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그리고 다양한 세상의 철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만 35세가 지나는 시점,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이때, 문득 삶을 하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생애가 나날이 앞당겨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삶이란 여태껏 나에게 스스로 비롯되지 않았었고 부모님 훈계, 학교교육, 언론매체, 그 사람의 인격이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주변인들의 간언과 충고, 오래된 혹은 엊그제 출판된 책과 아울러 나보다 정신연령이 어른스러운 혹은 훨씬 어린 이들의 다분하거나 또는 신선한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모든 사유에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바라보도록 혹은 생각하도록 한 동인들의 집합물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일기를 쓰라고 하지 않았으면 어릴 적 일기를 썼을 리는 만무하다. 왜 일기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앞서 일기를 써서 학교에 제출하고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는 삶에 구속됐었기에 썼을 뿐이다(자신과의 대화를 누군가로부터 합법적인 도청을 당했다니 이런 몰자각한 시절도 있었구나).
바야흐로 필자는 이제 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고 일기를 쓸 수밖에 없는 시국이 엄습한 지금을 느끼고 있다. 나와 대화해서 작금의 나의 일상을 반추한다는 행위는 예를 들기 위한 설정일 뿐,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만약 내가 지금 결혼을 하고 자식이 있는 가장이었더라면, 직장이 싫던 좋든 간에 생계를 위해 그리고 처자식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얘기하고 싶은 거다(하지만 나는 지금 부모님 안위만 걱정하면 되는 처지다).
철학은 삶에서 왜 필요한가, 생각은 왜 끊임없이 해야 하는가라는 사유에 대한 고민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줄기차게 해왔었다. 그러나 그때는 막연히 철학이라는 거창한 문구가 씌워진 책들이 한 번 더 치르게 될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준비하거나 외국대학을 기웃거리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은폐된 소심함에서 비롯한 관심사였을 뿐이었다.
수학을 싫어했었던 학생이 철학이라는 같은 논리, 다른 카테고리의 매개체로부터 공부에서 멀어진 마음에 대한 안정을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름만 되뇔 때는 푸근하게 느껴졌던 여러 서양 철학자들의 책들을 도서관 한 구석에 서서 조용히 탐색했던 나날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내 삶에 어떠한 사유를 심어줬는지에 대해 오늘에 이르러서 그들에게 섭섭한 말로 답장해주고 싶다.
삶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내가 내린 첫 번째 당위 명제다. 철학이라는 사유의 방법을 학문이라는 엄정한 잣대로 포장한 이론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한시적인 실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어느 시점부터 공허(혹은 지루)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나이에 다다르면(보통 제2의 사춘기 때의 나이를 가리킨다), 이제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지금의 내상태가 이것을 증명한다). 여태껏 학교에서 이래라저래라, 회사에서 이렇게 이루어지도록 해라 말아라, 사회에서 이렇게 지켜지도록 만들어라 말아라 등의 모든 주입된 언어들에 의해 나의 삶을 도단하고 살았다면 이제는 이런 삶이 본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꼭 마음이 가라앉는 이 시기가 아니더라도 깨닫는 인간들이 이미 많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삶은 나 본위가 아닌 사회가 설치해준 빔 프로젝터라는 가공된 삶에 자신의 미래를 투영하는 영속성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인류가 지금까지 역사를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는 그 인간이 알고 있고, 보고 싶고, 바라고 원하는 것에만 초첨을 맞추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삶을 투영하기 때문에 그것을 쟁취하던 못하든 간에 그렇게 투영된 세상이 마치 자신의 삶처럼 느껴져 주게 하기 때문이다. 두뇌의 가소성은 인간이 눈을 뜨면 마치 하나의 가상세계에서 자신이 설정(프로그래밍)한 삶이 보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실을 직면하게 해 준다. 그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은 설정하는 데 필요한 세상들의 지식과 경험을 얼마나 많이 터득하고 그것을 통해 구체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윌리엄, 2007).
만약 모든 인류가 전멸하면 세상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일개의 두뇌가 단 하나도 없다면(공룡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가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그 세상이 존재하든 안 하든 인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후의 인간이 눈을 감으면 그것과 동시에 세상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치 명제이다. 그러면 만약 인류가 단 한 사람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아침에 눈을 떠서 맞이하는 세상은 그의 두뇌가 알고 있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두뇌로부터 구체화된 하나의 세상(이데아)이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포괄적인 세상(사이언스 북스 시리즈의 '빅 히스토리'의 애호가들이나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절반 이상 이해한 과학도들에게는 개소리로 들릴 수 도 있겠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그런 인간의 개체 수를 현재 인류의 인구수만큼 늘렸다면 달라지는 건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인류가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삶은 단 하나의 집합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두가 같은 단어인 ‘삶’을 말하고 있더라도 그 ‘삶’은 같은 삶이 아니라는 말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사실 명제이다. 각자의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상의 인간들은 나 이외의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동등한 집합소로 여기고, 철학자들이나 머리에 피가 마른 사람들이 그들의 철학과 사유를 전파하는 것 자체가 엉터리이다라는 것이 내가 짚고 싶은 첫 번째 의문점이다(지금 나의 말과 나의 삶에서 사유된 이 발상 또한 나에게는 철학이 될지 몰라도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는 모순일 뿐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나의 생존에 위기감을 느꼈을 때 이러한 의문점을 캐고 있다. 그렇다고 나의 세상에서만 떠도는 삶을 살더라도 굶어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도입부에서 말했었던 내가 발상해내서가 아닌 이외의 것들의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동인으로 비롯된 삶 속에 나의 실제 삶을 뒤죽박죽 쑤셔 넣지 않고 살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고상한 명판으로 점철한 단어에 대해 계속 의문을 던져야 한다(두 번째 당위 명제). 왜냐하면 내가 죽는 순간 이후로도 진행하고 있는 타인들의 그 삶들은 나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이 인류의 세상도 자신에게는 종말과 똑같다. 본인의 자아가 죽는 거, 본인의 사유가 끝이 나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단군시대부터 이어져온 역사가 당신이 죽는 순간으로 인해 종지부가 찍히는 것과 다름없다. 당신이 죽으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미래는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그 이후라는 것은 이 시대의 미래가 아니라, 이미 종지부를 찍은 역사의 버퍼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당신의 사유만이 당신의 전부 아닌가! 당신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죽은 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뭐가 다른가?
