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각종 음원 차트 정상 자리를 석권하며 슈퍼루키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트로트계의 신성 '유산슬'. 국민 MC 유재석의 트로트 부캐릭터(이하 부캐)이자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음색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된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
MBC 예능프로그램인 '놀면 뭐 하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부캐 신드롬은 20년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훨씬 이전 21세기 초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예를 꼽자면 필명을 선점하여 내 자신을 대변하는 SNS, 스트리머 방송활동, 본업 외 부업활동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돌 및 엔터테인먼트 성행 속 생소했던 트로트 분야에 본캐가 아닌 부캐로 유산슬이 정상에 서면서 유행 트렌드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2. 멀티 페르소나
이후 부캐 신드롬은 단순 콘셉트가 아닌 하나의 놀이문화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유재석 외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자신만의 부캐를 통해 다양한 매력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김다비(김신영), 마미손(매드 크라운), 린다 G(이효리), 비룡(비) 등 많은 셀럽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상황에 맞게 다른 모습, 다양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 부캐 전성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여럿을 뜻하는 멀티와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의 합성어로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양한 가면으로 나 자신을 표출하는 이 멀티 페르소나는 유독 셀럽들에게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우리 2030 세대 직장인들에게서도 흔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020년 잡코리아에서 실시한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 조사' 결과를 보면 559명의 직장인들 중 77.6%는 회사에서의 본인의 모습이 평상시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답했다. 또 이러한 답변은 20대(80.3%), 30대(78.0%) 직장인들이 40대 이상 직장인(71.2%) 보다 높게 나타나는 걸로 보아 기성세대들 대비 2030 세대 직장인들이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의 틀에 맞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기상 및 출근하여 조용한 회사생활을 하는 직장인이 주말 동안 바이크 동호회나 뮤직 페스티벌을 즐기는 현상도 주변 동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요즘 같은 부캐 전성시대에 많은 우리 직장인들이 본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적 상황에 맞게 본모습을 바꾸거나 숨기며 생활하는 일이 일상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 가면을 쓰며 환경에 맞게 자유로운 표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사회란 뜻이다.
3. 직장인의 멀티 페르소나
일전 필자는 직장인의 신조어이자 '일과 삶, 그 사이의 균형'이라는 제목의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 워라밸이라는 칼럼을 작성한 적이 있다. 신조어라지만 사실 이 단어는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개개인의 업무 및 사생활 사이의 유연한 균형을 뜻하며 처음 등장했었다. 최근 우리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회사를 선택하는 중요한 가치 척도로도 평가되고 있는 이 워라밸, 우리 직장인들은 멀티 페르소나가 이런 워라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국민여가활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가활동의 주된 목적 1순위는 '개인의 즐거움(36.5%)', 2위는 '마음의 안정과 휴식(21.2%)', 3위는 '스트레스 해소(11.6%)', 4위 '자기만족(7.4%)', 그리고 5위 '건강(7.3%)'의 순으로 답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국민의 여가활동은 개인의 즐거움과 마음의 안정, 휴식을 위함이었고 직장인들에게도 통용되는 조사였을 것이다.
직장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평소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치며 공연을 하고, 게임에서 혹은 예능분야에서의 월등함을 뽐내기 위해 방송 스트리머가 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며 공유하는 브이로그 유튜버가 되기도 하며 또 다른 나의 자아를 생성해낸다. 워라밸을 이용하며 우리 직장인들의 멀티 페르소나를 잘 이용하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4. 미래의 직장인, 제일 본캐스러운 부캐
상기에서 언급한 2020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 조사 결과에서 향후 역시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가 확산될 것이라고 54.4%가 답했고 그 이유는 '개인 특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늘어나서'라고 과반수 이상이 선택했다. 그만큼 내재되어있던 다양한 나의 가면 모습을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전향되며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멀티 페르소나가 본격적으로 존중받기 시작했다는 뜻일지 모른다.
그러나 멀티 페르소나가 우리 사회에서 주어진 환경들로 인해 하릴없이 써야 하는 가면이라면 나 자신의 본모습을 잃을지도 모른다. 상사 앞에서 무의식적 아첨을 하게 되는 내 모습, 성격과는 다르게 조용히 지내고픈 내 모습, 밖에서는 쾌활하지만 회사 내에선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내 모습 등 결국 그런 가면 속 나는 본캐의 나보다 훨씬 불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산슬을 포함한 많은 셀럽들의 부캐들이 최정상 자리에 오른 이유는 그들이 보여준 새로운 가면의 멀티 페르소나 모습이 그 자체로도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시도라도 괜찮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지, 내가 관심 있는 일이 무엇일지, 좀 더 즐겁고 행복하고 나아진 삶과 인생을 누릴 권리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당신. 본모습과 많이 동떨어져도 좋다. 진정 원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의 부캐가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작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