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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Jun 18. 2016

자각의 차이

동서양이 사물을 접근하고 받아들이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간 군상


당신이 삼십 대든 오십 대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기준은 두 가지면 판가름 난다. 신체의 혈액검사와 두뇌의 자각력이다. 피검사를 통한 혈액의 건강지수를 통해 신체나이를 알 수 있고, 치매검사를 통해 두뇌의 유연성과 정신연령을 측정할 수 있다. 그중 동양인 특히, 성리학의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사고가 조선시대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한국인이 상황이 긴박하지 않은 경우에야 서양인처럼 안전지대를 벗어나기보다는 안정된 삶에 안주하기를 원하고, 한때 권위주의와 수직문화에 저항했지만 결국 획일적이고 지배적인 기성 문화에 편승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세기를 원수 보듯이 라이벌로만 생각하는 이웃나라인 일본은 노벨상을 분야별로 수십 개 탔지만 왜 유독 한국만은 평화부문 딱 한 개를 제외하고는 단 한 개도 못 받는 나라일까?



엊그제 한국의 소설가 한강 씨가 영국 출판사에서 수여하는 *맨부커상을 탔다. '채식주의자'라는 소설로 유럽인들의 기호에 잘 맞게 번역한 한국학과 전공자인 영국인, 데보라 씨와 함께 공동 수상하였다. 여태껏 한국이 문학에서 노벨상을 못 타는 궁극적인 이유가 한글 고유의 뜻이 외국어로 쉽게 번역이 되지 않아서라고 했었는데, 그녀와의 공동노력으로 인해 앞으로 노벨문학상까지 기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한국의 위상이 세계에서 제고된 만큼 한국에 대해 알려는 외국 유학생의 증대가 어쩌면 국내에서는 대중에게 큰 인지도가 없었던 한강의 소설이 가까스로 유럽, 미국 시장을 통해 한국 출판시장까지 단비를 뿌려준 셈이다.


데보라 씨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Vegetarian'뿐만 아니라 '소년이 온다'도 외국에서 판매부수가 증대했는데 번역본은 한강 씨가 처음 소설의 의도했던 의미 그대로 유럽인에게 전달되었을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외국인이 한국의 광주사태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저변에 깔려있지 않고서도 이 소설의 근간과 실제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아무래도 한국인 독자보다는 힘들지 않겠나. 하지만 한강 씨가 채식주의자를 통해 나타낸 자신의 문체가 영어로 새롭게 각색되었을 때 받아들여진 외국인들이 느낀 바는 한국인들보다는 좀 더 의미 있고 기호에 맞았기에 한국보다는 유럽에서 더욱 쉽게 통하지 않았나 싶다. 하나의 책에 대한 독자의 이해는 저자가 처음 의도하고 집필한 기획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저자의 문장을 떠나서 단지 독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 그리고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가치관에 읽는 이가 수렴되어 있느냐의, 순전히 보는 이의 패러다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에서 읽힌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는 유럽인이 현재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 그리고 그 저변의 윤리와 가치관에 따라서 판단된 또 다른 문학으로써 읽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자각 방식과 한국인의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들이 현재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당위 의식은 현재 한국인의 그것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처해진 사회환경과 시대 흐름이 각 나라의 문화와 윤리의식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바는 동서양인의 어릴 적 교육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물을 접근하고 다시 생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이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가설이 아니다. 하나의 논제이다. 이것이 동양인이 가장 쉽게 내는 일반화의 오류다. 바로 참이다, 거짓이다라고 판단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의 명제로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하는 것이다.


범주화(Grouping; Categorization), 이것이 무엇인가?



