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 산악자전거단체 창설 그리고 첫 대회

제1회 전국산악자전거협회장배.

by 권영학

1992년 용인 자연농원 행사를 이끌었던 사람은 조한재“씨였는데 향후 진행 되었던 대회에도 한동안 참여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우병 고)최형보 정연품 조한재 권영학 이승.

1992년 5월 코렉스배 산악자전거대회 분위기에 힘입어 같은 해 6월 전국산악자전거협회를 창설하게 되는데 주축 멤버는 이랬다.

<전국산악자전거연합회>

김정한(동광상사대표)

정연풍(정“사이클대표)

강대성(한흥상사대표)

박수민(OGK한국지사장)

이옥 내(마포코렉스대표)

이종희(청기상사근무) Giant 수입원.

박종명(우연상사근무)

인보식(강남스포츠)

임우규(OGK근무)

이 밖에도 자전거업계, 수입사등이 회원사로 동참하여 힘을 합쳐 시작했다.


전국산악자전거협회(이하 협회‘ 라 하겠음)

협회는 상당히 빠른 결정과 행동에 돌입했다.

출범 바로직후 대회를 만들었다. 코렉스배 대회가 있었던 그 해 1992년 7월 26일 전라북도 무주리조트에서 협회 창설 첫 대회를 실시한다.


서울팀은 강남 뉴타운 앞에서 전세 버스를 이용해 무주로 갔는데 다른 지역 선수들은 어떻게 왔는지는 나의 기억은 없다.

대회전날 도착했고, 무주 리조트 입구에 허름한 기와집에서 민박을 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무주 가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리조트에 접근하기가 쉬웠으나 예전에는 경부고속도로 영동이나 대전에서 접근이 가능했다.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한참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치는 매우 좋았다.

도착한 일행들은 각자 나눠져 숙박했었다.

저녁은 민박집 뒤안길 평상은 없었고 5-6명 정도가 모여 식사를 했다.

이때 스치듯 인사했던 분들 중 권기순‘ 코오롱정보센터 근무. 박동화 씨 와 인사를 나눴었던 기억이다.

나는 대회날 아침 자전거를 가지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코스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코스 확인 중 다운힐 결승 약 500미터 전방에 슬로프 빗물고랑을 넘어야 하는데 U자 형태의 수로를 나무판자로 덮었고 지면보다 높아 단차가 생긴 부분을 각목을 놨었는데 워낙 각이 커서 자전거 타이어 펑크가 예상되었다. 미리 머릿속에 계산에 넣었었다. 아침 10시는 되어서야 대회를 진행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협회 첫 대회>

대회는 두 종목이었다.

힐클라이밍과 다운힐 경기였다.

힐클라이밍은 지금의 한솔동쯤에서 출발하여 설천봉이었는지 만선봉이었는지 기억은 가물하지만 아마도 만선봉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야말로 바닥에 출발선 그어놓고 출발했었다.

이때 결승 심판은 누구였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출발심판은 임유규 씨였었다.

임우규 씨도 자전거선수 출신으로 대회에 경험이 있는 분으로 기억한다.

출발 라인에 선 우리는 휘슬 소리에 맞춰 엄청 빠르게 박차고 달렸었다.

강서클럽의 김우병선수, 최형보선수, 나와 함께 선두에서 달리게 되었고 마지막 코너를 돌면서 정상 약 30여 미터를 남기고 매우 가파른 고개에서 나는 두 사람을 따돌릴 수 있었다.

힐클라이밍 대회 1등으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2등은 고) 최형보 선수였고(이때 알게 되었는데 형보 씨는 이미 코오롱정보센터) 활동을 하고 있었었다. 3등은 강서 사이클클럽 현) 경륜선수 김우병이었다.

그래도 꽤나 자전거를 탄다는 선수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내가 자전거를 잘 타는 선수로 주변 부러움을 받았던 시간이었다.

정상에서 고) 최형보 씨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최형보 씨와 클라이밍 대회 후 이야기중.



1등으로 힐클라이밍을 마친 후.



이어지는 다운힐 경기.

