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웅'의 '블랙모터'

'슬램덩크'에서 누구 좋아하셨어요?

by 영차보


“쌤, 슬램덩크 보셨어요?”
“그럼, 나 슬램덩크 엄청 좋아했지.”
“헐, 우리 엄마 아빠도 옛날에 봤대요. 쌤은 강백호? 아니면 서태웅?”
“난 채치수.”
“헐... 대박. 어! 그러고 보니 쌤, 채치수 닮았......”
“응, 넌 숙제 두 배.”

요즘 아이들이 숨 쉬듯 내뱉는 ‘헐’이나 ‘대박’만큼이나 ‘아싸라비아 콜롬비아’와 ‘캡짱’이라는 추임새가 자연스러웠던 시절. 골목마다 농구공 튕기는 소리를 울려 퍼지게 했던 전설의 만화가 삼십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극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덕분에 수많은 어른이 옛날을 추억하며 아이들과 기억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제자에게 ‘채치수 닮은 꼴’이라는 팩트 폭격을 당하긴 했지만, 나 역시 다시 찾아온 슬램덩크가 참 반갑다.

열 살 때 만났던 친구들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는 기분. 그 설렘은 자연스럽게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여전히 열정이 넘치는 강백호가 사랑스럽고 내가 좋아했던 채치수 선배는 이제 나보다 내 아들에 가까운 나이라는 것은 좀 슬프다. 그리고 서태웅에 이르러서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그 시절 관청리 골목의 ‘서태웅’이다.

그 녀석은 우리 동네 자전거 가게 아들이었다. 큰 키에 홀쭉한 체형, 찢어진 눈매 위로 찰랑이는 검은 생머리, 흔치 않은 하얀 피부, 무뚝뚝한 표정, 말이 없는 것까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녀석을 ‘서태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녀석도 ‘서태웅’이라고 불리는 것을 제법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이름은 ‘김유순’이었다. 돌림자 ‘순’의 저주에서 고르고 골랐을 이름이지만, 친구를 놀리는 것이 지상 목표인 초딩 사이에 냉미남 ‘유순’이로 사는 것이 꽤 피곤했을 터였다.

나는 처음에 녀석이 좀 거슬렸다. 우리는 하고 싶은 놀이가 매번 달랐다. 그래서 남자애들은 서태웅을 따라가고 여자애들은 내 편을 들었다. 그렇게 무리가 갈라지자


“네가 먼저 바보라고 했잖아.”

“난 바다의 보배라고 한 건데?”

“너 재수 없어.”

“욕했냐 지금?”

“아니 대학교 갈 때 재수 없으라고 한 건데?”


따위의 사소한 말다툼은 곧 남자 편과 여자 편의 단체전이 되었다.


나와 서태웅 사이에는 싸한 무엇이 흘렀다. 하지만 녀석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서태웅은 진짜였다. 얼떨결에 골목대장이 된 어설픈 나와 진짜 냉미남의 포스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친해진 것은 정말 의외였다.



당시 문방구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녀석은 그곳의 최강자였다.
파란 트랙 위에는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여러 대의 자동차가 빠르게 달렸지만, 서태웅이 내려놓은 ‘번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의 미니카가 곡선 구간에서 튕겨 나갈 때, 번개는 트랙의 옆면을 디디고 빠른 속도를 잃지 않았다. 항상 1등은 서태웅의 ‘번개’였다.

튜닝도 없이 간신히 조립만 한 초라한 나의 미니카는 문방구 앞 트랙을 달릴 자격이 없었다. 쓸쓸하게 돌아서 동네 공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내 미니카를 한참 만지작거릴 때였다.

“줘 봐.”

주어, 목적어를 모두 생략한 화법, 서태웅이었다. 내 앞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녀석의 손에 미니카를 건넸다. 서태웅은 미니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상자를 열었다. 서태웅이 농구공 대신 늘 가지고 다니던 손잡이가 달린 상자, 뚜껑을 열자 칸칸이 온갖 부품과 충전지, 그리고 손바닥만 한 자동차 여러 대가 담긴 서랍이 계단처럼 펼쳐졌다.

