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강타'

이름 석 자보다 다정했던 별명이 머물던 골목

by 영차보


H.O.T. 강타보다 먼저 강타가 된 우리 아빠,

그리고 다정한 쌍둥이 아저씨가 있던

관청리 골목의 옛날 이야기







[오늘을 널 떠날 거야. 이런 날 이해해-]


나도 한때 털장갑을 끼고 머리를 주먹 망치로 때리고 다녔던 8X년 생으로서, '강타'라는 단어에 자동 재생 BGM과 함께 강타 오빠를 떠올렸다면...


음, 반갑다. X세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강타'에 대한 것이다.

다만 그 강타가 아닐 뿐이다.





“강타야”

“네, 형님.”



팬픽의 한 장면같은 대화

주인공은 사실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는 강타다. 문학적 비유도 아니고, 신종 디스도 아니며, 마음의 목소리도 아니다. 아빠가 강타를 닮은 꽃중년이라 강타라고 불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우리 아빠는 명확하게 강타이며,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강타’라고 불린다.


재밌는 건, 가요계를 강타하겠다는 그 결심보다 우리 아빠의 '강타' 데뷔가 훨씬 빠르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나는 노란 풍선을 흔들던 젝스키스 팬이었으니, '강타' 이전의 '강타' 내미는 젝키팬이다. 라는 조금 괴상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시절 H.O.T 강타 오빠는 가요계를 강타하기 위해 '강타'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했던가. 그에 비하면 우리 아빠가 '강타'가 된 이유는 아이폰 뺨치게 직관적이다.



사십여 년 전 서울 토박이인 한 남자는 첫째 형님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라는 낯선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형님 밑에서 타일 기술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결혼을 하고 예쁘다고 하기는 조금 어려운 딸을 낳게 되었으며 온갖 고생과 역경 끝에 강화읍 관청리 한 골목에 자기만의 첫 가게를 갖게 된다. 그 가게에는 이러한 간판이 붙었다.


‘강화타이루’


그는 처음 타이루 차 사장님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옆옆 골목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첫째 형님도 역시 ‘타이루 가게 차사장’이었던 까닭에 ‘강화타이루가게 차사장’이 되었다.


이렇게 긴 호칭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 어떤 센스 있고 직관적인 이의 입에서 다시 태어났다.


'강(화) 타(이루) 차사장'


근데 그게 유행이 되었는지 강타 옆집 보경이발관 아저씨는 늙지 않는 소년처럼 보이 아저씨로 불리게 되었으며 수줍음이 많아 얼굴이 곧잘 빨개지는 삼원유리 아저씨는 웹소설 남주 이름 느낌이 풀풀 나는 삼유 아저씨로,


사십이 가까운 나이에 장가도 못 가서 골목에 걱정과 부러움(?)을 동시에 사던 서울 남자 서울책방 서책 삼촌이라는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오늘날 ‘생선(생일선물)’ 따위의 줄임말을 보면 그 시절 골목 어른들이 원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강타 골목 유니버스에서 이 규칙은 무섭게 단순하면서도 지독하게 일관적이었다.


대부분의 호칭은 가게 초성의 결합이었으며 남자는 뒤에 사장님, 혹은 아저씨 여자는 뒤에 사모님이나 아줌마를 붙이는 식이었다. 관청리 강타 골목의 규칙이었다

.


하지만 이 견고한 규칙을 깨는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유성페인트였다. 사람들은 그를 '유페'라고 부르는 대신 '쌍둥이 아빠'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저씨가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칭했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이름표를 고처 단 아저씨는 다정한 별명만큼이나 목소리가 크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특히 사람을 주변으로 모으는 재주가 있는 분이었는데 웬만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간혹 싸움이 생길라치면 특유의 그 커다란 웃음으로 넘어가는 매력이 있었다.


우리 골목 사람들은 모두 쌍둥이 아저씨와 그 집 식구들을 참 좋아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 집의 은화, 동화 쌍둥이 언니는 나와 잘 놀아 주었던 탓에 타이루 가게 방에 혼자 놀다가 지루한 날이면 페인트 가게로 향하곤 했다.


그렇게 페인트 가게 앞을 기웃거릴 때면 페인트 냄새가 진하게 났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페인트 통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가게 앞에는 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푸짐한 배를 내밀고 허허 웃으며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곤 했다. 나는 항상 아저씨가 산타클로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예쁜 공주님 언니 찾으러 왔나? 어? 조심해라 저기 뒤에 남자애들 쫓아온다.”



아저씨는 동네 모든 여자애를 공주님이라 불렀다.


나중에야 그게 아저씨식의 뻔한 인사였다는 걸 알았지만, 거울 속 내 모습보다 아저씨의 그 무차별적인 다정함을 더 믿고 싶었던 못난이 강타 딸내미는 그 말이 짐짓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 예쁘다, 늘씬하다 따위의 말을 가장 많이 해준 남자이자, 공주님이라고 불러준 유일한 남자는 바로 쌍둥이 아저씨였다.


