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LES ILES)
우선 이 책에 대해 희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단 얇습니다. 그리고 책 표지는 사람의 눈을 멈추게 만듭니다.
그리고 책의 첫 부분의 '카뮈' 추천사는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 다시 접에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내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던...'
이란 말처럼 나도 매혹적인 아름다운 글을 비밀스럽게 혼자만 읽겠다는 마음으로 급히 집에 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여기까지이다. 비밀스럽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글이지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보통 수필이라면 약간의 철학적인 사고가 들어간 일기 같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물안개 속에 어렴풋 하게 멀리 보이는 섬처럼 다가가기도 쉽지 않고, 다가간들 섬과 섬 사이에 모호함의 바다가 가로막아버린다. 장 그르니에 특유의 금욕적 문장과 비밀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불친절함이 이유일 수 있고, 인간의 유한성, 신비, 성스러움 등을 회의적이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말하는데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는 몽롱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단어와 문장이 긴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는 모든 대상을 어떤 비길 데 없는 것과 섬세함으로 암시되어 있다. 꿈결 같은 언어는 음악처럼 흐르고, 그 메아리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 좋을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 둔다.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상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의 여행,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였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이르게 되는 섬은 어디일까? 그가 찾아낸 비밀의 향기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간접적인 해답을 얻을 뿐이다. 매혹적인 글로 나를 미지의 섬으로 데려갈 뿐이다.
알베르 카뮈의 추천사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곧 그 어느 시대에나 한결같은데 거대한 테마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막힌 새로움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다, 햇빛, 얼굴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려지면서 여전히 그 매혹은 살아 날았으되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지는 것이었다. 요컨대 「섬』은 우리에게 환멸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인상적인 글
ㅡ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ㅡ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 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ㅡ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ㅡ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ㅡ 황혼 녁,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소진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내 불안을 달래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ㅡ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 '경박한'주제에 대해 '진지하게'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뎌 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해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별 볼일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최후를 기다리게 하는 인내의 놀이를 배우는 것은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ㅡ 고양이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유를 좋아할 뿐이다.
ㅡ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ㅡ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ㅡ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 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ㅡ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ㅡ그것은 불가능한 일ㅡ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주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ㅡ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2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분 사이로 나무들, 하는,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생각들의, 그의 마음의 무(無)가 현실이 되어 있음을 본 것이다.
ㅡ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하랴? 내게는 이미 '획득하는'일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 말의 힘을 당신은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 간다는 말이다.
마치며
이건 그냥 책이 아녀!!
이 책은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그 문장 자체의 의미와 느낌이다. 카뮈가 말한 왜 숨기듯 혼자 봐야 하는지, 왜 아쉬운 듯 꼭꼭 되짚어 봐야 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는 위대하고 거창한 소재보다는 일상적이고 가벼운 풍경들로부터 깨닫음을 찾아내는 뛰어난 작가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브로에의 섬들]에서 늘 삶에서 만족할 수 없는 인간과 그 인간이 꿈꾸는 희망의 공간이자 안식처로 섬을 그리고 있으며, 작가 자신의 섬은 인도의 어느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자기 곁, 자기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장 그르니에는 일상 속에서 경이를 발견한 사람이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라는 그르니에 말처럼. 문장과 문장에는 넓다란 바다가 있다. 오직 침묵만이 어떤 의미를 지닐 뿐 일체의 말은 거짓이거나 과장이 된다. 삶은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살다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최상도 최악도 모두 참아내야 한다. 최상과 최악을 참아내며 어느 날 문득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면서 침묵하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