힐클라이밍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잠시 휴식을 가졌고, 그곳에서 다시 다운힐 결승까지 내려오는 경기가 진행 됐다.

다운힐 경기는 산악자전거를 오래전부터 타오던

고) 최형보 선수에게 유리한 경기 종목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당연한 경쟁자로 형보 씨를 나는 점치고 있었다. 코렉스대회 이후

고) 최형보 씨와 내가 같이 활동은 많이 하지 못 했어도 코오롱정보센터의 활동은 최형보 씨와 박동화, 권기순 씨 등 함께 하는 분위였었다.


다운힐 코스는 클라이밍 결승선을 출발해서 다시 한솔동 출발장소까지 내려와(이 길은 차도라 길 넓음)

우측으로 산길(서엽기행)로 접어들면 시골 리어커정도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나왔고, 구블구블 이어지는 길에 평지 거나 약간 오르막이 포함된 그런 길이었다.

나는 실수 없이 꽤나 빠른 속도로 달렸고 아침에 확인했던 빗물홈에 도착했는데 속도를 줄이고 침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었고 더더욱 테크닉은 상상할 수 없는 형편없는 실력에 알고 있었음에도 앞바퀴가 장애물을 치고 넘어가는 실수를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만 워낙 테크닉을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몰랐다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앞바퀴가 치고 넘어가는 순간 나는 펑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앗!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결승선은 보이고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이때에도 바퀴가 바람이 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몰랐던 나였기에 무척 용감했었다.

넘어져 다친상태에서 결승선까지 달리는 필자.

슬로프에서 만선하우스 광장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 다운 경사도가 꽤나 가팔랐는데 펑크가 나서 공기가 하나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전력질주로 내 달렸었다. 빠른 속도에 앞바퀴가 흔들리며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결과는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면서 정강이 무릎 대퇴부를 지나 고관절까지 한쪽면을 갈았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찰과상이 컸었다.

나는 자전거를 다시 일으켜 결승선을 향해 달렸다.


이때 부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고 테크닉이 산악자전거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내가 향후 테크닉과 자전거 경기력을 위한 장비 세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오니 경기는 마무리가 되어갔다.


바로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나는 온몸에 거즈를 덕지덕지 붙이고 시상식에 참석했었다.

나의 기록은

힐클라이밍 1위

다운힐 2위였었다.

이때 트로피와 부상으로 스키세트와 자전거를 받았다. 부상만 없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경기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고통과 씨름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회에서 얻은 경험과 무엇을 준비하면 좋은지에 대한 아주 좋은 나의 시간이 되었다.

시상하는 정연풍 회장님.
트로피릉 받고 기뻐하는 모습.

<산악자전거역사의 시작 코오롱레저정보센터>

7월 무주 대회가 끝나고 나는 8월 만삭인 아내와 코렉스 대회에서 받은 티코‘차를 타고 강원도 영월 쪽 피서를 다녀왔고 며칠 후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

8월 21일생.

선수 같지 않은 선수 생활은 계속되었고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몰려다니며 운동했다.

훈련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밥맛 좋게 타고 몰려다녔던 것 같다.

적어도 짜인 시간에 운동을 한다거나 별도의 보조운동 없었다. 어떤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당연한 시기였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오롱 정보센터에서는 일본에서 진행되는 대회에 참가할 선수를 모집했는데 나는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가고 싶은 생각은 머릿속에 계속 멤 돌았다. 시간이 지나며 궁금한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해외 옆나라 일본에서는 어떻게 산악자전거를 타는지 어떤 곳에서 타는지도 매우 궁금했다.

궁금증이 나를 일본 대회를 참석하기로 결정했고 나름 준비도 했었다.

내가 타고 있던 리지드포크가 달린 슈윈(Schwinn ) 자전거를 두고 삼천리자전거 회사를 찾아가 이번에 일본에 자전거 대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산악자전거를 후원해 달아는 내용을 이야기했고 당시 삼천리자전거 담당 대리였던 정상섭“ 씨와 이야기가 되어 가능성을 조금 가지게 되었었다.

