누워있다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똑같은 몸이었지만 엄마의 몸은 온기를 잃어버린 체, 유리창을 지나쳐 온 평행사변형의 햇빛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밤마다 엄마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시 돌아오기를 꿈꿨다. 하지만 기적처럼 바라던 기사회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술이 잘될 거라고, 몇 주 뒤면 집에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을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엄마의 죽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존재하는지 어쩐지 확신할 수 없었던 신에게 기도했었다. 기도를 하고 나서 신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간 신을 소홀히 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며 수많은 서약을 하고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했었다. 기도의 간절함은 밤마다 점점 강해졌다. 한 번의 배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두 번의 배신을 불러오듯, 믿음은 더 큰 믿음을 낳았다. 그렇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은 지옥 자체였다. 지옥은 특정한 공간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소통할 수 없으면 그곳이 지옥이다. 숨을 쉬기도 힘들고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같이 버텨 왔었는데 그녀만 남겨진 거다. 배심감도 느꼈고 뭔가 단단히 어긋나 있다는 느낌과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엄마의 죽음을 부정했고, 그녀의 기도를 받아주지 않은 신에 대해 분노했고, 우울함과 무기력에 삶은 끈적였다. 끈적였다기보다는 체인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헛돌았다.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인간의 실존이란 게 별거 없었다. 하찮고 볼품없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었다.
엄마가 투병했던 몇 년 동안, 병동은 그녀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아픈 엄마를 돌봐야 하는 현실과 불안한 미래 사이에 끼어 있던 그녀는, 같은 병실 어른들에게 '애어른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늘 상상하는 습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학교생활은 정상적일 수 없었고, 친구관계는 더더욱 어려웠다. 이미 친한 친구들끼리 무리가 정해진 교실에서, 그녀는 혹시나 눈에 띌까 조용히 지냈다. 마치 수업 중에 화장실이 급한데도 아이들의 쏠리는 시선 때문에 참는 것과 같다. 언젠가 등굣길에 친구들이 그녀를 앞서 걸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인지 그들은 소리 내어 웃으며 서로 밀치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녀도 달려가 그들 앞에 "짜잔!"하고 외치며 나타나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혹시나 말이 끊기고 자신에게 어색한 눈길을 던질까 봐 천천히 걸으며 간격을 넓혔다. 설령, 누군가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면 어설프게 "어, 안녕" 하고 짤막하게 대꾸할 정도밖에 안 됐다. 어느 날 체육시간, 주번이던 친구와 교실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창턱에 걸터앉아 있었고, 친구도 슬그머니 올라와서 가까이에 앉았다. 둘은 다리를 흔들거렸다. 다리를 타고 시원한 기운이 올라왔다. 친구는 텅 빈 교실을 한두 번 두리번거리고 나서 말했다. “주번이라 땡볕의 운동장에 나가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는 일종의 제스처였다. 그녀는 “어, 그러네” 하며 급하게 미소 지었다. 둘은 운동장을 바라보다 다리를 흔들며 걸터앉은 창턱에서 내려왔다. 고함을 지르고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등의 장난을 한 후, 친구관계 비슷한 것으로 되었지만, 방과 후에 친구들이 학원을 갈 때 그녀는 또다시 병원에 갔다. 이런 식으로 학창 시절도, 친구들도, 엄마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대학은 기회균등특별전형으로 들어갔다. 한부모가족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위한 전형이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동해안으로 MT를 떠났다. 친구 몇몇과 함께 밤이 되자 유흥가의 댄스홀로 향했다. 시끌벅적한 댄스홀에 들어서자마자 2층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빨간 테이블 램프가 하얀 테이블보 주변을 몽환적인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요란하게 립스틱을 바르고 어설프게 아이섀도를 칠한 친구들과 그녀는 진홍색 플러시천 소파에 앉아 아래층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미러볼에서 쏟아져 내린 물방울무늬 조명은 플로어 중앙에 모자이크처럼 드리워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댄스 플로어는 마치 빙판처럼 반짝이며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술을 마시는 둥 마는 둥하다가 댄스 플로어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들은 기둥과 벽에 서서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끔 장난스럽게 팔을 꼬집었다. 그녀들은 서로의 얼굴 위를 얼룩덜룩하게 드리운 조명 그림자가 춤을 추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미소는 선명했고,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용기를 낸 친구가 플로어 중앙으로 자리를 잡자, 기둥과 벽의 주변에 머물던 친구들이 하나둘 중앙으로 옮겨 안심할 숫자에 이르렀다. 그녀도 용기를 내어 살짝 발을 중앙으로 향했다. 서로의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드러내는 조명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발을 내딛고, 손을 휘두르고, 고개를 흔들며 빙글빙글 돌았다. 