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you are in trouble, just look around. I will be there for you."
곤경에 처했을 때, 주위를 둘러봐.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내가 표현하기 전에 누군가 내 속내를 알아줬으면 하는 순간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연필로 직접 하나하나 눌러쓴 아날로그 손글씨가 텅 비었던 내 마음을 채운다. 아무 말 없이 다가와 툭 하고 건네는 문장 하나가 나의 하루를 살게 한다. 힘들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태연한 척, 애써 과장된 웃음으로 그 상황을 넘겨버리곤 한다.
‘괜찮아, 괜찮아, 이 또한 지나갈 거야. ’
지나는 동안 난 절대 괜찮지 않다. 안 괜찮다고 하는 순간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별거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웃음마저 기운을 다 했는지, 시큰하고 묵직한 떨림이 콧잔등에서부터 미간 사이를 거쳐 증폭되더니, 저 깊숙이 묵혀놨던 감정 쓰레기들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자주 연락하지는 않지만, 간혹 연락이 먼저 오는 친구가 있다. 신기하게도 이 친구는 첫마디가 매번 똑같다. " 너 어디 아프니? 어젯밤 꿈에 네가 나왔어. " , "웅, 그래. 안 그래도 조퇴하고 집에 누워 있다. 나 자궁경부(제자리) 암 2기래. " 한 동안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소식에 놀라할 친구에게 다시 또 스스로를 연민하기 시작한다.
“괜찮아, 괜찮아, 나 정말 괜찮아. 미리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
사실, 난 두려웠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감정의 널뛰기는 계속된다. 가만히 있으면 암세포가 내 장기 속 어딘가에 침투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 달 간의 병가를 신청했다. 반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알려야 했다. 선생님이 많이 아프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수술 후 건강하게 꼭 다시 만나자고.
종례 시간이 다가왔다.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한 명 한 명 눈 맞춤을 하며 눈의 온도를 가슴에 새긴다. 평소 감정표현이 서툰 남자반 아이들이지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손을 건넨다. 그 사이에 다른 반 여자 아이들에게까지 나의 소식이 전달되었는지, 한걸음에 달려와 날 꼭 껴안는다. 따스한 포옹으로 여러 말을 대신한다.
“다 잘 되실 거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선생님.”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순간이다.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다시 일어서게 한다. ‘그래. 별거 아니야. 눈 딱 감고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거야. 불현듯 찾아온 어둠 앞에 잠시 멈추는 거야. 그래. 힘들면 그렇게 잠시 멈췄다 가도 괜찮아.’
일시정지
그렇게 내 삶에 일시정지가 찾아왔다. 그렇게 원하던 잠시 쉬는 시간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외딴섬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녀석들 조회 시간에 맞춰서 잘 나왔는지, 잠깐이지만 함께 하게 된 새로운 담임선생님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미리 배달시켜 놓은 생수는 잘 찾아서 먹고 있는지, 온통 머릿속은 걱정의 연속이다.
'선생님 빈자리가 너무 커요. 어서 회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단체 대화방 속 아이들이 내게 건네는 걱정과 내가 하는 아이들 걱정이 서로 맞닿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멀리서 나마 마음을 나누며 재생 버튼이 눌려질 그 날을 기다린다. 일시정지 , 거꾸로 하면 지정된 시일 , 수술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불안이 다시 또 시작된다. 마음에 버튼이 있다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꾹 눌러 정지시켜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속 버튼은 고장 났다. 괜찮은 척이 아니라 진짜 괜찮아지기 위한 재생 버튼만큼은 제대로 작동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