도스토옙스키라는 소설가가, 마르크스라는 사상가가 본인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고 사유를 계속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비단 똑같은 단어로 불리지만 다른 ‘삶’ 속에서 자신의 꿈을 계속 투영하고 있는 청년들이 바야흐로 장년으로 넘어가는 기점이라고 일컫고 싶다(두 번째 가치 명제).
인생은 슬프다는 마지막 당위 명제가 내가 본격적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내 사유의 바탕이다. 왜 슬프냐면 인생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인간의 생은 죽음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합쳐서 말해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삶을 사는 인간은 죽기 싫지만 결국 죽어야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은 슬프다. 나는 아직까지 죽고 싶어서 자살했다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단두대에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나 본인의 의사로 안락사로 죽은 사람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내지르는 비명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인류와는 또 다른 역사의 종지부를 이미 찍은 사람들에게 죽고 싶어서 죽으셨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스무 살, 도서관 귀퉁이에서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오던(보고 싶은 것만 보이던) 책의 철학자 이름은 ‘쇼펜하우어’였다. 이름만을 곱씹어봤던(알고 있는 것만 알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음악가 슈베르트와 비슷한 음감처럼 느껴져서 아마도 젊고 산뜻한 기운을 가진 철학자겠지라는 심상을 가지고 그의 책들을 훑어봤었다. 그런데 서른 무렵,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의 대표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그의 초상화를 보게 됐을 때 실망을 금치 못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픈 아이도 정신 차리라고 싸대기를 날렸었던 교감 선생님의 고약한 이미지에 일본 격투기 게임에 나오는 헤이하치와 같은 헤어스타일을 가진 할아버지가 염세적인 철학론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고 말이다. 염세는 비관주의에서 빚어져 나오는 현실을 그러니까 지금의 나처럼 민낯 그대로 벗겨내는 철학이었다. 맞는지 모르겠다(어쨌든 내가 전개하는 바에 따라 풀이했고 염세주의가 냉소주의와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백세, 백이십 세 시대가 도래하면 뭐하나. 한 개인이 구가하는 삶의 스펙트럼은 차상위 계층이든 최상류 층이든 일정 시기가 다다르면 지루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뜻밖의 불의의 사고가 없다면). 그리고 어느덧 내 주위의 누군가로부터의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시기에 다다르면 ‘죽음’이라는 문턱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모든 사람은 죽고, 죽고 나면 일개의 세상은 사라지므로 날 때부터는 다른 삶을 부여받았던 모든 인간들에게 죽음은 공평한 산물이다) 절망의 크기로 다가갈 것임에도 틀림없다. 하지만 이 민낯 그대로 서서히 다가오는 두려움을 멀리하며 인간들은 각자의 삶에서 서로 다른 취기로 오늘도, 내일도 살기 위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취기’라는 말로 표현한 나름 행복한 오늘(‘소확행’을 일삼는 하루)을 만드는 혹은 미래를 포장하고 있는 인류 모든 개체들의 두뇌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인류를 이미 정복한 기계가 잉태해줘 그 기계 속에서 배양되고 있는 인간들의 매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세상의 매개체(medium)와 같다. 내가 철학에 발을 들였을 때 처음 선택했던 책의 저자나 안내해줬던 사람의 사상이 역시 내 사유의 모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 같다.
이런 말을 떠들고 있는 본인도 내일 당장 죽지 않는다면 죽음이 과연 나의 삶에서 맞닥뜨리기나 할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마지막 사실 명제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공리). 인간의 삶은 각기 다른 취기로 포장한 삶을 마치 하나의 세상인 양 살고 있다(특수 명제). 그러나 결국 각자는 그 삶을 다 소진하면서 다시 하나의 공허한 상태로 귀결된다. 그것이 ‘죽음’이다. 처음에 내가 제시한 당위 명제인 “삶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와 같은 의미가 죽음이다. 나름 스스로 궤변을 해서 봉착한 것이 결국 삶이나 죽음이나 똑같다는 결론이다.
그럼 나에게는, 왜 죽어야 하는가는 곧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같다.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같다. 내가 스스로 삼은 명제를 토대로 나온 물음에 대해 다시 결론을 이끌어 내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인물, 카뮈의 자화상, 뫼르소가 보여줬던 인생의 ‘부조리’보다 더 부조리한 게 삶의 본질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실제로 슬프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슬픈 척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며 법정에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굽히지 않았던 뫼르소에게 "인생은 죽음처럼 자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게 현실인데, 그게 아닌 것처럼 너의 목소리에 계속 취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묻는 게 내 사유의 시발점이다.
참조
1) 윌리엄 더건, 제7의 감각, 전략적 직관, 황상민 저/윤미나 역(2018), 서울 : 비즈니스맵
2) Camus, A., 이방인(해설 나는 뫼르소다_뫼르소가 말하는 문체론을 통해 《이방인》 읽기), 최수철 역(2012), 서울: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