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둡다

근데 이렇게까지 어둡다고요

by 지영은

인생의 고난 Top 5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는 MBA 준비 기간은 정신과 진료와 요가가 있어 큰 탈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요가 의존증이 있었다고 할 만큼 마음이 힘들 때면 주에 몇 번 동네 요가원을 찾았다. 자진해서 뛰어든 육체의 고난을 받아들이고 공존하는 마음의 힘을 길러, 요가원 밖에서도 적용하고 싶었다. 잡생각이 들 수가 없게 80여 분간 수련을 하고 마지막 사바아사나 자세로 편안함을 누리던 순간, 번뜩 든 생각이 내면의 고요를 깼다. '결국 GRE를 하게 생겼구나'


GRE는 영어권 국가의 석박사 과정 진학 시에 요구되는 시험으로, 대부분의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GMAT과 더불어 GRE를 인정한다. GMAT과 비슷한 듯 결이 조금 다른데, GRE는 난생처음 보는 단어 몇 천 개만 외우면 점수가 어느 정도는 나온다고 하고, GMAT 몇 번 봐보고 각이 안 나온다 싶은 사람은 더 한다고 될게 아닐 수도 있으니 GRE로 방향을 트는 게 좋다는 후기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일 거라고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는 의문인데, 이렇게 해도 안되는지 끝까지 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성에 차는 GMAT 점수를 만들지 못했으니 GRE 시험을 준비하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바로 GRE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별안간 '흰개미' 같은 단어를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GMAT으로 단련이 되어서 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중꺾마'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는데 나는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버전이 더 좋았다. 딱 그런 마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충전을 해도 50% 이상으로는 에너지가 차지 않는 채로 GRE 공부를 했다. 그래도 이전과 달랐던 건 공부한 만큼 점수가 오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내가 만든 새로운 적, 열등감과도 싸워야 했다. 시험 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내 학업 수행 능력 자체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내가 정말 머리가 좋거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끌었을까 하는 의미 없는 생각에 빠졌고, 주변 사람들의 뛰어난 점들을 한데 모아 '이런 시험을 몇 달 만에 척척 끝내버리는 학업 수행 능력이 좋은 사람'의 상을 만들어 그 상과 나를 비교했다. 스스로 능력을 의심하고 힘 빠지게 만드니 그보다 더 힘든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이 나에게 한치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의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늦은 밤 독서실에서 채점을 하며 틀린 문제에 줄을 죽죽 긋고 눈물도 죽죽 나던 어느 날, 다음에 보는 시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게 마지막 시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 마지막 시험이 됐다. 이제는 어떻게 더 할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시험을 보고 아무 기대 없이 페이지를 넘기니, 내가 정해둔 커트라인을 처음으로 넘긴 점수가 있었다. 임계점에 다다르고 나서야 끝이 나는 걸 보고, '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상투적인 말을 그냥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두 가지 시험을 다 공부하고 치르느라 시간을 많이 써서, 지체할 것 없이 TOEFL과 에세이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그날 만은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했다.


KakaoTalk_20250912_172319026.jpg 아주 홀가분해 보이는 그날의 식사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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