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gi Seo May 16. 2016

대한민국 영어교육의 기이함

인공지능 수준의 영어 장애인들의 슬픈 현실


한국인은 라면을 더 좋아하고 많이 찾으면서 파스타 요리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까닭은 글로벌 시대에 부합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



촘스키는 언어학자다. 그의 이론의 토대가 없었다면, 알고리즘의 튜링 이론만큼은 모르겠지만 인지학 관련해서 인공지능의 학습능력도 지금 없었을 거라고 한다. 설령 그 사람이 제창한 이론이 100% 진리라고 손치더라도 언어에 국한한 가설일 뿐이다. 이 놈 촘스키는 인간은 13세 이전까지 언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를 지니다가 이때가 지나면 키라는 성장인자와 같이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전적 발현이 사라진다는 주장을 펼쳤다.



인간에게 모국어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장 편안하게 내뱉을 수 있는 말 중에 하나가 되는 말이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둘 다 가장 편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받아들인 언어가 두 개가 동시인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사람의 사례를 들었으나 둘 다 언어의 수용성이 더디어 결국 하나는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포유동물 밑에서 동물의 언어를 듣고 자란 소년 또한 유년기가 지난 후 인간 언어를 다시 주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실험 사례는 촘스키 학설의 근거를 세워준다.



언어만을 국한해서 인간의 학습능력의 차이를 비교했을 때 타당한 이론이다. 그가 주장한 이론에서 모든 언어의 기저는 동일한 구단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영어와 한국어는 발화되는 방식만 다를 뿐 그것이 발현되는 언어의 밑바탕은 같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게 근본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왜 싹의 트임은 한 시기에 국한돼서 결정되느냐는 거다. 그 밑바탕이 충분하면 어느 시기든지 다른 언어를 수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하여금 반증을 내세울 수 있다.



처음에 어떠한 모국어를 맞이하느냐에 따라 다음에 익히는 언어의 싹을 틔우는 것은 쉬울 수도 있고 더딜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국어의 싹을 틔울 때의 사고 습관과 관습이 비슷한 환경의 언어라면 받아들이기가 이질적이지 않겠지만, 사고방식과 주입 환경이 완전히 다른 언어를 익힐 때도 외국어라는 국한된 형성만을 가지고는 모국어와 같이 또렷한 심상을 남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노래가 먼저 발생되었겠는가, 말이 먼저 생성되었겠는가? 대부분 말이라고 대답하겠지만, 혹자는 타잔을 떠올리면서 노래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맞다. 노래가 60만 년 이상 먼저 불러졌다고 고고학에서 말한다. 지금처럼 음정과 박자가 필요한 노래는 아니었더라도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놀라서 고함을 지르거나, 위험의 경고음을 내거나, 싸울 때 괴성을 지르거나 하는 거는 침팬지나 고릴라에게서도 관찰할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기능 중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말을 액면 그대로만 주고 받아들이면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가 힘들다. 언어행위 이전에 그 발화를 유도한 상황이 먼저다. 어떠한 말과 글도 그것들이 필요로 하는 상황이 안 일어나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인간이 언어 학습을 하면서 일차적으로 배우는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말이 일어나는 상황을 감지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만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얼굴을 웃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동인을 먼저 인지할 줄 아는 게 인간의 학습능력이다. 아기가 어릴 때는 떨어져서 부모 누구를 보더라도 엄마, 아빠를 분간 못하는 것은 동인을 구분 못해서이다. 얼굴이 뚜렷이 분간되는 순간 아이는 바른 호칭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수반되는 상황이 없다면 발화될 수 있는 기저가 없어진다. 인간이 대화를 나눌 때 그때의 전황과 상대의 반응이 계속 말을 이루어지게 하는 전부이지 대화는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말을, 저런 반응에서 저런 말을 내뱉게 되는 신호에 따른 발성에 불과하다. 그 신호에 대해 민감할수록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본인의 의도를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 사오정이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음 상황에 대한 추측이 너무 더디어 혹은 너무 빨라서 상대의 예상과 달리 낯선 언어를 지어내기 때문에 일컫는다.


그래서 아이를 영어적 상황에 일찍 노출시키기 위한 학습을 꼭 비싼 사립유치원에서 해야 하는가? 아니면 꼭 13세 이전에 외국에서 할 수 있도록 자식 교육에 헌신해야 하는가? 시중에 많은 영어 조기교육 학습자들 중에 영어권 국가 물을 일찍 마셔서 자라서도 한 영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순수 토종파들의 실력파도 제법 많다. 영어만을 위해 조기 유학 보내는 것은 자녀에게 어떠한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함인지 학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잠깐 다녀온 주위 사람들 중 딱히 한국의 천편일률만을 강요하는 교육환경에 재적응한 사람도 드물었다. 외국에 눌러살아서 다른 문화 관습이 배인 아이라면 그 나라에서 성공하게끔 조력할 계획이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한국에서 최대한 아이의 방향키를 조종해주는 게 아이의 정체성 문제에 혼란을 막을 수 있다.



대한민국 대다수의 극성 부모들처럼 자녀 영어교육에 올인하다시피 하는 교육열은 낯간지럽기도 하지만 그것을 선도하는 학원 교육계의 특히, 사립유치원의 원아 유치 풍문은 치를 떨게 만든다. 당신들이 교육시키는 원아 양성은 엊그제 IBM과 모 국내 IT업계에서 베타 테스트한 인공지능 상담자와 다름 아니다. 주어진 데이터의 확률만 따르는, 당위성과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로봇을 교육시키는 것과 같다. 애들이 영어가 한국어보다 모국어처럼 느끼게 해주게끔 만드는 한국 사회의 폐단이다. 차라리 여타 아시아 국가들처럼 영어 공용화를 시행해서 자연스러운 공영어로 받아들이는 게 어떤가? 토플, 토익 점수에서 매번 하위권 국가에 머무르는 투자 대비 손실이 엄청난 교육으로 아이들의 세계관을 지리게 할 바에는.



그래서 어릴 때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돈 많은 사람들에게도 당신은 자녀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교육받는 게 시간낭비라듯이 외국까지 보내면서 교육시켜야겠냐고 묻고 싶다. 한국에서 외국어 교육시켜 줄 수 있는 부모의 관심과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영어권 국가 혹은 극성 학부모들을 노린 유치원 주머니에 큰 돈 안 집어넣어주고도 걔네들보다 영어를 더 영어답게 하는 정상적인 한국인들이 많이 자라날 수 있다. 김현수 양처럼. 김현수 씨가 비록 교육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어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었더라도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여건 조성은 해줄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중학교 때 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영어시험 만점을 받고 각종 대회 우승을 하고도 그 또한 한국 영어교육의 기이함을 지적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각의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