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첫사랑과 '야인시대' (1)

여러분,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유니콘 못 봤어요?

by 영차보



“나 <TV는 사랑을 싣고> 좋아했어. 성적표나 옛날 사진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특히 유니콘 타고 찾는 사람들 보러 가는 거... 진짜 감동적이지 않아?”

“여보, 그 유니콘, 혹시 <체험 삶의 현장>에 나오는 거 아냐?”


얼마 전 남편과 ‘라떼’ 시절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기억이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나는 아주 오랫동안 <TV는 사랑을 싣고> 출연자들이 유니콘을 타고 재회하러 간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다시 검색해 보니 하얀 유니콘(사실은 페가수스라고 한다)은 정말 ‘체험 삶의 현장’ 연예인들이 일당을 넣으러 올라갈 때 타는 거였다.


맙소사.


비록 유니콘이 없었다고 해도 ‘TV는 사랑을 싣고’에 대한 내 사랑은 꽤 진심이었다. 특히 나는 어릴 때 방송을 보며 커서 유명해지면 누굴 찾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는데, 생각의 끝에는 항상 몽실몽실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나보다 한 뼘은 작은 키, 조막만 한 얼굴을 반이나 덮던 커다란 안경을 쓴 강찬이었다.


당시 나는 매일 골목을 휘저으며 남자애들의 등짝을 후려치던 이름난 기 센 아이였다. 찬이는 나보다 두어 살은 어릴 것이라 믿어버릴 정도로 키가 작았다.


심지어 나는 빠른 생일이라 엄연히 말하자면 오빠였음에도 한동안 나를 ‘누나’라고 불렀을 정도로 녀석은 순하고 맹한 구석이 있었다.


찬이는 고분고분해서 퍽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소꿉놀이만 하면 꼭 강아지 역할을 맡겠다고 우겼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자기 별명이 ‘강아지’라는 거였다. 강 씨면 강아지, 전 씨면 전봇대라 부르던 맥락 없는 시절이었다. 나의 별명은 차 씨라 차차차였다.


그 무렵 동네에는 갑자기 학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태권도 학원을 원했지만, 아버지가 태권도는 절대 안 된다고 펄펄 뛰었다. 이미 골목을 휘어잡는 ‘기. 존. 쎄’ 딸내미가 태권도까지 배워 동네 아이들을 걷어차고 다닐까 봐 걱정하셨던 게 분명하다.


결국 나는 “피아노를 치면 차분하고 얌전해져요.”라는 원장님의 거짓말에 속은 엄마 덕분에 피아노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억지로 끌려간 피아노학원에 찬이가 있었다.


내가 바이엘 첫 장 펴고 피아노를 마치 타악기처럼 두드리고 있을 때 옆 방 찬이는 ‘등대지기’를 쳤다. 녀석의 피아노 소리는 제법 아름다웠다.


우리는 피아노학원 악보 공부방에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찬이는 높은 음자리표를 그리지 못해 쩔쩔매는 나를 도와주곤 했다. 찬이 손에서 예쁘게 피어나는 음표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다.

학원이 끝나면 늘 함께였다.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연습이 늦어져도 찬이는 어김없이 날 기다리곤 했다. 그날도 찬이와 같이 집에 가는 길이었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찬이가 소곤소곤 말을 건넸다.

“너 그거 알아? 빨간 마스크 이야기. 하얀 마스크를 쓴 여자가 돌아다닌대. 그러다가 아이들을 만나면 말을 건대. 그때 혈액형을 물어보는데 A형이라고 하면 입을 조금 찢고, B형이면 볼까지 찢고, O형이면 입을 귀까지 찢어버린대!”


“... 그게 뭐야... 그럼 혈액형을 모른다고 하면? 대답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찬이가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 그럼 입을 뒤통수까지 찢어.”


