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조퇴 좀 하고 싶어요.”
“무슨 일 있니? 어디 아프니?”
“네. 머리가 아프면서 열이 나는 것 같아요.”
나의 중3 때 이야기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 주변으로 심한 압력이 느껴졌다. 몸이 더웠다가 추웠다가를 반복하다가 점점 힘이 빠져왔다. 더 이상 교실에 있기가 힘들어서 조심스레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어서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아픈 사람 같이 안 보이는데?”
딱 잘라 말씀하시며, 곧장 교실로 돌려보내셨다. 그 한 마디가 24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꾀병 부리는 학생들을 가리기 위한 담임선생님의 전략 중 하나였을지는 몰라도, 믿어주지 않는 담임선생님이 못내 많이 서운했다. 밝은 표정과 웃는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나는 많이 아팠음에도, 아파 보이지 않는 학생이었다.
방과 후 부랴부랴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첫 번째로 간 병원에서는 고등학교 입시 스트레스로 인한 편두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여수는 당시만 해도 비평준화지역으로 고입 선발고사 점수와 중학교 내신 점수에 따라 고등학교 진학이 결정되는 지역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문고를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중3’이라는 학년이 의사 선생님에게 선입견으로 작용하였을까? 지금까지 겪어왔던 편두통과는 차원이 다른 통증과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기에 엄마와 난 또 다른 종합병원을 찾았다.
“어이구, 뇌수막염입니다. 염증 수치가 너무 높은데요? 바로 입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조금만 더 늦게 병원에 갔었더라면,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수도 있었다. 뇌수막염은 바이러스, 세균 등에 의해 뇌수막에 염증이 일어나는 것으로 전염성이 높아 격리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인접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남학생이 같은 뇌수막염으로 안타깝게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친구에게 전해 들으면서 극도의 공포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소아과 병동에서의 첫 날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행히 완치가 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이후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선생님들께 습관처럼 부탁을 드린다.
“선생님, 저 표정이 밝은 편이라서 아파도 잘 티가 안 나거든요.
꼭 제가 아프다고 말하면 바로 병원에 보내주세요. ”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조퇴증을 써줄 때마다 그때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의 중3 때 담임선생님의 머릿속과 지금의 내 머릿속은 드디어 하나가 된다. ‘혹시나 수업 듣기 싫어서 부리는 꾀병이진 않을까? 날 속이려 하나? 진짜 내가 속아서,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을 호구로 보면 어떡하지? 아냐, 진짜로 아플 거야. 오늘은 좀 쉬게 하는 게 낫겠지? 맞아. 저렇게 선한 눈동자를 하고 날 속일 리가 없어. 그래, 믿자. 믿어보자.’ 혹시나 아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어 상처 입게 될 24년 전 나의 모습이 오버 랩 되어 보호자 동의를 받은 후 조퇴증을 써준다.
진실과 거짓은 50대 50이다. 고통의 크기와 표현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타인의 고통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고통의 크기보다 믿지 않아서 받게 될 마음의 상처는 오랜 시간 동안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호구 담임선생님이 될지언정, 믿음을 택한다. 믿어줌으로써 쌓이는 신뢰는 학생에게 자산이 될 것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에는 반드시 양심의 심판이 따르니, 이는 곧 경험의 회초리가 될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담임선생님 몰래 여수 밤바다로 산책을 나갔다가 하필이면 그곳에서 담임선생님을 딱 만나게 되어 혼쭐난 경험이 있다. 교문을 등지고 뒤돌아 나올 때의 그 짜릿함과 스릴감, 파도소리를 향해 내달렸던 우린, 그 누구보다 행복한 10대였다. 무료함 속 작은 일탈은 때론 활력이 될 수 있지만, 일탈도 일상이 되면 특별함이 사라져 버린다. 일탈은 어쩌다 한번 일상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을 발휘한다. 10대에게 조퇴는 어쩌면 평범한 일상 속 작은 일탈이자, 허용된 범위 내에서 누리는 최대의 자유이지 않을까? 일상 속 잠깐의 쉼,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줄 일탈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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