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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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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Aug 09. 2017

크루시아:  부부 이야기

<풍뎅이뎅이>라는 다음웹툰이 있다. 정감 있는 곤충들의 모습과 얘기를 조곤조곤하게 그려내는 가운데 따뜻함과 감동과 교훈을 느끼게 하는 재미있는 만화다. 만화의 장면 중에 이런 게 있다. 귀엽고 순한 뎅이에게 어느 날 인상 찡그린 레미가 나타나서는, 꼿꼿한 자세로 주먹까지 불끈쥐고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  “놀자구!” 한 마디를 던진다. 뜬금없는 레미의 말에 뎅이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예의 평온한 표정으로 “응.” 한 마디 한다. 그리고 뎅이와 레미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5년여전 당시 남자친구이던 남편이 내게 보낸 사진에는 두 컷의 만화와 함께 새벽2시7분이 찍혀 있다. 아마 새벽 2시 즈음까지 통화를 했거나 카카오톡을 하다가 보냈겠지 싶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땐 참 달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남편이 새벽 2시에 내게 주는 것이라곤 끈질기게 그르렁 컥컥거리는 코골이 소리뿐인데.


그런데 <풍뎅이뎅이>의 웹툰 장면 속 뎅이 뒷편에 작은 식물이 하나 있다. 무슨 식물인지는 모르겠는데 가운데 잎맥 하나만 보이는 잎사귀 두 장이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이 식물에 눈길이 가지 않았었는데 지금 보니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보니 뎅이의 식물은 우리집 크루시아랑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크루시아는 가운데 잎맥이 선명하게 그려진 둥글둥글한 마름모꼴 같은 혹은 불룩한 송편 같은 잎사귀 두 장이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채 있다. 한 번은 이쪽, 다음 번은 저쪽 하는 식으로 한 쌍의 잎들이 십자 모양으로 반복해서 자리를 잡기 때문에 위에서 올려다보면 사방으로 뻗쳐 있는 꼴이다.

크루시아의 새끼잎이 돋아날 때는 두 장의 잎사귀들이 한 몸인 듯 포개져서 나온다. 새로 나오는 잎들은 또 얼마나 맨들맨들한지 모른다. 초록빛을 띤 싱그러운 연두색 잎사귀가 마치 새로 산 자동차처럼 새로 산 가구처럼 반지르르하다. 그렇게 한동안을 바짝 붙어서 자라나다가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며 서로 멀리 떨어진다. 반질반질한 광택은 잎사귀 두 장이 멀어진 이후에도 꽤나 오래 지속되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크루시아 잎은 윤기를 잃고 투박해진다. 나도 남편이랑 그렇게 바짝 붙어 지내던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니 이따금씩은 양쪽으로 쩍 벌어져 있는 크루시아 잎들처럼 우리도 멀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사랑은 지금 광택이 나나 안 나나 싶을 때도 있고.


그런데 두 장의 잎사귀가 벌어진다 싶으면, 아니 완전히 벌어지기 조금 전에 이미, 크루시아의 가지들 맨 위에서 새 잎이 돋아난다. 한 몸으로 포개진 연두빛의 맨들맨들한 잎이 쏙 나온다. 그렇게 나와서 한 동안 붙어지내다가 이내 조금씩 벌어지고 멀어지고. 그러한 반복의 연속이 크루시아가 살아가고 성장하는 방식이다. 슬로우모션으로 손뼉을 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크루시아의 꽃말이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꽃말의 이유를 보지는 못했는데, 처음엔 에버그린이라서 그런가 싶었다가 그럼 이 세상 관엽식물들은 모조리 같은 꽃말을 가지게 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러나 크루시아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크루시아가 변함없는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그 이면에 언제까지고 새로이 다시 한 몸으로 포개져서 시작하고자 하는 크루시아의 변함없는 노력이 있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사랑이 시작되는 처음에는 설레고 마냥 좋기만 한 마음이 가득이라 한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런 마음이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포개져서 바짝 붙어있던 마음도 슬슬 떨어지고 사이가 벌어지고, 싱그럽게까지 느껴지던 설레임도 무뎌지며, 인파 속에 파묻혀 있어도 단번에 찾아낼 정도로 빛이 나던 상대방의 광택은 점차로 희미해지고, 닿기만 해도 짜릿하던 보드라운 손길이 이내 투박하고 무덤덤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연인에서 부부가 되고, 점차로 ‘결혼한지 몇 년’이라는 햇수가 늘어나는 부부가 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랑으로 결혼한 부부지만, 30년이 넘는 시간을 존재조차 모르는 타인으로 살던 두 사람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결혼생활은 데이트나 여가 활동이나 여행의 연속이 아니라 생활의 총체다. 두 사람만 오롯이 생각하는 경우보다 가족 문제를 맞물려서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고, 잘 차려입고 화장한 얼굴로 마주하는 시간보다 구깃한 옷에 안 씻은 얼굴로 대하는 시간이 더 많고, 좋은 곳에서 누리던 작은 사치들 대신 금전적인 문제가 적나라하게 두 사람을 갉아대는 경우가 많아지고,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말을 듣는 대신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되고, 상대방의 향수를 맡는 것보다 개수대의 음식물쓰레기 냄새를 접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아질 수 있다.   


