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슨은 물리적으로 피할 수도,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는 화학제품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의 도덕적 권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 중 하나가 "다른 인간이 뿌린 독극물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한 바 있다. 무지하고 탐욕스러우며 태만한 정부가 그 폐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독하고 생물학적으로 잠재적인 문제가 있는 화학물질의 무차별적 살포를 허용한 셈이었다. 대중이 항의하면 정부는 '절반의 진실이라는 안정제'를 선택해 책임을 회피하거나 피해 증거를 부인하곤 했다.
오만하게도 자연을 지배하려 한 전후 과학계 분위기는 이 문제의 철학적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부분이 존재하려면 결국 전체가 건강해야 한다. 인간이 몸담고 있는 환경 전체의 오염으로 식물, 동물, 인간의 세포 속에 유해 물질이 축적되고 유기체의 유전 구조가 변형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유독 성분을 무해하게 만드는 '자정능력'을 지니는 데다 유해 물질에 대한 '문턱'이 존재한다는 업계의 주장을 그녀는 단호 오게 거부했다.
인체를 생태학적으로 바라본 카슨의 시각은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고의 중요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의 건강뿐 아니라 환경 위험에 대한 이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침묵의 봄은 우리 몸도 예외가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화학 물질 오염은 죽음에 이르게만큼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 즉 스스로 조절되는 하나의 생명체로 소개한 이론이다. 그녀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다. 학자들은 지구온난화가 되돌릴 수 없는 특이점이 온다고 하고, UN은 지금처럼 자원을 소비하면 더 이상은 지구가 감당을 못해 앞으로 8년이 이대로 지내면 회복 불가능하다고 한다.
책 한 권이 자본주의 전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녀의 도전에서 과학과 정부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시민 환경운동이 시작되었다. 자연 파괴라는 문제에 과감히 의견을 표명했으며 모든 생명체의 권리에 관한 논쟁의 틀을 만들었다. 부유한 이들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카슨이 사망하고 6년 뒤 미국은 제1회 지구의 날을 제정했고, 의회는 인간이 저지르는 만행에 완충 구실을 할 환경보호국 설립이 담긴 환경법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여전히 이 책이 제기한 논란 속 세상에 살고 있으며, 공공선을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 또 환경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해결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다. 카슨은 전문가의 역할이 민주적으로 제한되어야 하고 기술의 위험에 관한 공청회를 허용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증거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과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해악의 확실한 증거를 부인에게 된다. 그녀는 지구의 화학 물질 오염을 대면하라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 탐욕을 조절하라고 주장했다.
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지구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의 물리적 형태와 특성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지구 탄생 이후 전체적인 시간을 고려할 때 그 반대 방향, 즉 생물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20세기에 들어서 오직 하나의 생물종,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환경오염에서 화학물질은 세상의 근원(생명의 본질마저)을 변화시키는 방사능의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동반자의 구실을 한다. 단지 몇 년이 아니라 수천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고 그 결과 적절한 균형 상태 도달한다. 이렇듯 시간은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 요소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충동적이고 부주의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신중한 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변화가 초래된다. 생명체가 화학 물질의 적응하려면 자연의 척도에 따라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그저 인간이 생각하는 몇 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몇 세대에 이르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설령 기적이 일어나 이런 물질에 쉽게 적응한다 해도 실험실에서 계속 새로 한 화학물질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올 것이므로 별 성과가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매년 500여 종의 화학 물질이 등장해 사용된다. 이 놀라운 수치가 암시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매년 5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의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아마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우리 왜곡된 균형감각에 놀랄 것이다. 지성을 가진 인간이 원치 않는 몇 종류의 곤충을 없애기 위해 자연환경 전부를 오염시키고 그 자신까지 질병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길을 선택한 이유를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저지른 일이다. 농산물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살충제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시 농업 시대의 곤충은 농부들에게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되고 대규모 농지에 단일 작물재배를 선호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특정 곤충에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단일 작물 경작은 자연의 기본 원칙이라기보다 기술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는데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특정 영역 내에서 생물에 대해 자연이 행사하는 내재적 견제와 균형 체계를 흐트러뜨리려 애쓰는 것이다. 자연의 견제로 각각의 생물들은 저마다 적합한 넓이의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일 작물을 재배할 경우(예를 들어 밀과 다른 작물을 섞어 키우는 대신 밀만 재배하는 경우)에는 다른 작물 때문에 널리 퍼져 나갈 수 없던 해충이 편하게 마련이다. 또한 합성 화학 살충제 산업의 급작스러운 부상과 놀랄 만한 확장이 문제의 원인이다. 이 산업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산물이다. 화학전에 사용할 약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몇 종류의 물질은 곤충에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발견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약제를 시험하는데 곤충류가 자주 사용된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합성 살충제가 끊임없이 등장했다. 구성 분자를 조작하거나 원자를 대체하거나 그 배열을 바꾸는 등 인위적 과정을 거치면서 전쟁에 사용되는 단순한 무기화합물 살충제와는 전혀 다른 살충제가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 곤충 방제산업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정말 효과적인 곤충 방제는 인간이 아닌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자연계에는 고유한 '환경 저항'이 존재해서 특정 종마다 개체 수가 일정하게 조절되는데, 이는 지상에 첫 생명체가 등장한 이후 계속 그래 왔다. 먹이, 기상과 기후조건, 경쟁 상대나 포씩 종 등이 모두 '환경 저항'의 중요한 요소이다. 곤충학자인 로봇 메트 카프는 '이 세상이 곤충으로 뒤덮이게 않게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곤충들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학약품은 인구의 친구든 적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든 곤충을 없애 버린다. '환경 저항'이 약해지면 종족을 재생산하는 폭발적인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이다.
봄은 온 생명이 노래하는 계절이다. 새들은 지저귀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깨어나는 계절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던 시대의 봄은 침묵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함으로써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무지와 탐욕, 안일함으로 인간을 파괴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환경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자연 생태계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이 환경 감수성은 생길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이 이런 감수성을 갖지는 않는다. 일단, 예민한 사람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의 반보다 중요하지 않다. 일단 느껴야 한다. 책임을 지는 것을 어른이라 한다면 내가 무엇을 책임지고 살까 하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경이와 겸손은 온전한 감정이고 파괴에 대한 욕망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다.
비슷한 내용의 나열과 수많은 화학제품의 나열로 후반에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이과생으로 과학에 대한 알 수 없는 신뢰가 주는 위험성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로 '커트 보니것'의『제5 도살장』과 『고양이 요람』이 생각났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열정만 가득할 뿐 도덕적 책임에는 관심 없는 과학자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연구에만 집중하는 순진(?)한 위험성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