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동호인이 세계 챔피언을 꿈꾼다(1)

국 복무들 마친 내가 자전거를 타게 된 이유.

by 권영학

군복무를 끝냈으니 누가 봐도 전문 운동선수가 아니라면 시작할 수 없는 나이다.

그렇다!

나는 운동을 체계 적으로 배운 선수도 아니며, 전문 장비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가능하지 않는 이야기며, 조금 양보해 이해를 굳이 해 준다면 적당한 취미 정도로 봐 줄만 했다.

1988년 올림픽이 한국에서 개막하던 해 3월 나는 군 복무를 끝마치고 사회인이 되었다.


직업을 구해볼까 연락이 되는 친구들에게 찾아도 가 보고 연락해 일 자리도 알아보다 작은 회사의 운전 자리가 있어

시작하게 되었다. 살짝 역마살이 있는 나에게는 괜찮은 직업 같았다.

그렇게 몇 개월 일을 하다 보니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주인이 사업을 하는 분이었는데 허구한 날 늦은 밤 술자리가 빈번했다.

차에서 기다리며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무엇이 될까? 를 매번 생각하게 되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직업을 버릴 만큼 무모하고 당찼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고 싶었고 나는 사이클선수가 되면 대한민국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 직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동경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전거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고 행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다니던 회사 그만두기.

두 번째 주변 친구, 가족에게 내 소식 알리기.

세 번째 운동을 하기 위한 장비, 정보 등 찾아보기.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기 위해 저 이 일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 하니 봉급인상이라는 카드를 꺼냈지만 내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쉽게 뿌리 칠 수 가 있었다.

두 번째 얼마 후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만나는 사람들 마다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들이 당장 내 앞에서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황당" 했을지 시간이 지난 후에 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친척, 형제들도 찬반이 있었고 압도 적으로 반대가 많았다.

날 꽤 믿어주던 형도 반신반의 했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운동선수라는 것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나는 주변 일가친척, 친구들의 미심쩍음 속에 운동선수로의 길에 들어선다.


세 번째 내가 돼, 보기로 한 종목의 기본 정보와 장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작은 폰 하나로도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1988년경 정보를 찾는 방법은 발품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자전거(사이클선수) 선수가 되기 위한 첫 발이 되었다.

자전거는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통칭하는 의미이며 선수들 사이에서는 자전거 선수라 부르지 않고 사이클선수라 부른다.

사이클 선수는 기본장비를 갖추어야 하며 꼭 필요한 부분이다.

장비 : 사이클, 사이클슈즈, 헬멧, 장갑, 고글, 유니폼 등을 기본 장비라 할 수 있겠다.

정보 : 시대 적으로 정보를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시기였다.

당시에는 동호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각 구 마다 사이클클럽이 있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다.

찾는다 해도 가입하는 방법이나 운동하는 회원들의 연락처를 받을 수 없었다.

소서문 끝에 관악구 소속의 자전거 클럽 회장과 총무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운동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관악구 사이클선수로 출전했던 올림픽벨로드롬 입장식 장면.



주말 또는 주중 아침을 사이클운동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모임이 있는 날 이면 아침 6시에 봉천사거리 또는 관악구청 앞에서 만나 출발하곤 했다. 나는 상도동에 살았으므로 사이클을 타고 내리막길 내달리면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젊은 친구 서너 명, 연세 드신 분들 서너 명, 서울대 입구에서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우영‘ 사장님은 항상 참여를 했고, 근교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는 총무님께서는 전날 음주로 꽤 잦은 불참이 있으셨다. 관악구 사이클클럽 회장 장영헌 님께서는 이미 나이가 상당히 드셨었다.


장영헌 회장, 이금모름, 최우영삼천리사장, 필자.


사이클을 엄천 좋아하셨고, 콧수염을 기르셨었다.

자전거 복장에 걸쳐 입은. 조끼 가슴 포킷에 끈으로 매달아 놓은 호루라기가 움직임에 항상 달랑거렸다.

호루라기 사용 목적은 비상시 사용했는데 아주 유용했다.

매년 1회 또는 2회 사이클 대회가 있었는데 도로대회와 트렉으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나는 통일로에서 진행 됐던 구대항 도로사이클대회를 참가했었다.

구파발을 지나 삼송리쯤 지나면 필리핀참전기념비 광장에서 출발했고 임진각을 돌아오는 60킬로 대회를 많이 했었다. 강남구는 잘 참가를 하지 않았고 태릉에 클럽을 둔 한흥사이클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냈었다.

올림픽 벨로드롬에서 진행된 대회에서 처음으로 사고를 당했었다.

예선을 통과 후 준결승을 치르는 단계에서 사이클선수 출신 선수와 붙게 됐는데 벨로드롬을 처음 타는 나에게 비교하면 날아다니는 선수였다.

마지막 결승 한 바퀴를 남겨두고 주로를 잘 달리고 있는 나를 추월하며 앞 바튀를 부딪쳐 버려 스피드를 내고 달리던 상황에서 벨로드롬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당시 응급수송차를 타고 잠실 근교 병원에 가서 응급 처방을 받고 나는 다시 벨로드롬 경기 장으로 왔고 사고로 김영우, 선수는 실격 처리가 되었고 나는 경승까지 진출했었다.

그때 임원진 또는 관계자들이 웬만큼 다치면 집에 갈 텐데 또 와서 자전거를 탄다면서 대단하다는 표현을 했었다.

그렇게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었다.

88 올림픽을 치른 벨로드롬은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는데 넘어지며 쓸린 어깨와 골반 좌, 우 찰과상과 함께 부상 부위에 나무 까시가 박혀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었다.

몸속에 박힌 나무 까시는 몸속에서 곪아야 바늘이나 핀셋으로 뽑을 수 있었으니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다음 호 안내(두 집살림, 그리고 젊은 선수들과 만남,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