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어디에 쏟아부어야 하는가?
학창 시절에 수학을 잘했던 분들에겐 미안한 소리다. 경제학 용어로 ‘수확체증의 법칙’과 수학 체증의 법칙이 비슷한 양상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땐 들은 바가 없었기에, 개념만 잡히면 무식하게 문제집만 푸는 방법의 효과를 몰랐었다. 하지만 근래 ‘두유 공신’이라는 단국대 치의예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의 공부 수기법에서 수학도 정말 교과서 하나로도 정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어떤 방법이든 양질 전화의 법칙은 둘 다 들어맞는다. 두유 공신이라는 별명의 그 대학생은 수험생 시절에 삼수까지 했었기에 사실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처음에는 양으로 승부)를 거쳤다. 그리고 삼수 때, 교과서의 목차를 백지에 하나씩 적으면서 그 단원에서 나오는 수학 개념을 일일이 반추하였고 각 단원들 간의 개념을 문제와 연결시키는 즉, 기존의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연결고리를 형성시키는 연습을 부단히 하기까지 이어졌다. 맹목적인 바텀업(탐색적 문제풀이의 학습)이 아닌, 스스로 개념을 정리해서 분류해가는 탑다운(연역적 추론의 개념학습)으로 고등학교 수학에서 자신감을 얻은 케이스다.
내 나이에 와서 수학에 대한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빅데이터 분석을 위해 AI 알고리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려면 적당한 통계와 확률에 대한 수리 통계학 지식, 미적분 이론 그리고 선형대수까지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쫌!(?)
서론이 너무 길었기에 본론은 짧고 굵게 말하려고 하나, 가능할지 가늠은 안된다. 외국인이 네이티브(영어권 국가의 모국어 구사자)와 영어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차이를 뇌의 MRI 공명 사진으로 찍어서 보면, 외국인은 뇌의 이곳저곳 전체적으로 활성화되나, 네이티브는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부위만 활성화된다고 한다. 즉 한국인은 영어를 말할 때, 영어에 대한 모국어를 먼저 떠올리려고 애쓰는 뇌의 부위의 신경에서부터 전기가 들어오면서 기억을 더듬는 뇌의 부위까지 전체적으로 부하가 걸리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네이티브들은 해당 언어의 쓰임새가 저장되어 있는 베르니케와 브로커 영역에서의 작동만 이루어진다. 콘텍스트(context)의 호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국인도 한국어를 듣고 말할 때 굳이 그것에 관한 문법적(서술적) 지식이나 어떻게 시작해서 말해야 하는지(절차적)의 지식으로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해당 말의 쓰임이 이미 모국어 저장소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맥락에 대한 쓰임새만 호출하면 된다.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써야 하는구나를 이미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에 의해 수없이 누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콘텍스트 호출 기반의 시스템이 이 언어의 소통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학습의 기저에도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례로 ‘Elevate’라는 지능 학습 앱에서 리딩 파트의 게임의 종류에 ‘CONTEXT’가 있다. 게임의 방식은 하나의 빈칸이 있는 단문의 문장을 제시하고 그 빈칸에 들어갈 단어를 고르는 건데, 문제의 수준은 네이티브를 위한 것이다. 수능의 빈칸 넣기 추론 문제 수준이 아니다. 네이티브들도 평상시에 많이 쓰지 않을 거로 예상하는 문어체 어휘를 유추해야 하는데, 꽤 어렵다. 그런데 보기로 제시되는 여러 가지 단어들을 전부 다 모른다고 가정할 때(보통 한국인은 실제로 그렇다.)라도 그 빈칸에 들어갈 단어를 맞출 수가 있는데(물론 감이지만), 이것을 문맥 기반의 학습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빈칸을 제외한 단문의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그 빈칸에 들어갈 단어가 처음 보는 스펠의 단어라고 할 지라도 정답으로 맞춤으로써 새 어휘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어림짐작이 실력으로 누적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문학에서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소설의 작가가 독자에게 지금까지 어떠한 인물과 줄거리 그리고 배경에 대해서 환기를 시켜줬는지를 파악한다는 건데, 이러한 행간을 놓친 채로 특정 페이지의 어떤 문장을 읽었을 때 작자가 전하려는 정확한 메시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수확체증의 법칙이 문학에서도 적용되는데, 수많은 소설을 읽은 독자라서 비슷한 맥락의 해석으로 추론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앞서 말한 콘텍스트 게임 학습과 같은 언어에 대한 감각이다. 그런데 그러한 감보다 행간을 처음부터 잃지 않고 부지런히 쫓아왔다면 행여 중간에 잠깐 집중력이 새어나간다 하더라도 그 소설을 끝까지 이해하면서 읽는 데는 지장이 없다.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근래 김영하 작가가 펴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같은 수기집이 있다. 본래 김영하 작가는 소설가이므로 수기집을 썼다고 하더라도 소설로 착각하는 독자들이 많아서 그런 서평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김영하 작가는 인지도가 있어서 그런지, 매번 출간하는 소설의 결말 부분이 없다시피 하면 독자들은 아쉬워하나, 작가는 실로 결말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독자들의 상상에 맡김으로써 소설의 완성도보다는 여운의 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김영하 작가의 초기작 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팩트 풀니스(Factfulness)하게 입증은 못하겠다. 여기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확체증의 법칙이라는 ‘투입된 생산요소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수확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게 수학, 외국어, 문학 등 모든 학문의 성과에 공통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학습을 할 때 단지 문제의 양 혹은 문장의 양을 수없이 암기해서는 이 법칙의 기하급수적인 산출량은 기대하기 어렵고, 산술급수적인 효과만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어 학습의 노하우를 전달해주려는 산증인들은 보통 다른 맥락의 영어 몇 백 문장을 외우라고 권장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여러 편, 성경이나 책 한 권(ㅎㄷ;), 혹은 모노로그(독백조)의 특정 주제에 관한 하나의 문단을 통째로 외우라고 한다. 그렇다. 미국식 영작문*을 쓴 저자는 영작을 하려거든 ‘단락 단위’로 하랬다. 왜냐하면 문단에는 작가가 전하려는 하나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단락 단위로 공부해야 영어식 사고가 반영된 논리적 전개에 익숙해져 우리말을 영어에 대입해 어색하게 영작하는 실수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맥락’을 놓지 않기 위한 연습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개념이 어느 맥락(연결 고리)에서 사용되었는지 알고 있고, 영어로 대화할 때도 토익의 파트 2처럼 외국인의 뇌에는 누적되어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비지(?)니스 스몰 토크가 아닌, 외국인과 실제로 이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맥락을 짚을 수 있다면 특정 외국어라도 평생 공부를 해도 끝나지 않을 공염불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맥락과의 싸움이다. 문학이라는 작은 인생도 맥락에 대한 집착에서 하나씩 정복되는 거라면, 그것의 모티브로 삼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삼을 인간들의 삶도 맥락(어제의 나와 내일의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남보다 진정으로 앞설 수 있는 지혜를 쌓을 수 있다.
* 최정숙. (2020). 미국식 영작문 수업. 서울: 동양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