일본으로 출국할 날은 다가오는데 삼천리자전거에서 제품을 주겠다는 소식은 더뎠었다.

내용인즉 이번에 삼천리자전거가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는데 좀 늦어진다는 이야기였었다.

기다리다 포기할 즘 출국 즈음해서 자전거 한대를 받게 되었는데 21단에 시마노 부품이 장착되고 앞 서스펜션이 달린 “임팩트”라는 자전거였다.

몇 번 타보지 못하고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대회에 가기 전 나는 KG스포츠에서 근무하는 김도하, 고윤정 씨를 통해 상의 저지는 Lespo와 팬츠는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이라고 한문으로 이름을 넣어 입고 나갔다.


일본 오사카 산악자전거대회 참가.

<Team Cycle World 846 Factory>

단원.

박동화, 구본익(임원)

선수.

권영학, 고) 최형보, 노기탁, 박진.

공항에 내려 우리는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며 경기장에 가고 있었고 마지막 도착역에 내리니 컴컴한 밤이었다.

힐클라이밍 출발전 각오를 다지며.


박동화 씨는 차를 얻어 타고 대회장까지 갔었고 우리는 기차역에서 자전거를 조립해 경기장에 가야 했다. 자전거를 다 조립해 출발하려니 컴컴한 밤을 밝힐 렌턴이 고) 최형보 씨 밖에 없었다.

우리는 라이트 불빛 하나에 정신을 집중하고 갈 수밖에 없었다.

기차역에서 경기장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기차역에서 경기장까지 엄청난 고개를 넘어야 했었다.

자전거를 제외한 배낭에는 텐트와 버너 코펠 등 챙겨야 했으므로 등짐은 상당히 버거웠었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변변한 불빛 없이 우리는 텐트를 치고 경기장에 마련된 샤워부스에서 100엔짜리 동전을 넣고 샤워 후 소시지를 구워 허기를 채웠었다.

새벽이 되어 엄청난 비가 쏟아져 텐트 안으로 빗물이 밀려들어와 잠을 자다가 텐트 밖 빗물홈을 만들고 다시 잠을 청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에도 부슬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진행하겠어? 설마!

하지만 경기 시간이 다가오니 방송으로 출발선으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도 옷을 챙겨 입고 출발선으로 향했다.


경기는 토요일 오전 힐클라이밍과 오후 듀얼슬라룸(이때처음경기해 봄)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우리 선수 일행은 전원탈락 했다.

듀얼슬라룸 대회.

힐클라이밍 대회 성적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당연히 좋은 기록이 아닐 거라 생각해 참가 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일요일 우리 선수일행은 다운힐 출발 선으로 갔고 우리 팀에서는 내가 지일 먼저 출발했다.

삼천리자전거에서 지급해 준 “임팩트”21단 에는 앞 쇼버가 장착된 철 자전거 엿었다.

장비가 좋아서였는지? 내 실력인지 다운힐 결승선이 보이는 지점에서 나는 앞서 출발한 선수를 추월하며 결승선을 넘었다.

다운힐 결승지점에서 내려오는 한국 선수일행을 기다려 함께 우리의 숙소인 텐트로 이동하며 힐리프트(윌리)를 했는데 내 자전거 앞바퀴 쇼버가 쑥 빠져나왔었다.

우리 일행은 그걸 보며 실망을 금치 못했었다.

삼천리자전거 산악자전거는 이렇게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천리자전거 입장에서는 코렉스배 산악자전거 대회를 먼저 치렀기 때문에 적지 않은 경쟁심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선수 일행은 다운힐 경기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탠트정리와 짐을 싸야 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돌아와 짐정리 중에 누군가가 알려줬다. 권상 “ 을 찾았다는 것이다.

어~ 권상? 난데! 경기장 시상식 무대 앞으로 갔을 때 에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대회임원으로 보이는 분이 나와 작은 상패와 상품을 전달해줬다.

알고 보니 내가 다운힐 경기에서 5등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임펙트 자잔거를 앞에 두고. 상패와 부상으로 자전거 타이어.

기쁨을 누릴 틈도 없었다.

