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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에 너의 다정을 떠올려

by 양이


“아람님은 본명이 아람인거죠?”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동호회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내 이름은 아람. 어쩐지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 같은 대사가 바로 나와야만 할 것 같다. 원래 내 이름으로 정해놓은 이름은 빛날 희熙에, 어질 현賢이었다고 한다. 전국적인 한글 이름 짓기 유행으로 부모님이 급작스레 마음을 바꾼 탓에 나는 희현이 아니라 아람이 되었다. 가끔은 생각하기도 한다. 희현이었다면 조금 더 빛나고 현명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렇지만 희현은 정말로 내 이름 같지 않고,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그에 비하면 아람은 이응이 많아서인지 어쩐지 둥글둥글한 느낌이다.


1673019697977.jpg 가을의 다람쥐와 아람

아람이 되어버린 나는 학창 시절을 비롯하여 아직까지도 나를 ‘아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아름이 아니라 아람이에요.”라고 정정하며 살아왔다.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아람인 덕분에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내 이름의 뜻 같은 걸 얘기하며 다가갔다. 최근에는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님은 한글 이름이에요? 저도 한글 이름으로 밤인데.”


“뜻이요?”


“네. 잘 익은 밤.”


“그거 발로 밟아야 열리던데.”


“밟지 마라.....”


흔히들 이름을 따라 운명이 변한다는 얘기를 한다. 점이니 사주 같은 것들을 적당히 좋은 얘기만 들으며 믿으며 살아 왔지만 가끔은 이름을 바꾸면 팔자가 변한다는 얘기에 솔깃 한다. 한 겨울에 태어났음에도 가을의 이름이라는 것이 내 인생 같다고 가끔은 생각한다. 뭐랄까. 얼렁뚱땅 우당탕탕 같은 느낌. 어쩐지 조금 어긋난 느낌. 팔자 같은 것, 바꿀 수 있다면 바꿔보고 싶었다. 반평생을 한 이름으로 살아 왔으면 인생의 후반부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가도 무수한 행정 절차와 발급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보다도 마음을 접게 하는 것은 내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불렀나. 거기에 담긴 다정과 사랑을 잊지 않으려고 가끔은 말하기도 한다. “그래. 아람아. 괜찮아.” 물론 전혀 괜찮아지지도 않았고, 내가 내 이름을 스스로 말하는 건 너무 낯간지러웠다. 스스로를 부를 땐 도저히 다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가 아람인 게 좋다. 누군가 아람이라고 불러 준다면 적당히 녹아내릴 심산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주위 사람에게 자주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언니’나 ‘누나’보다도 ‘아람이’인 게 더 다정하게 느껴진다. 생일이 정확히 1년 정도 차이 나는 직장 동료 윤이 회사를 그만뒀을 때 나는 “편한 대로 불러. 아람이도 괜찮아.”라고 말했다. 윤은 바로 “그래. 아람이로 할게.”라고 답했다.


내 제안에 흔쾌히 응한 동성 친구는 윤이 처음이라 제안을 한 내가 도리어 놀랐다. 그래도 윤이 나를 ‘언니’가 아닌 ‘아람이’로 부르게 된 게 너무나 다행인 날들이 많았다. “아람을 아람이라 부를 수 있어서 좋아. 아람이라 부를 수 있어서 온전히 내 생각을 다 얘기할 수 있는 듯.”라고 윤은 말했다.


어쨌든 내 이름은 아람.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의 밤이라고 한다. 충분히 익은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밤톨 같은 걸 떠올리면 어쩐지 기분이 말랑해진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디에서나 해악을 끼치고 나 역시 어디선가 그럴 테다. 그래도 밤 같은 걸 떠올리면 조금은 안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말랑한 기분 같은 걸로 나를 조금 더 애지중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 역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더없이 다정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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