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첫사랑과 '야인시대' (2)

10년 만에 만난 첫사랑과 요구르트 소주 마셔봤어요?

by 영차보



스무 살이었다.


그 무렵 우리는 싸이월드라는 파도를 타고 서로의 안부를 훔쳐보던 시절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는 마법 같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미니홈피에 접속하자 익숙한 멜로디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지누션의 ‘전화번호’ 미니홈피 BGM이었다. 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무심하게 마우스를 굴렸다. 새로 올라온 댓글이 있었다.


어설프게 각도를 잡은 내 셀카에 달린 댓글, 그 댓글을 쓴 이름은 강찬이었다. 그 세 글자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바르게 세워 앉았다.


[강찬이: 안녕. 잘 지내? 나 기억할까? 예뻐졌다.]


심장이 노래의 랩 가사보다 더 빠르게 쿵쾅거렸다. 마우스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강찬이. 나의 도토리.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졌던 내 어린 날의 몽실몽실함이, 모니터 속 픽셀로 다시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이름을 클릭해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찬이의 홈피에 접속하는 찰나 수만 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커다란 안경은 그대로일까. 어디에 살고 있을까.


벌써 10년 전이었다.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린 첫사랑. 우리 강재진 강유진의 아버지. 순하고 맹했던 삼대독자를 다시 만나려면 유니콘(페가수스) 정도는 타야 할 줄 알았는데, 그 녀석은 무심하게도 싸이월드 파도를 타고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아쉽게도 녀석의 홈피는 비어 있었다. 주인이 돌보지 않는 듯 텅 빈 미니룸에 외로운 미니미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쪽지 쓰기 버튼을 눌렀다. 너무 달려들지 않으면서도 상냥해 보이고 싶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약간 비치고 싶었다.


음... 찬이? 강찬이? 맞아? 그 배받이살?ㅋㅋㅋ 우와. 진짜 오랜만이다. 누군지 한참 생각했잖아. 잘 지냈어?


역시 강찬이는 강아지였다. 쪽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녀석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답장을 보냈다.


그래, 나 맞아. 강찬이. 잘 지냈지? 인사도 못하고 이사 와서 한 번도 잊지 않았어. 진짜 내내 보고 싶었어. 어디 살아? 대학은 갔어?


한 번도 잊지 않았다는 문장이 가슴에 쿡 박혔다. 십 년 전 강찬이의 뜨거운 손의 느낌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묵직하게 그리워졌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떨리는 손으로 찬이의 번호를 눌러 신호음 끝에 들릴 녀석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내 뒤를 졸졸 따르던 동생도 강아지도 아니었다. 저음에 깊은 목소리.


하지만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천천히 내뱉는 특유의 말투는 여전했다 낯선 목소리에 묘하게 겹치는 녀석의 말버릇에 십 년의 어색함은 새봄에 눈처럼 녹았다.


우리는 당장 만날 약속을 잡았다. 약속 3시간 전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원피스에 초록색 볼레로를 입었다. 파우더는 좀 더 꾹꾹 눌러서 발랐다. 나가기 전 손목에 쁘띠마망을 뿌렸다.


약속 장소는 노량진이었다. 안주 세 개에 구천구백 원. 소야가 유독 맛있던 인디언호프였다.


시끌시끌한 입구 계단에 서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가게 안은 눅눅한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젊음이 가득했다.


순간 구석진 창가 테이블에서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십 년이 지났지만 단숨에 알아보고 말았다.


찬이였다.


눈이 마주친 녀석이 손을 흔들었다. 연습했던 무심한 표정을 잘 짓고 있을까. 따위의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한 발 한 발 찬이가 앉은 테이블로 향하는 발걸음에 십 년을 거슬러 관청리의 오래된 골목 냄새가 났다.


“여기야! 우와 진짜 반갑다. 우리 얼마만이지?”


목소리는 굵어지고 안경은 조금 작아졌지만, 찬이는 그대로였다.


귀엽게 동글동글한 눈매와 반듯한 눈썹. 그리고 아쉽게도 키가 나보다 약간 더 작은 것까지, 10년 전 그대로였다.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요구르트나 홀짝이던 열 살의 우리와 요구르트 소주를 앞에 두고 앉은 스무 살의 우리가 같이 있는 것 같았다.


어색하게 술잔을 부딪혔다. 요구르트 소주의 달달한 냄새는 코를 찌르고 혀에는 싸한 알코올의 향이 맴돌았다.


우리는 각자 뛰어넘은 십 년을 제법 ‘어른’ 답게 가벼운 말로 전했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에서 그간의 시간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읽을 수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녀석은 꽤 힘들게 지낸 듯했다. 한 잔, 두 잔,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안주로 술잔을 비웠다. 처음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술기운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찬이는 10년 전 그날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입을 뗐다.


