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와 비판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마추어의 서글픈 글
누군가에게 힐난을 받아서 마음이 휘둘린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반감에 자신의 감정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인간이라서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물론이다. 하지만 여론의 자유가 첫 번째인 글의 세계에서 누군가에게 비평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글이 이미 누군가의 감정을 흔들었다는 거다. 그 동인이 누구한테는 비판해주고픈 매개로 전달되었으면 본인 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은 기대하기 힘들다.
글은 왜 쓰는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따라 쓴다. 그러한 함의가 없다면 내 감정의 설득하고픈 욕구를 꺼낼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굳이 인정만 받으려 글을 쓴다면 자기가 쓰는 글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누군가 나의 글을 보고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가치를 논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 자유가 조금 지나쳐 본인이 사색한 내용에 빨간 줄을 긋거나 지나친 비난을 하는 것은 물론 예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익명의 안티 댓글이라도 자신의 글을 통해 타인에게 일으킨 파장의 책임은 엄연히 글쓴이에게 있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였던 부정적인 여파였던 간에 타인의 입장에서는 고까울 수도 있다. 힐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곱씹어보는 것은 자신의 글에 그만큼 자신감이 없다는 방증일 뿐이다. 이 세상이 모두 자신의 편인 사람들과만 산다면 과연 치열한 경쟁을 통한 발전이 존속될까?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에게 가장 부름을 많이 받았던 부오나르티 미켈란젤로조차 자신을 폄하하는 비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 거장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작품에 비평가를 삽입하여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긴 모티프를 그려 넣었다. 그 시대에 자신의 초상을 작품 속에 넣는 일이 화가들에게는 흔했으나, 미켈란젤로는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타화가들처럼 근엄하지 않고 살해된 유해에서 혹은 못생긴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비약으로 하여금 르네상스 예술 부흥기의 중심에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이상을 쫓으려는 욕구보다 이미 더 오를 곳이 없었던 거장의 여유를 표출했던 것이다.
어떠한 시대를 통틀어도 위대한 창작품의 거장으로 거듭난 위인들 중에 수많은 비평과 비난에 고충을 겪지 못한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러한 힐난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고 결국 사후에서라도 자신의 성과물에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판게아 이론을 주장했었던 알프레드 베게너, 원시 미술의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었던 고갱, 의식의 흐름이라는 난해하고 긴 문체로 새로운 소설 기법을 창작한 제임스 조이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창조적 분야에서 수없이 많은 위인들이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조차 비평과 심지어 생전에 인정까지 받지 못했지만 훗날에 진가를 인정받은 사례가 수룩룩하다. 그런데 글로벌 시대에 이 비좁은 대한민국에서 배아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학 한 번 해줄 여유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폄하에 대해 진지하게 글을 쓰는 작가들을 보면 역시 대한민국인이구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의 자유는 정부를 향해서만 지끄릴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비평받을 수 있는 건전하고 건강한 여론을 향해 외쳐져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