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크래프팅을 유도해야 하는 강사의 입장에서
'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책을 쓰면서 잡크래프팅에 대한 이야기를 썼었다. (브런치 매거진에도 있다) 잡크래프팅은 사실 새로운 개념도 아니고, 잡크래프팅 교육을 하는 업체들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넘겨짚자면 요즘 들어 잡크래프팅에 관심을 가지는 기업이 늘어난 것 같다. 인사팀 최대 애로사항 주 52시간 근무제 때문이다. 예전보다 절대적인 근무시간이 줄어드니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온갖 회의도 줄이고 보고서도 줄이고 방법을 찾다 보니 잡크래프팅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교육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가장 난감한 주제 중 하나가 잡크래프팅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잡크래프팅이다. 잡크래프팅을 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더욱 몰입하기 위함이다. 사람마다 '추진하고 싶다', '양성하고 싶다', '공감하고 싶다' 같은 욕구와 그와 연결된 강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강점을 맡은 포지션에서 발휘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시키지 않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잡크래프팅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자기 업무를 재정의(task crafting) 하는 것, 관계(relational crafting)를 재정의 하는 것, 인식을 재정의(cognitive crafting) 하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잡 크래프팅 : 일에서 의미 찾기 참조)
요즘 강의하면서 자주 예로 드는 것이 배달의민족 마케터들이다. 원래 마케터의 첫 번째 목표는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와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실 배달의민족 마케터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단순히 '배달의민족 매출을 높이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잡크래프팅 사례를 들다 보면 자꾸 마케팅 사례를 찾게 되는데 꼭 마케터들만 잡크래프팅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외부에서 관찰하기 쉽기 때문에 예로 들게 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잡크래프팅의 공간이 허용되는 회사에서는 자연스럽게 잡크래프팅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반면 정해진 일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분위기에서는 사람들이 본업에서의 잡크래프팅을 포기한다. 꼭 대기업만 그런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은 스타트업에서도, 상사가 마이크로매니저 성향이 있다면 잡크래프팅이 어려워진다.
본업에서 의미를 찾고 강점을 발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이드 프로젝트에 몰입한다. '외교' 강점이 있는 사람은 온갖 모임들을 만들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 '탐구' 강점이 있는 사람은 뭔가 계속 배우러 다니고, '추진' 강점이 있는 사람은 무언가 이벤트를 조직하기도 한다.
워라밸이 요즘 화두가 되는 이유는, 단지 야근이 너무 많고 가족과 쉴 시간이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 나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본업에서 잡크래프팅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집에서 쉬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사람들이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자꾸 딴 데로 샐까? 워라밸에서 '라이프'는 단순히 일을 안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강점을 발휘함으로써 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일과 삶을 어떻게 분리하느냐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이미 잡크래프팅이 되어있어서 일에서 자기 강점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고, 그래서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워크와 라이프의 경계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워라밸을 외치는 사람은 일에서 잡크래프팅이 안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환경 자체가 잡크래프팅이 어려운 환경일 수 있다. 그래서 자꾸 다른 곳에 가서 강점을 발휘하고 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빨리 퇴근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오늘 야근을 할지 안 할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워라밸은 단순히 몇 시간 일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몇 시간을 일하든 그동안 내가 충분히 나일 수 있는지가 먼저다. 구성원들의 워라밸을 고민하는 중간관리자/인사팀이라면 고민의 영역에 근무시간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이 일에서 자기 강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고, 자신의 강점을 회사에서도 발휘하고 싶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잡크래프팅한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냐고 위에서 방해만 안 하면 알아서 한다. 스스로 하거나, 적어도 팀 내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잡크래프팅이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 회사 차원에서 잡크래프팅 교육을 하기도 하는데 강사로써 사실 다른 강의/워크샵에 비해 어려운 시간이다.
1) 곧이곧대로 안 듣는다
잡크래프팅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다.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자기 강점을 발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잡크래프팅을 하는 사람들은 일에 대한 만족도도 높고, 성과도 높고, 더 오래 회사를 다니며, 심지어 결근 일수도 줄어든다.