“나 그렇게 강화 떠나고. 진짜 너무 아쉬웠어. 너무 보고 싶었거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녀석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말해야 하는데, 요구르트 소주는 용기를 주기에 너무 순했다. 두껍게 바른 파우더가 내 볼의 홍조를 가려주기만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찬이는 말을 이었다.


“첫사랑이었거든. 사실 아직도...”


찬이의 입에서 툭 던져진 말에 마음속에서 하얀 유니콘이 날아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머릿속의 단어는 입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애꿎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너를 좋아했다고 말해야 하나.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많이 울었노라 꺼내 놓아도 될까. 너와 손을 꽉 잡았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용기를 내어야 했다.


나보다 찬이가 빨랐다. 녀석은 결심한 듯 술잔을 비웠다.


“정말.. 보고 싶었어. 아직도 못 잊을 만큼.”


찬이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금까지 널 그렇게 힘들게 했구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얼마간 녀석을 잊고 지내기도 했는데... 찬이의 마음이 무겁게 전해졌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나는 찬이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까?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던데, 우리는 지금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때였다. 찬이의 입에서 간절함이 잔뜩 묻는 한 마디가 뚝 떨어졌다.




“가연이... 흐윽”


가연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는 그 이가연? 우리 가게 옆 교복 집 딸내미?


“가연이가 왜...”


“사실 나 가연이가 정말 보고 싶었어. 그렇게 강화를 떠나고 진짜 편지 쓰고 싶었지만.. 흑흑 아빠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흐윽.. 흑 고백도 못 해보고...”


찬이는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스무 살 성인 남자가 되어서도 여전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이 녀석은 지독한 울보였다.


“좀 도와주라. 나 정말 가연이 찾고 싶거든.. 혹시 가연이 소식.. 알고 있어? 아님 졸업 앨범에 연락처라도..”


찬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는 동안 머릿속에는 10년 전의 필름이 빠르게 되감겼다. 가겟방 소꿉놀이. 그래 거기엔 항상 가연이가 있었다.


나는 엄마, 가연이는 누나. 그리고 찬이는 누나에게 안겨있는 강아지.


피아노 학원에도 가연이가 있었다. 찬이는 나와 ‘공범’이 되었던 탓에 피아노 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못했다. 아... 그랬구나. 그날의 젖은 얼굴. 가연이가 다니던 학원에서 쫓겨날까 봐 그토록 울었던 것이구나.



맙소사.



내 기억 속의 애틋하고 아련한 투 샷은 사실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편집된 왜곡된 영상이었다.


유니콘(페가수스) 같은 나의 찬이는 사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주인공이 아닌 눈치 없는 ‘금쪽이’였다.


끅끅거리며 계속 가연이를 찾는 찬이를 보며 소주를 한 병 주문했다.


다디단 요구르트 소주로는 가슴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들이켠 소주가 쓰면서도 달았다. 잔을 거침없이 비우는 나를 보며 찬이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너도.. 보고 싶었어.

넌 내 우상이었던 거 알아?”


우상? 뜬금없는 단어에 귀가 솔깃했다.


“전에 네가 지은이 누나 집 앞에서 형아들한테 빗자루 들고 덤볐잖아.

꺼지라고 막 소리 지르고, 그때 진짜 멋있었거든.”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 강찬이의 눈빛이었다.

입이 바짝 말라 다시 한번 내 잔을 비웠다. 찬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지금도”



손목에 뿌린 쁘띠마망의 다디단 향이 훅 끼쳤다. 다시 한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찬이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세 보이네..”


와장창.


내 핑크색 일기장과 ‘강유진’ ‘강재진’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배받이살도 제사상도 모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이 그랬다. 첫사랑은 기억 속에 묻어 두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고. 나는 그것이 세월에 변한 서로에게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마음이라 생각하곤 했다.


진짜 사랑이라면 세월에 변한 모습 역시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날 알았다.


그 말은 기억이라는 놈이 얼마나 요망했는지 일깨워주는 경고였다는 것을. 서로 민망한 진실 따위는 깊은 곳에 묻어 두고, 기억하고 싶은 장면만 골라 만든 ‘나만의 추억’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씁쓸한 사실을 말이다.


나의 첫사랑. 도토리, 강아지, 아이 아빠 강찬이는 그날 핑크빛 추억을 ‘야인시대’로 바꾸어 놓고 혼자 연애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헤어질 때까지 ‘가연이’를 불러댔다. 술마저 약한 녀석이었다.


나는 끝끝내 가연이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가연이의 고등학교 때 근황을 넌지시 건넸다.


“가연이, 고등학교 때 키 180인 오빠와 꽤 오래 사귀었을걸? 그전 남자 친구는 키가 185였나 그랬을 거야.”


나의 말에 찬이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모르는 척 돌아섰다. 그리고 나도 혼자 노량진역 앞에서 떡볶이를 사 먹으며 조금 울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첫사랑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강한 동네 짱이 되어 골목의 야인으로 영원히 박제되었다는 사실은 떡볶이보다 좀 더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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