이따금 분명 꿍꿍이속이 있는 남자들이 다가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던지는 농담에 그녀들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그들은 같이 춤을 추다가 자연스레 몸이 닿았다. 무릎이 부딪히고 발을 밟히기도 했지만, 그들은 생기가 넘쳤다. 무엇보다 그녀를 즐겁게 한 것은 밴드의 연주였다. 연주에 맞추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몸을 움직일 때, 그녀는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세상에 아버지를 모실 필요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늙어가는 모습에 동요가 있었긴 했다. 어느 날 가까운 거리를 걷는 아버지를 바라볼 때였다. 이상할 정도로 잔 걸음걸이를 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녀의 생각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평생 남편을 먼저 챙겨 온 어머니처럼 살기도 싫었고,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는 아이처럼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한 적도 없었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언젠가 자신의 미래 가족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해란, 가족의 일부가 됨으로써 겪게 될 불화와 불편함을 의미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요구나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강요받고 싶지 않았고, 그런 공기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랐고,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갖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집을 떠나 3년간 동거했다. 하지만 이별 후, 마음 한편에 빈 공백이 생겼다.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면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바로 그 무렵 이직한 학원에서 그녀를 사랑해 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이끌려 사랑에 빠졌지만, 사실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 있었더라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의 대상은 특정인이 아니라, 내면에 동요가 일고 빈자리가 생겨났을 때 마침 나타나 그 빈 곳을 채워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조금은 소극적이었다. 위험한 삶에 누군가를 끌어들일 순 없는 거라 생각했었다. 아이를 끌어들이는 방식도 무작위다. 자신이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 아이도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태어나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한 번 본적 없이 열 달 뒤에 서먹스레 만난다. 서로가 찾고 싶은 상대방인지 모른 채,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생으로 확 끌려간다.
그런데, 실은 이런 이유는 부수적이다. 그가 두려운 것은, 무엇 하나 강렬하지 않은 뜨뜻미지근함, 더덜뭇하여 맺고 끊는 맛이 없는 우유부단함, 주변을 맴도는 경향 내지는 차가운 본성, 이처럼 그의 유익하지 않은 어떤 부분도 아이에게 영향을 줄까 하는 점이었다. 자신 안에 있는 왠지 모를 억울함까지.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이의 양육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이제 더는 서로의 이름이 아닌 '엄마', '아빠'로 늘어진 입에 유동체의 이유식을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잠자리를 살펴주는 생각을 할 때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었다.
시우는 노트북을 끄고 서재를 나와 침실로 들어선다. 이불을 몸에 돌돌 만 채, 아내 옆에 찰싹 붙어 자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반은 자신의 모습을, 나머지 반은 그녀의 모습을 한 아이. 둘은 마치 아주 작은 틈이라도 생기는 걸 원하지 않은 듯 밀착해 있다. 여전히 탯줄 하나로 묶여 있는 듯하다. 그가 아무리 상상을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자신의 몸 안에 생명을 유지하는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을 직접 세상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과연 어떤 감각인지. 그는 뒤척이는 아이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살이 오른 작고 하얀 손, 완전무결한 손톱의 반달, 보드라운 머리칼. 그리고 아이가 숨을 쉬고, 이불 아래로 작은 가슴이 고르게 오르내리고, 몸속으로 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아이를 깨울 시간이지만 자는 아이의 온기와 체취를 느끼고 싶어 옆에 눕는다. 아이의 볼을 검지 손등으로 쓸어본다. 아이의 머리향이 좋다. 아이를 낳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그는, 지금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사랑에 푹 빠져 있다. 아이가 뒤척이자, 그는 나지막이 "사랑해"라고 속삭인다. 그 순간, 어떤 미래의 슬픔이 불현듯 느껴진다. 마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말이다. 80대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운명을 지닌 '벤자민 버튼'과 그 곁에서 시간을 함께 하는 '데이지'. 한때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로 만났던 두 사람이 이제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로 사랑을 나눈 뒤, 벤자민은 등지고 옷을 입는 그녀의 쭈글쭈글하고 검버섯 가득한 몸을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 어린 벤자민과 노년의 데이지가 손을 잡고 걷는 뒷모습, 그리고 요양원에서 그녀가 이제는 갓난아이가 된 그를 흔들의자에 안고 있는 모습이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