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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Aug 17. 2019

'감정'

과연 '감정에의 호소'가 논리적 오류일까?

상경한 곳에서 주말을 이용하여 공부할 만 곳을 찾으니, 가장 가까운 곳이 '박정희 기념관 도서관'이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 그 장소의 도서관에서 이직한 직장에서 필요로 할 것 같은 공부를 하는 도중, 같은 건물 내에서 이윽고 '애국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곳은 해마다 '박정희 아카데미'라는 교육이 열리는 곳이며, 이번이 7기생 수료식이 열리는 날이다. 그래서 그 수업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께서 부르신 모양이었다.

  

'여기가 태극기 집회의 숙주와 같은 장소겠구나...'

한편으로는 그분들에게 박정희란 어떤 존재이길래, 아직도 그들의 청춘이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진하게 다가오길래 '박정희 유신 정권의 잔재'를 잊지 못하고 계신 걸까.


각설하고 꼭 'PSAT'이라는 논리력 평가가 아니더라도 논리적 오류에 등장하는 용어로 '감정에의 호소'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동정심이나 연민의 정을 유발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오류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이나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나 그 사람들이 속한 세계에서의 주장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용되는 주관이다. 그들이 눈살 찌푸리는 시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일개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관을 무시할 순 없다.


왜냐하면 결코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납득시키려면 그들과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시대관과 가치관이 먼저 전제로 깔고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박정희 기념관 도서관에서 수료하는 어르신들이 젊으실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이를테면 바른 미래당의 이준석이 정치 초년 시절에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아무리 간언을 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진위가 그녀의 감정에 호소가 될까? 아마도 하버드대에 나온 당돌한 녀석이 제법 많이 아는구나 하며 귓등으로 들었을 확률이 99.9%였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로 공유되어야 할 공통분모는 역사책으로만 환기하고 정치공학이나 네거티브 선전만을 가지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쇼를 잘하는 것일까 하며 나조차 귓등으로 듣는다.


인간들은 서로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감독, 작가, 예술가들은 "제발 내 작품에 감흥 좀 가져주세요."라며 본인의 작품을 만들며, 직장인들은 "제발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높게 매겨주세요." 하며 자신의 일을 포장하며, 종교인들은 "제발 신에게 잘 보이세요."라며 일반인들을 설교하며, 학생들은 "제발 하고 싶은 것만 하게 해 주세요."라며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한다.


수많은 자기 개발서를 보더라도 한 챕터의 소제목으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라는 문구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그 이상의 맹점을 숨기고 있다. 사실 전문가는 실제로 전문가이지 않더라도 자신을 전문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종교인들은 실제로 신이 없다는 것을 믿더라도 수많은 이를 자신의 종교로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며, 학생은 공부를 잘하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 있고, 직장인은 꽤 유능하지 않더라도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중에는 자신의 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많은 저작물이 하루에도 수십만 권씩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의식 세계에서의 법칙'은 간과하고 너무 현학적으로 내몰고 있는 게 세상인 것이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책을 안 보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더군다나 우뇌까지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감정에의 호소'라는 법칙이 통용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명한 처세술은 자신의 유능함만을 고집하기보다는 타인의 유능함을 치켜세우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노자의 '도덕경'부터 삼국지까지 수많은 동양의 고전의 내용으로 돌고 돈다.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평론가처럼 감독이 얼마나 작품성을 위해 헌신을 했는지 평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주인공과의 메타포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현실이고 사실이고 세상의 법칙이다. 우리는 굳이 이세돌처럼 천재가 아니더라도 험난한 시국을 파헤쳐 나갈 수가 있다. 무리수가 보이더라도 타인과 나의 공감대가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다.


서로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는 것은 촛불 집회가 결코 태극기 집회를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이 강력한 감정의 매개인 것이다. 비록 나는 박정희 각하의 유신정권 시절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국민학교 시절 지겹도록 불렀던 조례시간의 애국가, 국민 헌장을 통해서 조금은 어르신들의 경직된 세계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박정희 세계관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지금 이 시대에서 그는 독재자로 전락한 우상일뿐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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