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회는 내 인생의 서막에 불과했다."
1990년 우리는 평소와 같이 사이클을 타고 여러 곳을 다녔다.
구로구 연합사이클 대표 남성현.
나는 종종 사이클기술에서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구로구 연합사이클 대표 남성현 씨는 찾아가고 했었다.
남성현 씨는 연합사이클이라는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예전 세미프로 라고 하는 사이클선수를 했었다.
세미프로는 실업팀은 아니지만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선수급의 실력자를 이야기하며 대회에도 경험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강남에 정'사이클, 관악구 서울대입구 삼천리자전거, 구로구 연합사이클 등이 나의 운동 루트 및 장비점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있었고, 나에게는 변화는 없었다.
시간이 나면 닥치는 대로 운동을 했고 여럿이 몰려다니며 사이클 타는 재미는 더해 갔다.
강남에 정'사이클은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어 시간만 나면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었었다.
조동안 씨와 인연.
이때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이 강서구사이클 클럽의 조동안, 씨였다.
조동안 씨는 우리보다 산악자전거를 먼저 타고 다녔었다.
정'사이클에 부품을 사러 왔다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차후 조동안 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하철공사를 다녔는데 젊은 사이클 동호인들에게는 사이클을 아주 잘 타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사이클대회에서 경쟁해 본적은 없었다.
향후 산악자전거 대회에서는 자주 만났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즐겼다.
(고) 최형보 씨와 인연.
또 한 명의 바이커가 나타났다.
키가 180cm가 훌쩍 넘고 자전거를 얼마나 많이 타고 다녔는지 그을린 얼굴 피부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해 보였다. 훤칠한 키에 오뚝한 코 서구적 마스크를 가졌던 그는 항상 커다란 백팩을 메고 나타났다.
그는 정'사이클에 가끔 나타났는데 우리와 겹칠 때가 있어 인사를 나누고 했었다.
그가 한국 초창기 산악자전거를 이끌었던 인물 "최형보"선수였다.
키가 컸기 때문에 자전거 프레임도 컸고 두툼한 타이어에 싯 포스트가 길게 뽑혀 있어 자전거도 정말 폼이 났다. 정'사이클에서 그렇게 두 번째로 만난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이었다.
가을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백 년 인연 그리고 결혼.
1991년 가을 나는 인생 일대의 변화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결혼이라는 것이다.
잠깐 결혼 이야기를 하면, 내가 운동을 시작하기 전 잠깐씩 얼굴을 봐 오던 사이인데 직장을 그만두며
나는 사이클 선수가 되어 한국에 최고의 선수가 되겠노라고 경양식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했었다.
아내는 전) 신탁은행 농구선수였었다.
나는 운동에 매진하며 지금의 아내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어찌하여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게 1991년 10월 20일 미아 삼거리 장안예식장에서 평생을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아내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자)
산악자전거입문.
바로 "산악자전거대회', 가 내년도에 있을 예정이라는 소문이었다.
믿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했었다.
그해 초 겨울 어느 날 (고) 최형보 씨는 우리에게 산악자전거 타는 것을 보여 준다고 했고, 우리 몇 명은 따라나섰던 곳이 서초동 우면산 이었었다.
가파른 언덕이 나오면 끌고 올라갔고, 경사 도가 심한 내리막은 끌고 내려갔었다.
완만한 등산로 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줬고 그는 커다란 몸집에 날렵한 모습으로 우리를 압도했었다.
한참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를 향해 고) 최형보 씨는 우리에게 한번 타보실래요?라고 했다.
우리 일행 중에 한두 명이 시도를 했었고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가 마지막 낙차가 제법 큰 계단에서 구르며 계단나무토막에 강타한 대퇴근에 큰 멍이 들어 한동안 통증과 검은색 멍자욱이 오래갔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무렵 산악자전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을 보게 되었는데 서울시 용산구에서 가업을 이어 오던 "김정한" 씨였다. 김정한 씨는 아버님께서 운영하시는 "동광상사."가 삼각지에서 한강대교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 자전거 점포에 물건을 대주는 도매와 소매를 함께 하는 가게였었다.
그 후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정한 씨는 미국 출장을 다니며 산악자전거를 들여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1992년 봄.
3월경 한국에 산악자전거대회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점점 신빙성 있게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사이클멤버들은 하나둘 산악자전거를 바꾸기 시작했고, 나는 고민과 고민을 거듭해야 했었다.
무엇보다 사이클 선수가 되겠다는 나에게는 장비 하나 구입 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나는 사이클훈련만 열심히 해야 만 했다.
대회가결정이 되고 날자가 점점 가까워졌고 어쩔 수 없는 결정을 해야 한 했다.
나의 신혼집은 상도동 숭실대학교 앞 쪽 이었었다.
5월 대회가 있을 무렵 나는 아내에게 이번에 있을 대회를 설명하고 32만 원짜리 자전거를 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내가 돈이 있을 턱이 없으니 아내에게 손을 벌린 샘이다.
아내는 다음날 출근 전 네게 30만 원을 넘겨줬다.
