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홍상수
한때 서울의 한 독서모임 단톡방에 홍상수 감독에 대해 핫한 논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인생은 홍상수'라는 메시지를 던졌는데 필자의 뇌리를 아주 관통하고도 남는 말이었다. 그때 이후로 인생은 새옹지마 혹은 홍상수라는 말을 되뇌는 걸 자주, 그것도 스스로 느끼곤 한다.
설연휴를 맞아, 독서 여행을 위해 리스트로 모다 놓은 책 서너 권을 읽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제목의 두 권을 정독했다. 저번 주 금요일 밤에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저께부터 밀라노 동계올림픽 중계를 기다리면서 짬짬이 본 '스토너'.
지금이야 한국 컬링 국가대표팀의 설예은과 같이 영어권 국가의 이성과 사귀거나 결혼하는 동양인이 많은 세상이지만,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을 통해 서재필은 동양인 남자가 1890년대에 그것도 당시 31세였던 그는 24세의 명문가의 미국 여자(뮤리엘)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조선(한국이 아니라, 아직 일제 식민지 시대 이전의 조선이다.)의 황진남은 파리의 여인(일명, '파리 센')인 프랑스 여자가 부인이었다.
어느 테드(TED) 강연의 연사자로 중국의 한 남자가 나와서 아시아계 남자가 서양의 여자와 결혼한 통계수치가 가장 낮다며,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부인(미국 여성)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도입부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1890년대에 서재필(필립 제이슨)은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칼럼비안 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당시 미국의 의사가 된다.
그와 결혼한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의 아버지는 제임스 뷰캐넌(미국의 15대 대통령)의 사촌으로 철도우편국장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워싱턴포스트>지에도 실린 만큼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한국이 서구권 문화에 개방하기 한참 전인 1890년대(당시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열강들 사이에서 10년이라는 짧은 제국의 격동기를 거침)에서 오로지 뛰어난 학습력(서재필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최초의 영한사전을 출간하기도 전에 스스로 영어사전을 만들었다고 함)과 재능으로 미국 상류사회의 여자와 결혼한 것이었다.
동양인이 서양인으로부터 차별을 받고도 남을만한 시대, 미국에서는 흑인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그 시대에 동양인인 서재필은 미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의사가 된 뒤, 그들의 수업문화 중 하나인 토론 문화(한국은 아직까지 토론수업 자유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21세기를 한참 지난 시점에도;)를 조선의 청년들에게 처음으로 교육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필자는 한국이 주입식 교육의 대표적인 나라로만 손꼽히는데는 일제식민지의 잔재가 크다고밖에 단정 지을 수밖에 없겠다. 나라를 잃는 것만큼 분한 게 없다는 애국자들이 차고 넘치던 1900년대 초반의 조선시대에 서로 토론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심지어 양자역학까지 서민들에게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 부속 평생교육관의 '세미나' 형식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러 다닌 지식인들도 있었다.
한국인의 조상들은 남달랐다는 말로 결론짓기에는 필자가 교실에서 배운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조선과 너무나 다르다. 교과서조차 일제 잔재가 현대시대까지 완전히 뿌리 뽑히지 못한 채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게 오히려 앞뒤가 맞는 거 같다. 역사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통해 피상적으로 암기만 하던 연대기적 사건은 아무런 깨달음을 남기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나온 조선의 지식인들의 수준은 현대 학생들에게 세속적인 교육만을 퍼붓는 교육자들과는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고, 오히려 그 선조들이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상상까지 했다.
반면, '스토너'는 1965년에 출간된 미국의 장편소설이다. 과학과는 다르다면 너무나도 다른 문학계 교수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인생에서 성공을 목적으로 살 필요가 있는가, 즉 책 속에서 주인공인 종신교수(지금으로 치면, 이미 성공한 지위)인 스토너의 독백 '그래서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말이었다.
현대사회의 경쟁 지상주의 관점에서는 실패자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스토너가 기실 작가로 하여금 그야말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일깨워준다.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칠 수 없는 대학교 계파/학파의 파벌 싸움의 진흙탕 속 학계에서의 갈등과 사랑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세밀히 묘사한다(사춘기 때 보기에 딱 좋은 책이다).
이런 책은 필자로 하여금 잔잔한 여운을 남길 망정, 사실 필자의 모습도 '스토너'라는 캐릭터와 닮았다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사회에서 굳이 누구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가고, 사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또한 하고 싶은 일이기에 성공한 삶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도 항상 주입하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제는 정신적으로 ‘개화(?)’할 때가 오고도 남을 시대가 아닌가? 21세기에 아직도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 TV에서 방영되는 토론 서바이벌이 반드시 논리적이지만 않고, 감정적으로 번져서 결국 한국특유의 '목소리크기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을 즐길 시대는, 이젠 정말 아니라고 본다.
필자가 서두에서 언급한 독서모임 단톡방에서, 누군가 '인생은 홍상수'라고 말할 때,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키워드가 어색해하지 않고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에만 갇혀서 반드시 그를 정상적인 사회 일원에서 떼어내기만을 복종시키는 사회(=공산국가)는 지나간 거 같다. 소설의 '스토너'처럼, 인생은 반드시 획일적이지도 또한 우리의 예상대로 성공만을 갈구하는 시대(=물질 자본주의)는 지나고도 한참 지났다.
각 책의 다른 브런치 작가의 독서 후기
1) 스토너, 존 윌리엄스
2)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민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