무서울 게 없는 골목대장이었지만 입을 찢어버린다는 신선하고 기괴한 서사는 순식간에 나를 압도했다. 나는 O형이었다. 그날따라 인적 없는 골목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겁에 질려 어깨가 덜덜 떨렸다.


“내가 지켜줄게. 우리 아빠가 남자는 여자를 지켜줘야 한대”


그 순간 찬이가 단단한 도토리처럼 보였다. 작지만 아주 여문 도토리, 그게 생각보다 무척 든든했다. 찬이가 내 손을 잡으며 덧붙였다.


“만약에 빨간 마스크 만나면 A형이라고 거짓말해. 아니면... 내 입 찢을 때 넌 얼른 도망가”


한주먹 거리라고 생각했던 찬이가 다르게 보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녀석의 손은 생각보다 뜨겁고 단단했다.


참고로 남편이 기억하는 빨간 마스크는 나보다 훨씬 ‘외모지상주의’적인 귀신이었다. 마스크를 벗으며 “나 예쁘니?”라고 묻고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잡아먹는 식이었다나.


<TV는 사랑과 체험, 삶의 현장을 싣고> 따위의 방송을 만들어내는 나의 허술한 기억력을 생각하면 남편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당시 나는 O형에 제일 불리한 그 조악한 서사가 무엇보다 제일 무서웠다.

빨간 마스크로 시작하여 홍콩 할매, 강시 등 험한 것이 가득하던 시절, 키가 한 뼘이나 작고 맹하던 녀석이 가끔 무척 든든했다.


서늘한 공포와는 별개로 나의 피아노 분투기는 계속되었다. 학원 벽에는 지휘봉이 걸려있었다. 그 시절 금쪽이들을 휘어잡는 ‘안’ 사랑의 매였다.

피아노 원장님은 지휘봉으로 손등을 자주 내려쳤다. 이유보다 원장님의 기분에 따라 매를 들었다. 그날도 원장님이 유독 저기압이었다.


나는 그날 정말 많이 맞았다. 인사를 대충 했다고 한 대, 피아노에 손을 올리는데 한 대, 건반을 누르는데 또 한 대. 연습 소리가 안 들린다고 한 대.


지휘봉이 셀 수 없이 내려쳐 손등이 복숭아처럼 빨갛게 부어오를 즈음,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손등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엉엉 울어버리는 대신 아빠가 자주 하시는 말을 떠올렸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마라”


나는 크게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일부러 씩씩거리며 피아노를 탁 닫은 후 가방에 책과 악보를 던져 넣었다. 그대로 책가방을 들고 학원 복도를 가로질렀다. 원장님이 내 뒤통수에 소리를 질렀지만, 못 들은 척하고 문을 쾅 닫고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발을 옮겼다.

하늘이 시리도록 파랬다.


문득 집으로 향하던 걸음이 멈췄다. 억울했다. 이대로면 엄마 손에 이끌려 다시 이 지옥 같은 학원으로 돌아오게 될 게 뻔했다. 완벽한 끝이 필요했다.


결심을 굳히고 학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저만치 찬이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못 본 척하고 다시 학원 앞에 섰다. 하얀 시트지가 붙어있는 유리 벽 아래로 화분이 대여섯 개가 줄지어 있었다.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그 화분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흙이 담긴 큰 화분은 묵직한 소리를 내고 고꾸라졌다. 발차기로 쓰러지지 않는 무거운 화분은 손으로 몽땅 밀어 버리고 쏟아진 흙더미를 짓밟았다.

얼마간 신나게 ‘깽판’을 친 나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 찬이가 있었다. 안경 너머 녀석의 얼굴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피아노 학원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꺽꺽거리며 우는 찬이의 손을 낚아채고 무작정 달렸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손을 들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 하지만 부어오른 딸내미의 손등을 살펴보던 아빠는 “잘했다.”며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역시 금쪽이는 금쪽이 아빠에게서 나온다.


물론 아빠는 학원 화분 테러 사건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훗날 결혼 허락을 받으러 남자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온 날이었다.