오사카로 다시 돌아가려면 기차를 갈아타고 가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경기장을 떠나야 했었다.

작은 상패와 기념으로 받는 자전거 타이어는 당시 짐이 하나 늘었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었다.

이 때 받은 상패.


다시 커다란 배낭에 짐을 가득 채운 채 자전거를 타고 기차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야 했다.

기차역에서 경기장으로 올 때 엄청난 오르막에 힘들었는데 다시 돌아가는 길엔 다운힐을 내려가는 것이라 편안한 느낌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매리막을 달리는 느낌은 신선했다.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 산골 기차역에 도착했고 기차를 갈아타며 오사카 숙소에 도착했다.

시내에서 하루를 지낸 다음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라 시내 구경도 했었다.

우리 일행은 자전거 가게 구경도 다녔고 노기탁 씨는 텐션디스크바퀴를 거금 주고 구입했다.

한국에서 텐션 디스크바퀴(스포크가 스틸이 아닌 케블라로 만든)를 제일 먼저 사용했던 선수였다.


<일본 대회를 마치며 느끼고 결심한 것>

경기 운영에 질서 있었다.

경기 후 부상자가 없었다. (강습을 하게 된 동기)

듀얼슬라룸 우승자는 자전거 테크닉이 엄청났다.

오사카 지하철역에(지하) 자전거판매점이 있었다.

한국 산악자전거보다 몇 배는 발전했다는 생각.

일본이 이 정도라면 본토 “미국”캘리포니아는 어떨까?라는 생각에 많이 복잡했었다.

미국대회 원정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이때 했었다.

본토 미국 캘리포니아 산악자전거 대회를 가기에는 하지만 꿈을 꾸면 된다는 것을 이때 배운다.

사실은 막연했지만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삼천리자전거에 받았던 “임팩트” 산악자전거를 반납하고 장비에 대한 보고서를 남겼다. 그 이후로 자전거는 다시 받지 못했고 그것으로 끝났었다.

그렇게 1992년 대회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겨울은 자전거의 계절이 아니었으므로 우리의 활동이 주춤할 때쯤 한국산악자전거협회는 다시 대회를 주최하게 되는데, 지역 형편성과 기온을 감안해 부산에서 대회를 주최하는 것으로 했다.


1993년 1월 전국산악자전거협회장배 부산동래산성대회.

부산 동래대회 출발 준비 장면.


산악자전거 대회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나는 자연스럽게 여러 대회 정보와 소식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겨울이라 대회도 없어 자전거를 타고 모여도 찻집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자전거 타기에는 진심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시합 소식이 들렸다.

부산에서 1등에게는 엄청난 상품? 최고의 인기 상품인 쇽업쇼버(서스펜션)를 준다는 것이었다.

우리 몇 명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건너편 맥주집에서 부산이야기로 분위기가 익었었다.

나는 1등도 하고 싶었고 시상품도 탐이 났었다.

나는 이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이번에 쇼바를 상품으로 받으면 한턱 쏘겠노라고 “ ~

이쯤 강남 정‘사이클에 드나들던 허장욱(현운수업) 선수를 만나게 된다.

허장욱 선수는 철인운동을 하고 있었고 산악자전거가 없어 산악자전거를 탈 때에는 함께 할 수 없었고 사이클을 탄때 주로 몰려다녔었다.

향후 우리는 수영 잠수함그룹은(권영학, 노기탁, 이승, 고) 박용만 등은 허장욱 씨가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서초에서 강동수영센터까지 배우러 다니고 했었다. 그 후 몇 번 수영 지도를 받은 적 있다.

허장욱 씨는 이런 인연이 되어 울산 박호택 씨가 진행했던 철인대회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었다.


부산에서 진행되는 전국산악자전거협회 2차전

대회는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해 여럿은 함께 이동했고 서울에서 늦은 저녁 출발해 부산에 일찍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버스는 부산에 여유 있게 도착해 아침도 먹을 수 있었다. 부산 한일사이클(미스터 MTB) 한문형 씨와 박종명 씨(우연상사) 이때 협회 대회에 많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삼천리자전거 공장은 양산에 있었고, 코렉스자전거 공장은 창원에 있었다.