그런데 잡크래프팅을 '회사 주도'로 '교육'하려 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본인을 위해 좋은 것이라 설명해도 회사가 시켜서 하는 상황에서는 '어디서 약을 팔아' 같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회사가 내 생산성을 높이려 한다, 무언가 일을 더 시키려 한다 생각하는 순간 마음을 닫고 잡크래프팅이 되지 않는다.
2) 하고 싶어도 생각하기 어렵다
보통 잡크래프팅에 대한 강의는 이렇게 진행된다. 뭔가 사례가 될만한 동영상 한두 개를 보여주고, 잡크래프팅의 개념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 자기가 하고 있는 업무를 쭉 나열해 보면서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나서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업무가 무엇일지 생각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로 해보면 어렵다. 교육 참가자 입장에서 무슨 일을 더 해야 할지 생각해내기 어렵다.
3) 안 시켜주면 땡이다
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손들고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해보자. 그런데 큰 조직일수록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기술과 성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잡크래프팅의 결과로 회사 사람들끼리 블록체인에 대해 배우는 스터디 그룹을 제안했다고 하자. 이 사람 팀장이 '너는 시킨 일도 똑바로 못 하면서 왜 나대고 다니냐' 한 마디 하는 순간 그 회사의 잡크래프팅은 끝이다.
회사 안에 마이크로매니저들이 많은 조직이라면, 무의식적으로 잡크래프팅 했다가 퇴짜를 맞은 경험들이 조직에 배어 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잡크래프팅 교육이나 워크샵을 진행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잡크래프팅 교육이나 워크샵은 정말 쉽지 않다. 인사팀의 요청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외부 강사 입장에서 교육 시간 내내 '회사가 고용한 프락치' 같은 시선을 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잡크래프팅 워크샵은 꼭 진행하고 싶은 주제이다. 제대로만 진행된다면 참가자들의 직장생활, 그리고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잡크래프팅 워크샵을 어떻게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
잡크래프팅은 갑자기 튀어나온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잡크래프팅 워크샵을 진행하는 회사는 이미 여러 곳이 있다. 역설적으로 잡크래프팅 워크샵 모듈 자체는 태니지먼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는 잡크래프팅 워크샵 전에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일반적인 교육은 잡크래프팅 개념 설명과 사례 몇 가지를 보여준 후 바로 워크샵으로 들어간다. 앞서 이야기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워크샵을 할 때는 '나를 해석하다'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어떤 욕구와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한 후에 잡크래프팅 단계로 넘어간다. 자신이 가진 욕구를 충분히 이해하고,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만이 진정 몰입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잡크래프팅을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잡크래프팅 본론부터 시작하는 세션에 비해 태니지먼트의 잡크래프팅 세션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깊게 생각해보고 하는 잡크래프팅과 대뜸 동영상 한두 개 보고 시작하는 잡크래프팅은 과장 좀 보태서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워크샵을 진행할 때는 먼저 종이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모두 써보게 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욕구와 강점, 역할을 써보게 한다. 각각의 욕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충분히 충족되고 있는지 상중하로 표시한다.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왜 자신이 맡은 일에 만족/불만족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강점을 지금 내 자리에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강점이 발휘되어야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크샵을 어떤 사람들과 함께 진행하느냐에 따라서도 효과가 다르다. 잡크래프팅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새로 하려고 하는 일을 상사와 동료들이 지원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평적 분위기의 열려있는 조직에서는 팀 구성원들이 같이 모여서 잡크래프팅 팀 워크샵을 진행하는 것을 추천한다.
반대로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안된 상태에서 회사의 지시로 잡크래프팅 워크샵을 하게 된 경우 오히려 동료나 상사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런 경우엔 개개인 단위로 잡크래프팅 워크샵을 진행하게 되는데, 사실 크게 추천하지는 않는다. 원래 의도와 달리 잡크래프팅이 아니라 부서 이동이나 이직에 대한 고민으로 혼자 흘러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