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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학 Sep 09. 2018

몰입에 관한 생각 정리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들을 읽고

요즘 몰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2017년은 '조직문화' 키워드가 유행이었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과 삼성전자의 '님'자 호칭 도입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조직문화는 올해도 주요 관심사지만, 관점이 몰입으로 옮겨간 것 같다. 즉, '수평적 조직문화가 대체 뭔가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는 질문에서,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면 직원들 몰입도가 올라가나요? 직원들이 몰입할 수 있는 문화는 어떻게 만드나요?'라는 질문이 주가 되고 있다.


추측컨데 거기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건은 주 52시간 근무 도입이다.


몰입에 대한 책을 읽고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며 미루고 있었는데, 머릿속에 있는 내용이 사라지기 전에 한번 정리해야겠다.



몰입하면 어떻게 되는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 그래서 몰입의 순간에는 거의 반드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1.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몇 시간이 지나있다.

아침에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관찰을 시작한다. '이제 점심 먹을 때 됐나?' 싶은데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나있다.


2. 찰나의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지나간다.

운동선수들이 결정적인 기술을 선보일 때 관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선수 본인에게는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껴진다.


3. 시간을 매우 정확하게 인식한다.

외과의사들이 수술을 하면서 '아마 시작한 지 15분 지났겠군'이라 말한다. 실제로 15분 플러스 마이너스 5초 정도 지났다.


몰입의 순간에는 본인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느낀다. F-1 레이서들을 생각해보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고 코너를 돌고 다른 차들을 추월하면서도 자기가 운전하는 차를 완전히 통제한다고 느낀다. 일반인들은 달리는 차를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차다. 외과의사들은 잘 알아채기도 어려운 디테일에서 수술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몰입하는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거의 그대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암벽등반 전문가는 벽 아래에 서서 목적 지점까지 어느 돌을 잡고 어느 틈을 디딜지 하나하나 그린다고 한다. 외과의사들도 환자 몸에 칼을 대기 전에 앞으로 자기 눈 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질 것이며 어떻게 집도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그리고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일에 몰입하다 보면 그 일을 해내는 본인만의 방법이나 도구를 개발한다. 파타고니아는 원래 어떤 암벽등반가가 기존 업체들이 만든 등반 도구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자기가 쓰고 싶은 도구를 새로 만들면서 시작된 회사다. (그러다 자기가 만든 도구가 자기가 사랑하는 산을 오히려 망가뜨린다는 생각 때문에 아웃도어 의류 업체로 전환한다) 요리사들도 어느 단계에 오르면 자기가 쓰는 칼이 정해져 있다. 



어떤 환경이 몰입하기 좋은가?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푹 빠지는 걸까? 몰입 경험의 핵심은 '자아의 성장'이다.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이 있다.


1. 도전의 난이도와 본인의 기술이 거의 비슷하다.

본인의 기술을 100%에 가까이, 혹은 그 이상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도전에 맞닥뜨려야 몰입이 일어난다. 도전이 너무 어려우면 포기해버린다. 도전이 너무 쉬우면 몰입할 필요가 없다. 이런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적절한 난이도의 도전을 맞아 그 일을 해내면 기술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계속 같은 난이도의 도전이 주어진다면 어느 순간 그 일이 너무 쉬워져 버린다. 도전의 난이도가 점점 더 올라가야 한다.


2.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는다.

본인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은 (예를 들어 스포츠) 일 자체가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제대로 못했을 경우 방법을 조금씩 바꿔가며 바로 시도할 수 있다. 어떤 일은 (예를 들어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 실행과 결과에 시점 차이가 있다. 이럴 땐 일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경험이 쌓인) 사람이 일의 진행 과정에서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3. 강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칙센트미하이는 본인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도전을 맞아 기술을 키우는 것이 몰입 경험의 핵심인데, 강점을 쓸 수 있어야 이러한 성장의 순간을 더 쉽게 느끼기 때문이다. 강점을 발휘하려면 도전과 피드백은 명확하되, 도전을 해결하는 방법은 본인이 고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몰입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전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본인만의 방법이나 도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


앞서 이야기한 것들을 뒤집으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1.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운 일

기술 수준과 비슷하거나 살짝 높은 난이도의 도전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면 난이도가 올라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달인들은 사실 거의 같은 일을 수년 째 하면서 완성도를 높인다.


2. 피드백이 없을 때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기술을 연마하고 성장하기 힘들다. 시도 -> 피드백 -> 학습이 성장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 자체에서 피드백을 받지 못할 경우 주변의 누군가가 올바른 피드백을 적시에 주어야 한다.


3.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때

몰입하면 본인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느낀다. 반대로 본인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껴지면 몰입이 깨진다. 그래서 상사나 손님이 아무 때나 찾는 상황에서는 몰입할 수 없다. 


그리고 몰입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자신만의 방법이나 도구를 해결하는 것이라 했다. 여러 시도를 하면서 본인만의 최적화된 노하우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마이크로 매니저가 특정한 방법에 집착하면서 다른 시도를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마이크로 매니저는 상황에 대한 통제감을 없앰으로써 몰입을 방해한다. 


4. 외적 인센티브 

보너스를 더 준다고 사람을 몰입시킬 수 없다. 많은 심리학 실험에서 증명되었듯이 오히려 사람 정신만 분산되면서 몰입에 방해가 된다. 타인의 인정도 몰입과 연관이 없다. 몰입 경험은 오직 자아의 성장, 일을 더 완벽하고 아름답게 마치는 것에 있다. 


