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결정할 수 있다.
수십 년동안 외국어를 배우면서 왜 외국어는 항상 외국어 자리에만 머물 수 밖에 없는지 수많은 번민에 고뇌하다가 결국 익숙한 모국어로 발길을 돌린다. 왜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본래의 성질로 귀소하려는게 인간에게는 편안할걸까?
익숙함과의 결별이 곧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 첫번째 행위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그리고 다시 그 익숙함으로 되돌아가지 않게끔 자신과의 단단한 결속을 다질 수 있을까? 그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인간이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맨날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끔 결속되어있는 기존의 인식을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해야 하는 게 첫 번째 단계이다.
가령, 내가 영어를 듣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영어를 듣는데 이것을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평생을 영어와 씨름해도 결국 영어를 잘 이해한다는 만족감은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어는 의사소통도구의 하나일 뿐인데 이것을 모국어와 동일한 습관으로의 언어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영어는 항상 목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리라 생각되어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겠다. 당신이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거나 간단한 메모를 할 때 당신은 스스로 자신이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구나를 자각한 적이 있는가? 당신이 외국어를 모국어와 같은 관점, 즉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본인이 말하려는 바와 적으려는 내용과 의도에만 집중한다면 결코 외국어를 현재처럼 공부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모든 외국어 공부의 맹점이다. 사람은 자신이 모국어로 말을 할 때 결코 자신의 말이 문법에 적합하게 말하는지 내뱉는 순서가 올바른지 개의치 않고 상대방이 알아듣는지 상대방의 반응과 답변에 초점을 맞추고 대화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말을 들을 때도 자신이 이해하는 바와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바는 그 사람들의 지적수준과 배경지식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비록 그것이 모국어일지라도.
반면에 우리가 외국어를 대할 때는 본인이 하는 말이 상대가 알아듣는데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이렇게 말하는 게 과연 올바른 문법에 맞추고 있는 건지 발음과 어휘가 본인이 알고 있는 건지 머리속에서 한국어로 수 없이 번역하느라 쉴새없이 자신의 서술적 기억에 초첨을 맞춘다. 대화의 중심은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인데도 불구하고. 또한 외국어를 청취라는 틀에 묶어 내가 못알아 듣는 것은 자신이 관심없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든 외국어든 그 분야의 지식에 대한 낮은 수준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 해석하는 외국어 공부에 대한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단정한다.
인간이 본인의 상태와 행위를 되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에 오히려 인간은 학습에 있어서 그리고 삶에 있어서 많은 회의와 시간낭비를 한다. 플라톤이 국가론 537페이지에서 말했다. "모든 학습은 노는 것과 같아야 최고다. 어떤 것도 압박 하에 배우는 것은 마음에 올바르게 정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처럼 놀 듯이 일하라." 아이들이 외국어를 습득할 때나 놀 때 과연 자기가 외국어를 배우구나, 내가 놀고있구나를 인식하고 있을까?
사람이 영악하거나 어리석은 것은 자신의 행위와 타인의 행위를 비교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남보다 쉽게 이루려는 꾀가 단거리 경주에서는 쉽게 승리를 거머쥐게 할 지 몰라도 인생은 결코 단거리 경기가 아니다. 외국어든 삶이든 이 말 한마디가 어쩌면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진리라는게 지금따라 새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