그러나, 크루시아가 끊임없이 한 몸으로 포개진 새 잎사귀를 내는 것처럼, 옆으로 벌어지되 두 손을 맞잡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노력한다면 변함없은 사랑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Henri Lautrec, La Lit, 1892


크루시아는 서명 식물 (autograph plant)이라고도 하여, 잎사귀에 스크래치를 내서 글씨를 쓰면 그대로 오래도록 지속된다고 한다. 크루시아는 뿌리로부터 물을 빨아올려서 일부는 초록살림에 쓰고 일부는 하늘로 날려보내면서도 전부를 소진하지 않고 얼마간의 물을 남겨 잎사귀에 두툼하게 품고 있나보다. 마치, 흘러간 세월이 몽땅 다 잊혀지지 않고 얼마간의 추억으로 남아 우리의 마음을 도톰하게 하는 것과 같고, 달달함과 설레임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사랑이 부부의 주변 곳곳에 도톰하게 배어드는 것과 같다. 크루시아의 잎사귀에 서명을 남길 수 있듯, 우리의 마음에도 추억이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깊게 서로에게 각인된다.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고도 하고 서로 닮은 사람을 찾아 부부가 된다고도 하는데, 무엇이 맞는 말이든, 부부의 연을 맺은 연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각인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루시아처럼만 살아도 참 행복한 부부겠구나, 크루시아의 초록살림을 곁에 두고 들여다보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크루시아가 손뼉치듯 부부도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12센티미터이던 크루시아가 30센티미터를 넘는 크루시아가 되도록 많은 잎들이 함께 돋아났고 또 그 많은 잎들이 여전히 두 손은 맞잡은 채 하늘을 향해 벌려져 있지만, 크루시아는 앞으로도 한 몸이 된 많은 잎들을 끊임없이 뽑아낼 것이고 맞잡은 두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렇게 살아야 겠다.





식물생각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크루시아

학명: Clusia rosea

영명: Clusia, Scotch attorney, Autograph Tree, Pitch-apple

생물학적 분류 (문/강/목/과/속): 속씨식물문쌍떡잎식물강 말피기목 클루시아과 클루시아속

원산지:  카리브 제도, 남아메리카


햇빛:

처음에 크루시아를 산 곳은 이수역 노점상이었는데, 아저씨 말씀이 “지하 피씨방에서도 살아”였다. 햇빛이 필요하지 않은 식물은 없겠지만, 크루시아는 햇빛이 많이 부족해도 큰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식물인 것 같다. 나는 북향 부엌 창틀에 놓고 키우다가 최근에는 베란다로 옮겼는데, 장기적으로는 거실 중간 즈음에놓을까 한다. 야외 공간 한 뼘 없이 실내에서 식물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아주 좋은 식물인 것 같다.


바람:

한 친구에게 크루시아를 선물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회사 책상에 놓을 식물을 생각하고 있었다며 좋아했다. 회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으니 집 꾸미는 것 못지 않게 본인의 책상도 신경 써서 정리하고 꾸미고 있다면서 말이다. 나도 백번 공감하지만 사무실에서 식물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고 식물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매번 실패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데, 햇빛보다는 바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친구도 크루시아를 잘 키워보겠다고 인공성장조명도 사고 (흡사 분홍빛 정육점 조명 같아서 회사 사람들로부터 조롱 섞인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역시 환기와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크루시아조차도 힘든가보다. 아, 우리 직장인들은 이렇게 식물도 견디기 힘든 곳에서 하루의 태반을 보내고 있구나.


물주기:

물주기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잎사귀에 수분을 머금고 있는 크루시아는 다육식물과도 유사한 성질이 있다고도 하고, 열대지방에서는 바위나 암석위에서 자라나서 그 일대를 다 덮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보면 건조함에 강한 식물인가 보다. 언제 줬더라 싶을정도로 간간이 흙이 많이 말라보일 때 주는 것이 좋겠다.


내한성/월동:

원산지가 따뜻한 혹은 더운 곳이다 보니 내한성은 약하다고 한다. 나는 실내에서만 키웠으므로 냉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겨울에는 영상 5도 이하를 내려가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성장:

일년 여 사이에 몸집이 두 배가 된 것 같다. 새끼잎이 돋아나는 것은 보여도 몸집이커진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일년전 사진을 보니 그 새 참 많이 컸다.


번식:

가지를 똑 하고 떼어내어서 물꽂이를 하면 뿌리가 난다고 한다.


매력포인트:

잎사귀에 각인을 남길 수 있는 특별한 식물이다.


유의사항: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노지 월동이 안 되어 주로 화분에 키우게 되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스리랑카에서는 크루시아가 골치라고 한다. 너무 잘 자라고 왕성하게 번식해서 거의 침입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생명력이 왕성하다는 것만 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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