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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Dec 23. 2020

미래나 과거나 현재일 뿐이다.

AI(인공지능) 기술을 역이용하다면?



사람의 일이란 본인이 상상하지 않으면 미래에 결코 그 상상물의 결과로 찾아오지 않는다. 세상에 세 종류의 혹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격언들 중에 필자는 이렇게 다시 말하고 싶다. 세상에는 세상을 주도하는 사람과 세상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 두 부류 중에 변하기 싫어하는(하지만 막상 새로운 것에 노출되면 좋아하는) 뇌에 편승하기 쉽기 때문에 보통은 세상의 흐름에 휘말린다.



필자는 1988년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이 그때의 저녁에 TV에서 재방송할 때, 감기가 걸렸었는지 몸이 아파서 엄마 등에 업혀 징징 짜고 있었다(만 5세였다). 그런데 그런 갓난아기였을 때라도 그때의 사회적 분위기는 충분히 감지되었던 거 같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대적 분위기와 대비되는 게 너무 느껴지기 때문이다(일인의 성급한 일반화 오류 맞다). 이것을 일개 국민들이 대물림하는 문화적 '밈'(Meme, 인터넷의 SNS에서 유행하는 짤방 말고 문화 전승 역시 유전자처럼 복제 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체가 있는데, 이것을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가 밈으로 정의했다.)으로 일컬을 수도 있겠다.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를 열창한 코리아나가 가운데 무대 위로 보인다. 언컨택트 시대에 그립기만 한 그 노래의 끝 자락, '손~ 잡고...'


필자는 몸이 아파서 징징 그렸지만 노태우 할아버지가 대통령이던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막 초기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만을 등에 업고 나아가는 시기라서 살기는 좋았다. 일요일마다 엄마 손을 잡고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나온 뒤의 개운함과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덤으로 손에 쥔 피크닉이라는 음료에 빨대를 꼽고 마시면서 엄마와 집으로 오는 길은 정말 행복했다. 아직도 그 풍경을 상상하면 몸속에 세로토닌이라는 긍정적인 호르몬이 샘솟는다.



그런데 단칸방에 세 식구가 살 던 그 시절, 아버지는 여가 생활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 배드민턴 동호회에 들러 운동을 하시곤 하셨는데, 이른바 일개 가정사의 밈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은 너무너무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 찼다. 갓 들어간 초등학교 시절, 286XT 컴퓨터를 통해서 즐기던 게임에 푹 빠져서 컴퓨터 게임이 계속 켜져 있는 채로 학교의 오전 수업을 듣고 와서 다시 빠지곤 했고, 생일 때마다 받은 레고 블록 세트는 매번 새로운 몰입을 선사해 주었다. 그러한 유년기 때의 감성과 더불어 그때 저녁마다 흘겨본 방송이 있었는데, '손자병법'이라는 드라마였다(징징거리지 마십시오. 386 세대 어르신들, 같이 짤 겁니다).



오피스 드라마 '미생'이 나오기 무려 27년 전의 오피스 코믹 드라마, '손자병법', 어릴 적에 만년 과장으로만 알고 있었던 배우가 '오현경'씨였네...



아마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의 얼굴을 추억으로 떠오르는 나이대(386 세대)시라면 필자가 꼬맹이 시절 한창 사회생활을 하셨던 분들임에 틀림없다. 같은 문화적 밈(Meme)을 공유하고 계신 거다. 물론 본인은 드라마의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어릴 적 나의 두뇌에 노출되었던 위의 사진과 같은 장면이 지금 내가 상경해서 한 번씩 회사 생활을 하게 된 것과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고 단정하지는 못해도 추정할 수는 있다.



그래서 어릴 때 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나름의 생각('호기심')으로 가정하게 된다.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인간은 본인이 알고 있는 어휘량을 벗어나는 개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상상력은 어릴 때 세상에 대한 실질적 개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추정이며 그것을 현실 세계에 구체화시켰을 때 그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상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세상사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자들만의 특권으로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학자나 세상을 오래 사신 어르신들이 어린아이들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어린이들이 갖지 못한 개념에 대해서 이론이든 경험으로 이미 하나의 실증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그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 것이다.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신선한 그때의 내가 그립기도 하지만 실상 그것을 겪어보면 세상에 호기심을 발동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은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것을 알고 실망한다.



한글의 특성으로 인한 한국인이 유독 잘하는 두리뭉실한 표현력과 같은 능력의 직관(휴리스틱)을 흔히들 ‘감 또는 촉’으로 부른다. 이렇게 어림짐작에 의한 불확실한 결과 추정은 최소 손실 대비 최대 수익으로 이윤을 끌어모으기 힘들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데이터'라는 객관적인 실물을 통해 확실한 결과에 대한 예측을 선도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요구되는 지금, 이것이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시대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람이다. 까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런 실증적인 세계에서의 실상은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에 대한 여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릴 것 같기 때문이다. 실상은 별 거 없는 인공지능의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인간은 늙지도 않고, 잘생김에 대한 질투도 없고, 똑똑함에 대한 열망도 없고, 이러한 정성적인 가치조차 정량적으로 측량되어 열등감에서 비롯된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판별하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예측한 결과물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은 인간이 주도해야 한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인간만이 그렇게 내린 판단(Insight, 통찰력)을 통해 AI의 예측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인류의 절대다수가 행복한 삶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가 앞당겨지면 질수록 인간의 삶은 윤택해질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88년도에 방영했던 'TV 손자병법'의 드라마에서 느껴진 문화적 밈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인간의 기억은 현재 자신의 판단에 의해 재구성된 또 다른 현재의 일면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거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추억으로 남겨져 있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일 테이다. 지금이 과거보다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유소년기 혹은 청소년기의 아리송하고 모호한 상태의 두뇌가 굳어지는 시기에 아로새겨진 기억들의 향수를 마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과거의 아날로그 풍경을 느끼게끔 역이용하자.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인간의 기억을 과거의 기억으로 재결합해서 현재를 과거의 한 인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의 느낌을 되살릴 수 있는(이게 한 번씩 기분 좋게 꾸는 꿈인가, 어제 필자가 이런 꿈을 꿨다. 그래서 두리뭉실한 이 글을 긁적이고 있는 건지...) 기능을 가지게끔 인간의 두뇌와 손 잡을 수(contact) 있기를 바란다(물론 지금도 어머니와 목욕탕에 함께 갈 수 있지만 그때처럼 여탕으로 들어가면 구치소부터 들어가야 한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반(General) AI는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고 나의 어휘 관념을 넘어선, 인류 지식수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산물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내가 희망항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랩탑을 보고 타이핑만 하기보다는 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현재를 즐기는 거다.



짤 : 제목의 배경그림을 보면 다음 편의 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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