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줄거리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인 종수(유아인)는 초등학교 동창인 해미(전종서)를 우연히 만나 술 한 잔을 한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갈 거라고 하면서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한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유하고 세련된 벤(스티븐 연)이라는 낯선 사람과 동행한다. 그 후 해미는 행방불명되고, 종수는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벤을 의심하여 벤을 죽이고 만다.
캐릭터
해미는 후암동 산동네에 살고, 종수는 대남방송이 들리는 파주에 살며 벤은 강남에 산다. 종수와 해미는 삶의 끄트머리로 몰려있고 벤은 강남의 빌라에 산다.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 비극이 생긴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다.
요리를 내 마음대로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창조주의 입장이다. 그리고 대상에 화장을 시켜주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소유물은 언제나 처분이 가능한 것들이다. 요리와 화장이 벤이 가지고 있는 내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전능감을 보여준다.
벤은 직접 요리를 주도적으로 하고 해미와의 관계도 주도적으로 리드한다. 그는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 노는 것으로, 일과 노는 것과의 경계가 없다. 그는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부유하지만 미래는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찾아오는 무력감에 두 달에 한 번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실제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지 안 태우는지는 알 수없지만, 그에게 두 달에 한 번 하는 그 일만이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해미는 외로움을 잘 느끼는, 여행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인간이다. 간혹 자신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저녁노을을 좋아한 해미는, 노을빛이 주황색이었다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가 그리고 보라색, 검은색으로 변할 때, 노을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은 인간이다.
종수는 주도적인 삶은커녕 청년실업에 대한 뉴스를 들으면서 살기 위해 요리를 해 먹는다. 우연하게 들어오는 빛과 다가오는 해미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도 없는 무력감을 가진 청년이다. 그런 종수는 소설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벤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인 것은 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종수)에게는 불공정하며 불공평하다. 종수와 같이 무력감을 느끼는 청춘들에게, 세상은 자신이 노력해서 바뀌는 세상도 아니고 경제성장이 멈쳐 노동으론 집을 살 수 없고, 계급과 신분이 고착된 세상이다. 이렇게 자신의 미래가 정해진 것이 현재의 종수이다. 이렇게 탈출구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몸부림으로 종수가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안하는 자위이다. 지속해서 등장한다.
메타포(metaphor)
1. 팬터마임
"나는 귤이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팬터마임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허구를 만드는 일의 은유이다. 이 이야기가 어딘가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먹은 채,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창작에 대한 코멘트이자 영화 버닝의 핵심이다. 즉, 영화는 허구로 만들어진 팬터마임이다. 관객들은 수많은 메타포 때문에 이야기의 진실은 알 수 없어도 나름의 진실된 감정ㅡ분노, 슬픔, 절망, 외로움ㅡ은 느낄 수 있다. 이것이 감독이 말하는 예술에 대한 태도이다. 어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전달되는 사람의 감정이다.
2. 고양이는 있다? 없다?
집주인은 고양이가 없다고 했지만 종수는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과 거짓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으로 해미의 고양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사고 실험으로 a와 b 중 정답은 하나이지만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동시 존재이다. 해미의 고양이는 존재한다고 했지만 보지를 못했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극 중 벤이 대마초를 피면서 "자연은 동시 존재하며 나는 반포에도 있고 파주에도 있다"라는 동시 존재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인식에 따라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물도 만찬 가지이다. 해미와 종수 어머니는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해미 어머니와 마을 이장은 우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존재와 비존재가 인식의 차이로 동시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소설가는 허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종수는 허구를 만드는 소설가를 희망한다. 개연성이 있는 허구를 만들려면 세밀한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만들어질 때 독자가 납득이 간다. 종수는 소설가를 희망하기에 하나하나 확인하기 위해 흔적을 찾아간다. 그러는 과정에 관객들은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종수는 허구를 만들어 내는 작가이므로 아닐 수도 있다. 해미의 고양이가 존재할 수도 존재 안 할 수도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처럼, 벤이 해미를 죽였을 지도 안 죽였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종수가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해미는 스스로 행방을 감추었을 수도 있다. 저녁노을과 같이 자기가 바라던 대로 새처럼 훌쩍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가능성은 다 열려있다. 벤의 살인 여부나 보이지 않는 고양이나 우물의 존재 여부를 믿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관객이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다. 영화의 관객들이 만들어진 이야기를 잊고 영화에 몰입하듯이 소설가가 되고 싶은 종수는 없는 것을 있다고 써야 하는 사람이다.
이창동 감독/인터뷰
영화 버닝은 현실과 비현실, 있는 것과 없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미스터리였다.
Q.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만들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건 아니고요. 밀양도 한국 단편 소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원작을 했고 이 영화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원작 소설(헛간을 태우다)이 가진 미스터리 한 부분을 통해 영화적으로 다른 미스터리로 확장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과 다른 부분이 있던데?
하루키의 소설과 같은 제목의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이라는 단편소설을 같이 이번 영화로 가져왔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서는 이 세상의 고통에 분노한 아버지가 그 분노로 남의 헛간을 태우는 예가 나와 있는데 그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옮겨가는 것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Q.'분노'라는 주제로 전달하고 싶던 메시지는?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이유로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와 국적과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분노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에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 분노가 뭔가에 대해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분노하는데... 그 분노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죠. 요즘 시대의 문제가, 요즘 세계의 문제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뭔지 모르게 분노의 대상이 분명했고 이유도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세련되고 편리해지는 것 같은데 자신은 미래가 없는 그런 감정에 놓여 있는 게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미스터리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Q. 해석할 여지가 많은 영화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코드, 경제적인 코드, 요즘 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예술 또는 문학, 영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이런 많은 코드들이 숨겨져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고 단순하게 영화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고 관객도 단순하게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단순한 영화적 방식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감독은 가슴속엔 분노가 들끓지만 분노할 대상이 분명치 않고, 양극화는 심해져 가지만 삶의 돌파구는 보이지 않으며, 일몰은 존재하지만 일출은 안갯속에 가려진 시대의 청춘의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 벤을 죽이는 것이 해미에 대한 복수이든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든 벤에 대한 부러움이든 우리가 그의 분노를 느끼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을 이해했다면, 감독은 이미 목적을 이룬 것이다. 나는 열린 결말이라는 것을 싫어한다. 많은 영화들이 열린 결말로 끝낸다. 시작은 창대하게 시작하나 작가가 감당을 하지 못해 열린 결말로 끝내는 영화를 많이 봤다. 그렇지만 버닝의 열린 결말은 닫힌 결말보다 훨씬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것 같다. 영화에서의 의문점과 미스터리의 불확실성, 결말의 모호함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술의 모호함과도 방향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