나는 자금을 확보하고 내가 봐둔 자전거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자전거를 사기 위해 구로구 연합사이클 애 찾아갔다.
그곳에 슈윈(Schwinn) 회사의 산악자전거가 있었다.
리지드 포크에 파워 브레이크 18단의 자전거였다.
처음 방문에 32만 원짜리 자전거는 딜에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재차 방문이 대회 3일 정인데 오늘은 자전거를 사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다. 대회가 3일밖에 남지 안았기 때문이다. 좋은 가격으로 구입을 할 수 있었다 28만 원!
그렇게 자전거를 사 온 사이클과는 기어 넣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하기 위해 동네를 타고 돌며 익혔다.
대회 2 일정 대회를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대회날은 1992년 5월 23일
21일 22일은 노기탁 씨가 하는 창호일에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고 노기탁 씨가 시키는 일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삼성동 은행 입구 창로 공사였었다.
기억은 가물 하지만 당시 2일 동안 일 하고 받은 돈이 6만 원이었던 것 같다.
당시 대회는 일요일이었고 토요일 우리는 일을 마치고 대회장인 "용인자연농원" 대회장에 가기 위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노기탁 씨와 나는 나라시택시(택시는 아니지만 돈을 받고 이동시켜 주는)를 타고 늦은 밤 용인자연농원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큰 군인용 막사처럼 생겼고 나는 잠을 잤는데 잠잔 이것은 대부분 없다.
대회날 아침!
아침에 일어나 뭘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이때 하얀 셔츠를 입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만났는데 꽤 괜찮은 산악자전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선수가 늘 함께 산악자전거 대회에서 경쟁했던 부산 미스터엠티비 소속의 진보근 씨였다.
대회를 출전하는 마음가짐과 나의 전략!
대회 우승자에게는 대우자동차"티코"를 부상으로 준다고 했고, 또 다른 부상은 컴퓨터가 있었고, 코렉스에서 당시 가격으로 100만 원이 넘는다는 앞 서스펜션 쇼버가 달린 엠티비 자전거 "아크매"를 준다고 했다.
나는 당신 컴퓨터가 같고 싶었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나의 전략!
당시 자전거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인딩페달(클립네스 토우클립)만 사용하던 나는 신발 앞 바분에 농번기에 소 입에 씌우는 마개처럼 생긴
페달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로드사이클에서 사용하던 바인딩 페달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코스를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도, 아니면 모, 처럼 용감해야 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회 코스 일 부 중 들고뛰어야 하는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한국 최초 열리는 산악자전거대회 출발선에 서다.
내가 맨 앞줄에서 출발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출발과 동시에 여렷 선수들은 달려 나갔다.
출발과 함께 계속 이어지는 언덕길 꽤 길었다.
당시 뒤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내 옆에 경쟁자가 누군 인지도 생각이 나질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다만 내 앞에 3위를 기록한 김희성 씨, 이용대 씨, 최형보 씨 등이 있었다.
대회 코스 마지막 정상 앞두고 내가 선두에 섰으며 지금까지 달려온 아스팔트가 아닌 비포장 내리 박을 달려가야 하는 코스였다. 비포장 다운힐은 주먹만 한 돌들이 많았고, 코스 주변에는 꽤 큰 바위 돌 들도 있었다.
비포장길은 빗물이 만든 물길처럼 움퍽 파진 위험한 구간도 꽤 있었다.
다운힐 마지막 부분은 호암 미술과 쪽으로 가는 방향이었으며, 다시 중간에서 산등성이를 보고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다.
중간쯤 도착했을 때 더 이상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는 길이 나왔다.
들고뛰어야만 하는 코스다.
엠티비를 어깨에 둘러메며, 뒤를 힐끗 바라보니 여전히 선수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고 나는 아직도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들고뛰는 구간만 지나면 내리막이 나오며 결승선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내가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일명 뽕 페달이 최악의 순간을 맞이했다.
사이클 스파이크(사이클전용신발)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바닥이 구부러지지 않으며 딱딱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를 악, 물고 달려야 했다.
들고뛰기는 몇 분 되었고 나는 정상에 도착할 때쯤 뒤돌아보니 이 구간에서 꽤 차이가 벌어졌다.
사이클 스파이크를 신고도 산길 언덕에서 있는 힘을 다 쏟아 부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앞에는 아무 선수도 없으니 내가 일등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젠 내리막(다운힐)을 잘 달려 내려가면 되는구나 생각을 했다.
그때도 자동차를 부상으로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상태였다.
꽤 차이가 나는 기록으로 1등으로 결승선을 들어왔다.
사실 그때 기분이 어뗏는지 지금은 감은 없다.
하지만 엄청 좋았던 것은 사실이고 잊을 수 없었다.
대회를 마치고 나를 응원 와준 여러 명과 차를 차고 사울로 돌아왔다.
이때에 부상으로 받은 대우자동차 "티코"는 한동안 잘 사용했고, 폐차까지 탔으니 정말 잘 사용했다.
한국산악자전거협회 출범 그리고 제1회 무주 전국산악자전거대회 이야기가 진행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