서양인에게 당연하지만 동양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고 습관으로 인해 서양인이 바라보는 입장에서 가장 납득이 안 가는 특히, 한국인의 사고 흐름이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모르겠어도, 중학교로 들어서면서 교과서가 눈에 보기에는 초등학교(저자가 6학년일 때 일제 잔재어 제거의 일환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때의 책보다 정말 밥맛없어 보였다. 책을 펼치기가 마치 '이것이 중학생 수준의 고리타분한 생김새의 책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하게 보였다. 하물면 초등학교 때도 사회 교과서 앞 페이지의 사진 몇 장과 사회과부도라는 별책처럼 만들어진 교과서의 세계지도와 각종 통계자료를 제외하고는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코딱지만큼도 없었는데, 중학교 교과서는 정말 그냥 컵라면 먹을 때 위에 덮는 용도로는 제격이었다. 딱딱하고 종이 색상도 '똥색' 아니었나? 이러한 중학교 교과서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하나의 주제로 범주화하면, "중학교 교과서는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정도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게 너무 안된단다.



왜냐하면 중학교에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교육은 교과서에서 규정한 가치 명제 그리고 교과서에서 획일적으로 결론 내어진 당위 명제들의 즉, 각종 이론들의 주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제들을 일반화시킨 주요한 사실자료와 경험은 등한시 한채 교과서에서 알아서 범주화하고 분류화된 이론대로 학생들의 말랑말랑했던 머리들을 딱딱하게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것이 학교교육이 학생들을 사육하는 기본 명제다. 즐기기는 즐기고 싶은데, 공부라는 것은 한량하게 즐기면서 할 놀이가 아니다는 인식이 안 그래도 가기 싫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파김치로 만든다. 그러한 강압적인 교육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한국이다.


한국 교실에서는 지구과학 시간에 선생이 칠판에 빽빽이 암석의 종류대로 정의와 세부 분류를 판서한다. 암묵적인 동의 하에 학생들은 깨끗한 노트에 누가 더 깔끔하고 눈에 도드라지게 필기하느냐에 따라 성적순위를 매기듯이 칠판의 내용을 보통은 베껴 쓴다. 따라 적는 행위를 하는 동안 뇌가 기지개를 켜며 모르는 지식은 체에서 걸러지고 이전에 쌓여있던 배경지식과 관련된 지식이면 한 번 체에 낚여서 약간은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머문다. 다만 그 기억이 시험기간까지 연장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주입이 더 필요하고 이러한 학교생활에서 모범생과 낙제생으로 분류되는 암묵적 꼬리표에 따라 학생은 노트를 한 번 더 보기도 하고 안보기도 한다. 선생이 암석의 계통분류를 인과관계에 따라 세분해주는 설명을 할 때, 이 선생과 나의 관계가 나쁘지 않아서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뇌에 각인된 운빨로 시험에서 한 문제 정도는 더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오지선다형에서 잘 찍는 것도 실력 아닌가.


서양의 중등교육은 학생들을 그나마 그들의 본성대로 배움을 이끌어 주는 방식이 존재한다. 서양의 한 교실에서는 먼저 실제로 다양한 암석들을 만져보게 하고 스스로 어떻게 판별하고 구분 지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선생의 가이드로 이건 이렇게 해서 화성암으로 불려지고 이건 퇴적암, 이것은 변성암으로 통칭한다고 접근하는 방식을 이끌어준다. 즉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충분한 체험을 통해 일반적인 사고 흐름으로 범주화시키는 훈련을 선생이 코치한다. 선생은 코치나 트레이너이지 결코 학계의 전문가처럼 권위자의 이론으로 무장해서 학생에게 자신의 개똥철학을 피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개똥철학이라도 피력할 수준이면 대학의 강당에 서서 자신의 논리에 대항할 학생들의 비판을 각오하고 가르칠 교수가 되는 게 옳다. 비록 시험 형태는 한국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이들과 한국인의 차이는 여기서가 아니라, 바로 대학교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 갈라진다.