녀석은 드라이버를 찾아 말없이 나의 미니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사를 풀었다 조이는 것을 반복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거, 똥모터라 빨리 못가. 블랙모터로 바꿔줄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에서 본 녀석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설명서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능숙하게 모터 바꿔 달았다.

“휠 발란스도 안 맞는데... 조정해 줘?”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서태웅의 손길이 닿은 미니카는 완전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윙’하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 녀석이 처음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기술 제휴’의 이름으로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골목엔 더 이상 남자 편 여자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 애는 자연스럽게 우리 골목에 최강자가 되었다. 능력을 바탕으로 한 권력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강한 녀석이 부러웠다.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어떤 일에도 놀라거나 겁먹지 않는 내면의 힘, 소리만 빽빽 지르는 나의 센 척과는 온도와 강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어느새 서태웅을 그 골목의 대장으로 인정하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서태웅은 나와 노는 것을 좋아했다. 여자아이 같지 않은 내가 편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고, 비가 오던 어느 날, 나는 그 애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날 튜닝해야 할 미니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이 없는 편인 녀석은 그날따라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그 아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 누... 누나가 벌써 왔네”

서태웅은 현관에 있는 운동화와 거실 끝 닫힌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하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 애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닫힌 방문 너머로 큰 소리가 들렸다

“야, 김유순.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아... 누나 미안...”
“너 누구 데리고 왔어?”“친구...”“누구 허락받고?”
“... 미안해”
“라면이나 하나 끓여 와.”
“,,, 아... 알았어!”

유순이는 나를 잠깐 보더니 “잠깐만”이라고 속삭이곤 주방으로 뛰어갔다. 가방도 벗지 못하고 냄비를 찾아 물을 올리는 쭈그러진 골목대장의 뒷모습을 한참 보고 있었다. 누나의 방에 라면을 배달하고 나오는 녀석의 모습은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같이 녀석의 방에 들어갔다.

녀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누나 진짜 무서워.” 유순한 목소리였다. 유순이는 누나가 우리 집 서열 1위라고. 정말 많이 맞았다고 말했다.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약한 모습이었다.

사실, 우리보다 네 살 많은 그녀는 중학생이 된 관계로 골목에는 더 이상 얼굴을 비추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전설이었다. 목소리만 크고 객기를 부리는 나는 물론이고, 녀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포스가 있었다. 말 그대로 ‘패왕색'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루피보다 먼저 패왕색을 익힌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야 깨달았다. 녀석의 강함은 누나에게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결과이자 생존 본능이었다는 것을. 녀석은 강한 게 아니라 강해져야만 했으리라.

사실 몇 번 녀석의 집에 들락거리게 되면서 나도 그 언니에게 몇 번이나 혼났다. 특히 웃으면서 하는 욕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린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서태웅에게 존경심이나 카리스마를 느낄 순 없었다. 간혹 억눌린 자에게 느껴지는 짠내, 혹은 안쓰러움을 느꼈을 뿐이다. 여전히 녀석은 관청리 골목의 대장이었지만, 나는 그 애가 강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진짜 골목의 호랑이는 202호에서 라면을 먹고 있겠구나 따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삼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이제 유순이를 보고 '서태웅'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넉넉한 뱃살과 줄어든 머리숱은 감독님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골목의 미니카 고수는 다른 사람들의 '미니 카'를 만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덕업일치가 아닐까? 녀석은 잘 나가는 카센터 사장님이 되었다.

나를 굴복시켰던 카리스마와 뚝딱뚝딱 빠른 손으로 보여주던 기술력은 그대로인가 보다. 네이버 리뷰를 보면 알 수 있다.


[ 사장님이 친절하진 않은데, 차는 잘 고쳐요. 단골이에요. ]



여전히 말은 많지 않지만, 언제나 실력으로 말하는 멋진 녀석이다. 역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순이의 누나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의 누나 역시 시간을 머금고 달라져 있었다. 웃음이 많아졌고 웃는 얼굴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상냥하게 나의 안부를 물었다. 언니는 여전히 강화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결혼했고, 아이들도 둘이나 있단다. 참 행복해 보였다.

"언니, 그럼 건강하세요. 또 뵈어요."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서면서 생각했다. 과연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언니의 아이들은 참으로 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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