“자네 얘가 얼마나 독한지 아나? 학원에서 좀 맞았다고 그 학원을 다 뒤집고(아님) 깨부수고(아님) 온 애야. 허허허”


술이 한 잔 들어간 아빠는 그에게 농담인지 위협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졸지에 열 살에 학원을 뒤집고 깨부수었다는 예비 신부의 무용담을 들은 예비 신랑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변명하려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전 남친, 아니 현 남편은 얼빠진 얼굴로 내 눈을 열심히 피하고 있었다.


물론 아빠의 말에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 시절 나는 망나니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우리 부모님은 순둥이 찬이를 참 예뻐하셨다. 우리는 친구보다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되어갔다. 학교가 끝나면 ‘강타’에 달린 가게방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도 찬이는 강아지 역할을 원했다.


맞벌이하는 찬이 부모님이 늦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우리 집 밥상에 찬이 숟가락이 올랐다. 그날도 찬이는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다.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가 상에 올라왔고 엄마는 두툼한 등살을 발라 녀석의 밥 위에 얹어주려던 참이었다. 밥 위에 고등어살을 본 찬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전 삼대독자라 배받이살만 먹어요.”


“아.. 그, 그러니? 우리 찬이 삼대독자였구나.”


“네, 저 삼대독자예요. 그래서 제사 잘 지내는 여자랑 결혼해야 한대요.”


열 살짜리 입에서 나온, 유교가 덕지덕지 묻은 말에 엄마는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찬이의 얼굴에 갓을 쓴 선비의 단호함이 스쳤다. 엄마는 뒤에서 혀를 쯧쯧 찼지만 나는 단호한 찬이가, 삼대독자 찬이가 좀 다르게 보였다.


그날 이후 난 관심도 없던 제사상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그까짓 거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하는 내가 괜히 수줍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잘 지냈다. 여전히 나는 가끔 찬이를 울렸지만, 녀석은 이내 눈물을 닦고 다시 내 뒤를 쫓아다녔다. 그 무렵 내 자물쇠가 달린 핑크색 일기장에는 찬이와 같은 성을 붙인 아들과 딸 이름을 지어보곤 했다. 강유진과 강재진이 좋았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어느 추운 날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강타 가겟방 장판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엄마와 동네 아줌마의 수다 소리가 깔리던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빨간 지붕 집의 부부싸움이나 목욕 바구니를 홀랑 도둑맞은 시시콜콜한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그때였다. 익숙한 문장이 내 귀에 박혔다.


“저 뒤에 빌라 일층 살던 집 알아요? 이 집 딸내미랑 맨날 붙어 다니던...”


“찬이네요? 왜요?”


“거기 글쎄 야반도주했다나 봐요. 아빠가 부도내고, 야밤에 싹 튀어버렸다나 봐.”


아줌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났다.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찬이네 집으로 뛰어갔다. 칼바람이 살을 파고들어도 추운 줄 몰랐다. 아줌마의 말대로 찬이네 집은 비어 있었다.

찬이네 가족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아버지가 부도를 냈고, 빚 독촉을 피해 밤새 짐을 싸서 떠났다는, 서울로 갔다는 이야기가 동네를 돌았다. 아직 휴대폰은 물론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었다. 주소를 남기지 않는 이사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래요. 말 한마디 없이...”


“다시 강화엔 발도 못 붙인다고 봐야지. 여기저기 손해를 많이 끼친 모양이야.”


부모님의 대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나는 솜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둡고 무거운 이불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귀여운 동생이자 도토리 같은 친구, 꼬리를 흔들며 나를 따르는 강아지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에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해 버린, 강유진과 강재진의 아버지가 될 뻔한 소년,


몽실몽실한 자리가 한순간에 뻥 뚫려버린 기분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찬이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 속에 녀석의 얼굴조차 흐릿해질 무렵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유니콘을 타고 날아오르는 환상적인 만남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설렜다.



우리는 스무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