재밌는 건 진정한 전문가들이 오히려 사람들 눈에 철저히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디트 중간 어딘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찾을 수 있는 이름들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은 누가 진짜 선수인지 안다. 몰입해서 완벽하게 일할 때는 일반인들이 이 사람들의 이름을 들을 일이 없다. 뭔가 문제가 터지면 그제야 일반인들도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면 '인비저블'(데이비드 즈와이그)을 읽어볼 것.



회사들을 위한 시사점


몰입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두서없다)


1. 몇 시간 일했는지 집착하면 역효과만 난다.

주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몰입과 생산성에 관심이 생긴 거 안다. 하지만 몇 시간 일했는지 직원들이 신경 쓰게 만들면 오히려 몰입도가 떨어진다. 대기업들 중에 출퇴근할 때 카드 찍으면서 이번 주에 몇 시간 일했는지 분초 단위로 시스템에 뜨는 곳들이 있다. 내 마지막 직장이 그랬는데, 나는 아마 일주일에 평균 45시간도 채 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금요일에 출근카드를 찍자마자 내가 오늘 몇 시에 퇴근하면 40시간을 채울 수 있는지 계산한 다음에 점심시간부터 빈둥거리다 세시 전후로 퇴근했다. 짧게 일해서 행복했을까? 그랬다면 아마 지금도 그 회사를 다니고 있었겠지.


요즘 시대에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주어진 도전과 자신의 스킬 향상(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역설적으로 직원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사측 입장에서 정신 교육하는 꼰대처럼 들리더라도 직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적당히 빈둥거리며 일하다가 워라밸 좋게 칼퇴근하는 회사 오래 다니면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오히려 떨어진다. 본인의 스킬을 발휘하고 성장시킬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퇴근 후에 뭔가 도전적인 일거리를 자발적으로 벌인다. 회사는 원래 적당히 시간 때우는 곳이 되고, 퇴근 후에 진짜 성장이 있는 삶을 산다. 그러니 당연히 더 빨리 퇴근하고 싶고, 회사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게 꼭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일하는 시간에도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더 낫지 않을까?


2.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 좀 내버려둬라.

굳이 내가 어느 후보에 투표했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이번 정권이 잘하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일은 안 할수록 좋다'는 분위기를 은연중에 만드는 것이다. 보통 '친기업'이니 '반기업'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데 이번 정권은 '반노동' 느낌이다. 국가 정책으로 모든 국민이 일찍 퇴근하게 되면 정말 더 행복해지나? 정책이나 전반적인 마인드에서 '일은 적게 할수록 좋은 것', '돈을 받은 시간만큼만 일할 것' 같은 메시지가 느껴진다.


이 사람들이 데모하던 시절, 방직공장에서 합숙하며 하루 열두 시간도 넘게 위험한 환경에서 단순 작업하던 시절이라면 그런 마인드가 필요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직업, 어떤 회사는 그다지 환경이 나아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라에서 일괄적으로 누구든 52시간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정하는 게 문제의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 자기가 몇 시간 일했는지에 예민하게 만들면 몰입에 방해가 되고 만족도가 떨어진다. '이제부터 52시간 이상 일할 수 없으니 예전보다 몰입해서 생산성을 올리세요'는 몰입이 뭔지부터 이해를 제대로 못한 사람들의 발상이라 생각한다.


3. 일이 너무 쉬워도 너무 어려워도 문제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발언을 계속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직장에서 충분히 도전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 의심이 된다. 일이 많은 것과 일이 도전적인 것은 다르다. 그리고 취업준비생과 커리어 초반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는지도 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도 그럴까?


출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나라 성인들의 평균 독서량은 월 0.7권 수준이며, 열 명중 한 명은 일 년 동안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이 수치는 매년 더 떨어지고 있다. 이게 단지 시간이 없어서의 문제일까?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영화, 드라마, 넷플릭스, 유튜브에 말이다.


물론 꼭 책으로만 배울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어떤 분야는 오히려 책이 최신 트렌드에 뒤쳐진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일 년에 책을 몇 권 읽는지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수치라 생각한다. 틈날 때마다 꾸준히 자기 계발에 힘쓰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역으로 끊임없이 자기 계발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수준의 도전을 요구받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그런 사람일 수 있고, 당신 주변에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주변 사례 말고 전반적인 산업/직종의 직장인 전체 연령대를 평균적으로 보자는 뜻이다. 직장에서 충분히 도전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반대로 말도 안 되는 목표를 부여받는 사람들도 많다. 노력해서 기술을 성장시키면 이룰 수 있을듯한 수준이 아니라 어지간한 운으로도 달성할 수 없을 듯한 그런 목표 말이다. 본인이 성장해서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해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목표라면 인간은 아예 도전을 포기해 버린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어떤 사업부 어떤 팀은 목표가 너무 쉽고, 다른 팀은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내려받는 경우도 많다. 내가 여태까지 다녀본 회사, 만나본 사람들 상당수는 이 둘 중 어딘가에 속했던 것 같다. 도전의 크기와 기술 수준이 적당히 매치되는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회사/부서가 사람들을 몰입시키고 생산성을 높이고 싶다면,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스킬 수준을 파악하고 그에 적당한 성과목표를 부여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본인의 강점을 바탕으로 지금보다 성장해야지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번째 단계는 사람들이 스킬을 갈고닦으면서 새로운 방법과 도구들을 시도할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예전에 해왔던 것을 별생각 없이 반복하지 말고, 방법이 아닌 목적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여기엔 몇 시간 일했는지 알려주는 시스템 문제뿐만 아니라 언제 출근하고 퇴근하는지로 사람을 평가하는 마인드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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