이건 좀 슬프다.




쌍둥이 아빠 아저씨의 주변은 항상 유쾌했다.


다만 아저씨의 나이가 저쪽에서는 세 살이 어려졌다가 이쪽에서는 다섯 살이 많아진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쌍둥이 아저씨의 별명이 잠깐 ‘간첩’이 될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마저


"내래 임무를 마저 완성하고 오갔시오."


툭 하고 받아치는 그를 길게 미워할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몇 없는 이 중 쌍둥이 아줌마가 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유쾌하고 즐겁던 아저씨는 이상하게 아줌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은 유난히 자주 다투었고 싸움의 끝에는 아줌마가 집을 나가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쌍둥이 아줌마는 보이지 않은 지 여러 날이 지난 때였다. 동네 골목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아저씨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말린 망둥이를 구워 어른들이 소주를 나누어 마시던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골목을 돌아 들어오는데 초입 페인트 가게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쌍둥이 아저씨를 보았다. 곧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시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했다. 다시 아저씨를 힐끔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놀란 나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제야 아저씨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에 지우지 못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공주님, 밤에 어디가? “


아저씨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어른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특히 남자 어른이 우는 것은 티비에서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멍하니 있는 나를 보더니 곧 그 특유의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했다.


”우리 공주는 너무 예뻐서 누가 잡아가. 빨리 집에 가 “


그리고는 이내 검지 손가락 들어 올려 입에 댔다.


쉿.


아저씨를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 가게로 살금 들어갔다. 좀 놀랐고 많이 어리던 그날의 나는 비밀을 지키지 못했다. 가게 문을 닫고 들어가자마자 엄마한테 아저씨가 울고 있노라 털어놓았다.



”속이 속이겠어. 아휴.. 모진 여편네 어린애들 두고.. 참“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겠지' 하며 속을 곧잘 말로 내뱉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 어리지 않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알았을 것이다. 항상 즐거운 쌍둥이 아저씨의 결혼생활만은 그리 즐겁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 후에 쌍둥이 아줌마를 그 골목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아저씨는 음식도 잘했고 언니들도 아빠를 잘 도왔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의 손끝을 볼 때면 웃고 있어도 짐짓 쓸쓸해 보였다. 그 밤 눈물에 젖어 있던 얼굴도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가 종종 그리운 것은 서로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던 마음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사연을 다 알아도 입 밖으로 꺼내 놓는 일이 없었다.


주책맞은 아줌마가


"쌍둥이 엄마 어디 갔어요?"


물을 때면 그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니, 날씨가 왜 이렇게 추워. 들어가 들어가."


하며 이야기를 투명하게 만들곤 했다.



대신 소풍날이면 김밥을 몇 줄 더 말아서 건넸다. 김치통이나 장조림이 페인트 집 의자에 놓일 때도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같이 울어주고 등 두드려 주는 위로보다 반창고처럼 가만 덮어주는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이름 석 자에 얽힌 복잡한 사연은 내려놓고 ’강타‘와 ’보이‘와 ’쌍둥이 아빠‘로 불리며 그 순간만큼은 골목의 주인공으로 살았던 이들에겐 세상의 전부였던 곳. 결코 외롭지 않게 서로를 부르던 별명과 다정한 인사말이 참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 후로 아저씨는 참 열심히 사셨다. 쌍둥이 아저씨의 바지에는 늘 흰색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골목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매일 달라지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올해 초, 쌍둥이 아저씨의 부고를 받았다.


명절에 친정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아저씨와 인사를 했고 ”어휴 늘씬하고 예뻐서 배우 해야겠다.“라는 낡은 칭찬에 나보다 우리 아들이 더 크게 웃은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한평생을 쌍둥이 아저씨로 살았던 그의 장례식장에 적힌 이름 석 자는 너무 생경하고 어색했다.


사람들 사이에 얼큰하게 취해 농담을 건네는 그가 없다는 것만큼이나, 하얀 국화 아래 놓인 이름이 낯설어 그날 아저씨처럼 얼굴이 젖었다.


평생을 ’쌍둥이 아빠‘라는 다정한 별명에 얹힌 책임감을 당연하게 짊어지고 사셨던 분. 그 고단한 삶을 내려놓은 자리에 적힌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온기를 품고 서로에게 기대었던 골목의 시절은 이제 저물었지만, 만나는 이에게 웃음을 안겼던 아저씨의 마음은 선명하게 남아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는 가볍고 즐겁게 가장 당신다운 모습으로 머무르시길.



못난 예쁜이에게 웃음을 주었던 나의 영원한 쌍둥이 아저씨. 부디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