글을 정리하며 회의 자료를 보니 삼천리와 코렉스 자전거 회사에서 선수들의 자전거 수송을 위한 트럭을 제공한 것으로 나와있다.


대회장 분위기가 바뀌어 서울 근교가 아닌 부산이니 내가 원정 대회가 된 셈이고 부산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선수들의 참가에 나도 살짝 긴장이 되었었다. 진보근, 양희동, 대구 이주동, 광주 김용대, 수원 김정민, OGK 소속 민원영, 한흥상사 소속의 김용필 박진, 노기탁 씨 등, 꽤 이름 있는 선수들의 참가였다. 우선 고) 최형보 씨는 최격에서 풍기는 건강함이 탁월했다. 진보근 씨는 본인의 안방에서 치러지는 대회인 만큼 각오가 남 달랐을 것으로 예상하며 양희동 씨 역시 꽤나 이름 있는 선수였기에 긴장을 느출수는 없었다.


경기는 출발해서 산성 돌담을 넘어 어느 정자나무를 돌아오는 2바퀴 경기였다.

나는 그냥 달리는 것이 좋았다.

출발과 동시에 빠르게 내달리면 차가운 날씨에 가쁜 호흡에 정신이 혼미해지며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피맛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때 그랬었다.

형보 씨와 나는 나란히 달려 유도 라인이 설치된 정자나무를 돌아 반환점으로 달렸다.

바로 뒤로 예상했던 진보근 씨가 따라왔지만 꽤 거리가 있었다.

출발 지점에서 다시 두 번째 바퀴를 돌기 위해 달렸다. 산성 돌담길을 넘기까지는 계속 언덕이었었는데 돌담길 넘기 직전까지 나는 선두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산성돌담길을 넘어 달려가 어느 나무 정자를 돌아야 하는데 그 정자나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꽤나 긴 시간을 반환점을 찾고 있었는데 뒤에 나타난 진보근 씨가 근처 고목나무 밑을 돌아 나갔다. 진보근 씨가 고) 최형보 씨를 추월한 것이다.

나도 뒤따라 그 나무 밑을 돌고 이어지는 선수들의 행렬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달려야 했고 내 앞에는 진보근 씨와 형보 씨가 앞을 달리고 있었으니 온갔 힘을 써야 했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선성 돌담을 넘기까지 이어지는 언덕에서 모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젠 내리막(다운힐) 길만 잘 달리면 우승은 확정 지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앗싸!


몇 킬로를 남기고 생각이 불순했었나?

앞바퀴 펑크가 나고 말았다.

무주 리조트에서 격은 펑크 트라우마가 있어 나는 내려서 자전거를 밀며 뛰어 달려갔다.

펑크난 자전거를 밀고 뛰어오는 필자.

결승선 몇 미터를 남기고 진보근 씨와 고) 최형보 씨가 통과했고 그 뒤를 이어 꽤 여럿 선수들이 나를 추월해 갔다.

나는 이 대회에서 4등을 하며 청기상사에서 대회 후원해 준 스포츠용 고들을 선물로 받았다.

1등은 부산 미스터 MTB 소속에 진보근 씨가 차지하게 되었다.

락샥 서스펜션은 꽤 탐나는 상품이었고 꼭 1등을 하고 싶었지만 결승선 눈앞에서 나를 추월해 가는 선수들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이때 여성 유일 참가자로 최진금 씨가 있었는데 지금 이분 무얼 하시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우리는 대회를 마치고 커다란 식당으로 이동해 시상식과 다음 대회 일정을 알리고 대회 일정은 모두 끝내게 되었다.

식당 시상식에서 너무 힘들어 거의 쓰러져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나의 새로운 느낌과 생각은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회였고 “경거망동” 하지 말아야 한다는 또렷한 기억을 이때 가지게 되었었다.


당시후원사와 임상자 상품, 입상자.


1993년 대회 일정.

다음 호안 내 <계속되는 대회 그리고 미국 본토를 가다>















이전 01화한국 최초 산악자전거대회에서 코렉스배우승(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