한국인은 자신의 논문 주제조차도 교수에게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면, 범주화 훈련에 익숙한 외국인은 이미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이 정해놓은 학문의 목표와 흥미로운 분야에 맞춰 전공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을 전제로 논문의 주제에 대한 접근도 쉽게 진작된다. 반면, 범주화가 까다로운 학생은 논문의 전개 방식도 보통 대다수의 한국 유학생의 문제점으로 삼는 논리적 취약성으로 드러난다. 어릴 적 교육으로 훈련된 사고방식,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동양인은 구체적 목적에 따른 계통 분류가 아니라, 객체 간의 관련성에 따라서 분류하는 경향이 크다. 즉, 목적에 맞는 범주화가 아닌 주어진 사물들의 관계성에 의미를 둔다. 이를테면 주어진 그림이 개, 소, 닭, 풀, 모이라면 서양인은 개, 소, 닭과 풀, 모이로 분류하는데 반해 동양인은 소와 풀, 닭과 모이로 분류하는 경향이 크다. 전자는 상위 카테고리에 동물과 먹이로 분류되지만 후자는 명칭 부여(라벨링)가 안된다.



지정학적으로 동양인은 사는 동네에서 평판을 중요시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서도 주위 눈치와 평가를 통해 자신의 평판이 결정된다. 사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학생의 본성은 이미 환경에 의해 양육되어 있고 학교라는 곳은 유별난 이념이나 선생의 분위기 쇄신이 없을 경우, 입학과 동시에 결정되는 자신의 꼬리표를 바꾸기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서양권 국가에 유학을 가더라도 이미 논리싸움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실력 차이로 경쟁을 시작하는데 보통 대다수의 한국인이 해외유학에서 좌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한국처럼 다양한 종교의 개수를 가진 나라와 시비가 붙으면 자기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혹은 문제가 다른 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세계는 드물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일단 명제부터 내놓고, 그 명제가 어디서 비롯되었든 일단, 무조건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발언과는 시작부터 다르기에 자신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명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주위에서 잘도 주워들은 사례들을 또 서슴없이 들이대기 시작한다. 주변에 언변이 능하신 목사나 방송인들을 보면 일단 사실 근거는 제쳐두고 들으면 도널드 트럼프 못지않은 선동을 자아낸다. 그래서 젊은 청년들은 이유 없이 연배가 높은 어르신에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역시 나이는 지혜에 비례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격언에 공감하며 존중을 마땅히 표하는 거리라.


서양의 모든 학문의 근원지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든 이 시대의 인문주의(Humanism) 재생을 일컫는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의 작품을 통한 기성 종교에 대한 저항이든지 서양인들은 항상 눈으로 보고 '이성'으로 판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사흘 뒤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을 때 사도 토마스의 예수 몸에 난 상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 위해 상처가 난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엽기적인 기행이 명작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그를 그 시대의 불신자로 배격되지 않고 오히려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믿을 수 있다는 '이성'의 촉발로 대표되었다.



서양의 객관적이고 이성적 논리를 중요시하는 세계에서는 증명되지 않으면 어떠한 진리라도 단지 궤변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시대 철학자들은 자신의 관점대로 이론을 쓴 후, 모임에서 자신의 의견을 검증받기 위해 토론하는 문화가 일상이었다. 기존의 이론과 유추해서 이끌어진 연역적 추론이 없거나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증명된 귀납적 추론이 없다면 어떠한 명제와 종교도 사이비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종교의 다양성이 서양의 것보다 오히려 더 다양하게 발산했다는 점에서는 개방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논리적 잣대보다 감정적인 이유로 자신보다 열악한 집단이라며 배타적이고 차별하는 한국인 세계관의 옹졸함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잔재가 아직까지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또한 이것이 한국 학계에서 서양 위주의 세계사 이론에 대해 겨우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제국주의의 관점과 뭐가 다른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으로 바뀐다한들 한국의 상하 수직문화가 서양의 제국주의 관점과 뭐가 다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 평화상만을 받은 기이한 나라, 대한민국!




주석

* 맨부커상(Man Booker Prize for Fiction)은 영국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그 해 최고 소설을 가려내는 영국의 문학상으로서, 전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발췌-위키백과 한국어)




참조(APA style)

Nisbett, R. E. (2011). The Geography of Thought: How Asians and Westerners Think Differently-- And Why. London: Nicholas Brealey 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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