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은 빠르게, 고생은 길게

그것이 직감을 믿는 나니까

by 지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는 그에게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처럼 번뜩 들어버린 순간이 묘사된다. 그는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그 순간을 말한다. 관중이 별로 없는 야구장 외야에 누워 시원한 맥주와 함께 야구를 보던 중 한 타자가 2루타를 친 그 순간. 그런 것을 'epiphany'라고 한다는데, 나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딱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첫 직업이었던 국제회의 기획사로 딱 1년을 일하고 그만둔 후에, 세 달을 원 없이 놀고서 이제 슬슬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 봐야 하나 싶었을 때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책장 정리를 하려던 어느 날이었다. 앞으로도 영영 볼 일이 없는 책들은 정리를 하려고 바닥에 앉아 책들을 빼내어 살펴보던 중에, 갑자기 'HR. HR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딱 저 말 주머니가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뭉게뭉게 말 주머니가 아닌 뾰족뾰족 말 주머니였다. 지금처럼 다양한 채널에서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찾아볼 수 있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책들을 그대로 쌓아둔 채로 벌떡 일어나 서점으로 향했다. 그때 얼마나 도움 되는 책들을 읽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HR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반쯤 알고 반쯤 모르는 채로 HR 관련 포지션들에 지원했다. 당연하다는 듯 몇 차례 떨어지다가 운 좋게 한 스타트업의 HR 인턴 자리에 합격했다. 그리고 휑한 공간에 책상들만 죽 놓여있어 어딘가 어설프고 삭막한 첫인상을 받았던 그곳에서, 한 직장에서 다 하기 힘든 여러 일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웃고 울며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코로나 19에 걸렸을 때였다. 직장을 두 번 옮긴 후였다. 왜인지 나는 끝자락까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는데 모두가 한 번은 걸리고 지나가는 것 같아 겸허히 차례를 기다리던 중에, 점심 식사를 함께한 전 직장 동료로부터 확진 판정 소식을 들었다. 신기하게 연락을 받자마자 증상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듯했고, 곧장 병원에 들러 약을 타고 일주일 간 칩거할 준비를 했다. 출근 준비 시간과 통근 시간이 들지 않으니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 종일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꼬질꼬질하게 퇴근한 어느 날, 아무 결심도 대단한 의지도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갑자기 MBA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 직장에서부터 막연히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었는데, 해외 MBA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보다도 여태껏 한 번도 유학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시작은 뭘 어떻게 준비하는지 한 번 봐보려는 것이었는데, 몇 시간 뒤 수많은 정보와 후기에 빨려 들어갔다 나오고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학을 갈 수 있는 때일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부터 준비해서 싱가포르에서 MBA를 하겠다'는 결심만이 남아있었다.


두 경우가 똑같이 닮아있지는 않아도 아무런 맥락도 없고 예상도 못한 어떤 순간에 인생을 바꾸는 큰 결심이 갑자기 선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물론 듣도 보도 못한 뜬금없는 생각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간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쌓아온 생각들이 퍼즐 맞추듯 맞춰지는 어떤 순간에, 마치 멀티버스의 수많은 갈래 중 이미 세팅되어 있던 어떤 버전으로 흘러가듯 무거운 결정이 턱없이 가볍게 이루어져 버린다.


두 번째로 맞은 그 순간 이후, 야구 경기가 끝나고 그 길로 원고지와 만년필을 사 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당장 그 주 주말부터 GMAT(경영대학원 입학시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뭔진 몰라도 어려운 줄은 알겠다 싶었던 첫날엔 그 후로 1년 반 넘게 지원 준비를 하며 때때로 눈물을 쏟고 정신과에 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KakaoTalk_20250907_015054723.jpg 학원 수업이 있던 주말마다 사 먹은 김밥. 사진 찍을 여유가 있었던 걸 보면 눈물 젖은 김밥이 되기 전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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