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사,자/장,원의 길
직업을 나타내는 많은 단어가 있다. 예전부터 존재했던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는 한자어가 많고, 상대적으로 최근에 등장한 직업들은 그냥 영어 단어를 쓰기도 한다. 한자어는 끝 자가 여러 가지인데, 어떤 때 어떤 자가 쓰이는지 혼자 생각하다 정리해 본다.
가 : 소설가, 작가, 번역가, 정치가처럼, '가'는 보통 조직에 속하지 않고 혼자 일하는 사람이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는 경우도 많다. '가'는 개인이 곧 브랜드이며, 결과물로 세상과 소통한다. '가'는 유명해질 경우 벌 수 있는 돈도 많지만, 유명해지지 못하면 고정 소득이란 게 없다.
수 : '수'에는 가수, 운동선수 등이 있다. '가'와 비슷하게 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정해진 출퇴근도 없고, 유명해졌을 때 업사이드가 크고, 반대로 유명해지지 못했을 때 다운사이드도 크다. 다만 '수'는 다른 직업보다 실력이 순위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그 순위와 얼마나 유명한지가 관련이 있다.
'수'는 '가'에 비해 좀 더 피지컬 한 면에서 역량이 결정되는 것 같고, 그래서 전성기가 길지 않다. 대부분의 '수'는 40대 전후로 '수'로서는 은퇴하고 새로운 인생 2막을 살게 된다.
사 : 의사, 변호사, 회계사, 미용사, 강사처럼, '사'도 개인의 역량이 중요한 직업이다. '사'가 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하거나, 적어도 많은 공부/연습이 필요하다. '가'나 '수'와 다른 점은, '사'는 고객과 직접 만나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을 지켜야 하고, 근무시간도 일반적인 직장인보다 길 때가 많다.
'사'는 혼자 일할 수도 있고, 조직에 속할 수도 있다. 조직에 속하더라도 개인의 성과가 명확히 구분되며, 정해진 월급을 받기보다 성과와 연동된 보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사'로만 이루어진 조직(ex. 법무법인, 여러 의사가 동업하는 병원)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조직은 실제로 돈을 벌어오는 '사'들과, 이를 서포트하는 지원 조직으로 구성된다. 조직을 만들더라도 실력만 있으면 언제든 독립할 수 있으며, 은퇴도 본인이 계속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미룰 수 있다.
자/장: '자'는 개발자, 기획자처럼 조직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사람을 주로 나타낸다. '자'로 끝나지 않더라도,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쓰는 직업은 상당수 여기 속하는 것 같다. (ex. 마케터, 디자이너, MD) '자'는 기업에 속해있으므로, 각자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해서 공동의 성과를 낸다. 따라서, 성과가 아무리 커도 벌 수 있는 수입의 업사이드가 한정되어 있고, 반대로 일이 잘 안 되었을 때도 기본 월급은 받을 수 있다. 같은 역할을 하는 '자'끼리도 모여서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이런 회사는 직접 소비자에게 무언가를 판매해서 매출을 내기보다는, 다른 기업의 특정 기능을 대행해 주는 B2B 아웃소싱 회사가 된다.
'자'가 조직 내에서 다른 사람을 이끌게 되면 '장'이 된다. 실제 조직을 이끌면 '팀장', '실장', '본부장' 등이 되고, 조직을 맡지 않더라도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면 '과장', '차장', '부장' 등으로 승진한다.
원: 가장 대중없는 게 원이다. 연구원은 '사'에 비슷하다. 연구원이 되려면 상당한 학문적 지식이 있어야 하고,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개인별 성과가 중요하다. 공무원은 거의 '자'라고 볼 수 있는데, 국회의원은 정치'가'이다. 경비원, 환경미화원은 앞에 말한 '가', '사', '수', '자/장' 어느 것과도 성격이 다르다.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봤는데, 대충 들어맞는 것이지 당연히 예외는 많다. 예를 들어, 검사는 '사'지만 커리어 초기 상당 부분은 '자'나 '장'과 비슷할 것 같다(검사가 돼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검사가 나중에 조직을 떠나 변호사로 독립하게 된다면 확실한 '사'가 된다. 바둑 기사는 '사'로 끝나지만 '수'와 더 성격이 비슷하다. 반면, 전기 '기사'는 같은 기사지만 '사'에 더 가깝다. 교사는 '사'지만 딱히 보상이 성과와 연동되어 있지 않다. 교수는 '수'지만 운동선수보다는 교사와 비슷한 점이 더 많을 것 같다. 사업가는 '가'지만 사실 '장'(사장)이라 봐야 하고, 자기 자신이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 회사가 얼마나 알려지는지(인정받는지)가 중요하다.
직업, 커리어를 선택할 때 '어떤 일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조건에서 일하는가'도 중요하다. 그게 방금 말한 카테고리(가,수,사,자/장)이다. 뛰어난 개인이 되길 원하는지 또는 팀으로 일하길 원하는지, 잘 됐을 때의 업사이드와 안 됐을 때의 다운사이드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에 따라 선택할 직업이 달라지고, 같은 직업 내에서도 어떤 형태로 일할 것인지가 달라진다. (ex. 대학병원 의사 vs. 개원의)
당신의 직업은 가,수,사,자/장에서 어디에 가까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