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은 재미있다. 어둡고 심각하고 건조했던 감독의 영화는 작품 수를 거듭할수록 밝고 경쾌하고(물론 상대적인 개념이기는 하다) 어떤 때는 온기까지 느껴지는 쪽으로 옮아갔다. 그 변화의 과정에 정점에 있는 영화가 <극장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장전>이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이유, 우선 형식적 측면에서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옴니버스 형식을 활용하고 유사한 장면과 대사의 반복을 통해 기시감을 주고 컷트 보다는 줌-인과 줌-아웃 같은 카메라 워킹으로 변화 혹은 의미를 전달하는 등 <극장전>도 홍상수스러움으로 가득 찬 영화다. 그러나 그 느낌에서는 확연히 다른 작품이다. 왜일까?
우선 내레이션이 있다. 속마음을 들려주는 내레이션을 더하면서 그간 그저 관찰하기만 하던 관조적, 객관적 홍상수식 카메라가 영화스러움(통속적 개념, 일반적 개념의 영화)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음악을 모티브로 한 설정도 그렇다. 사실 홍상수 스타일에서 음악은 영화를 여는 것과 닫는 역할을 하는 타이틀 음악 정도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이 영화 <극장전>에서 ‘다시 사랑한다면’이라는 음악을 몇 차례 등장시키며 이를 통해 무엇인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시도를 느끼게 했다. 이 또한 기존의 홍상수스러움에서 다소 비껴 선 통속적 영화스러움의 모습인 것이다.
더불어 대사도 재미있다. 이전 작품에서는 ‘의미심장하기만’ 했다면 <극장전>의 대사는 재미가 있다. 마치 영화 속 대사를 보는 듯, 잘 짜인 느낌이라고 할까!
대개 이런 몇 가지 점을 들어서도 <극장전>은 흥미롭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 흥미롭고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시금 되돌아보고 생각하게끔 하는 호출의 힘이 있다. 특히 마치 나인 듯, 우리의 모습인 듯, 일상의 비루함과 상투성을 보여주면서 천연덕스럽게 혹은 기분 좋게 관객을 조롱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극장전>은 오랫동안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한 남자가 선배가 연출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영화 속 여주인공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어느 겨울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 영화>
<영화 밖 영화>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전반부는 영화 속 이야기고 후반부는 극장 밖 이야기다. 그래서 제목 <극장전>도 劇場傳과 劇場前 두 가지로 읽힌다. 즉, 극장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극장 앞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서 주목할 점이 눈에 띈다. 바로 ‘영화의 영화’라는 점이다. 즉 영화 속 영화 장면을 활용함으로써 상호텍스트성, 자기 반영성 등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과연, 홍상수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영화 같다”는 말…그 알쏭달쏭한 의미
우리는 흔히 “영화 같다”는 말을 쓴다. 이때 “영화 같다”는 말은 무엇일까? 이 말은 영화의 기능, 역할, 목적과도 일맥 하는 물음이다. 즉 영화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분법적 논의는 다소 바람직하지 않고 각각의 질문에도 수많은 가지치기가 가능하지만 논의의 명확성을 위해 이렇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라는 물음은 영화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즉 꿈, 상상 속 세계 등 우리가 보고 싶은 이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견해다. 이때 영화는 국카스텐 즉, 만화경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잊고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판타지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다른 물음 ‘영화는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인가?’는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라는 주장이다. 리얼리티! 영화는 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만화경이 아니라 미러, 거울이라는 견해다.
그렇다면 홍상수가 말하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 여기서 <극장전>이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
홍상수는 <극장전>에서 영화 속 모습을 보여주고 또 영화와 닮은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영화와 닮은 현실의 부분이다. 왜 현실이 영화와 닮았을까? 앞서 보여준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현실은 영화와 닮은 것일까? 이는 달리 말해 현실이 애쓰지 않아도 영화가 이미 현실과 닮아있기 때문에 현실은 영화와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극장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닮음의 관계는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극장전>은 먼저 영화를 보여준다. 여기서 영화의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이후 전개될 영화 밖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영화가 끝나고 이후 펼쳐진 영화 밖 현실은 무척 영화와 닮아 있다. 아니 영화와 닮으려고 애를 쓴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주인공 남자는 우연히 극장 앞에서 영화 속 여주인공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안경집 앞에서 기다렸다 그녀에게 악수를 청한다. 또 친구들과의 회식장소에 나타난 여주인공에서 남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래 ‘다시 사랑한다면’을 불러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결국 남자는 영화 속에서처럼 여주인공과 잠자리를 가진다.
홍상수는 <극장전>에서 영화 속 모습을 보여주고 또 영화와 닮은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과정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남자의 노력, 그것도 안타깝고 지질하기까지 한 처절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남자는 의식적이든,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든 영화를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혐의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서도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여주인공은 안경집 앞에서 악수를 청하는 남자에게 “영화네요. 그죠!”라고 말한다. 또 남자와 여주인공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남자는 “그 영화 속 이야기 다 내 얘기예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영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죽고 싶다”고 내뱉는다. 즉, 영화 밖 현실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이렇게 계속 영화를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따라 하기’는 여주인공의 결정적 한마디로 조롱당하고 만다. 남자가 계속 여주인공을 따라다니며 추근대자 여주인공은 남자에게 “영화를 잘 못 본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자기 재미 봤죠! 그럼 이만 뚝! 이제 집에 가세요. 집에 가서 쉬세요”라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애초에 어쩌면 우리는 영화를 국카스텐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영화가 거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런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기 위해 꿈의 세계를 부유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영화 같다”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다. “영화 같다” 마치 예상치 못한 꿈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 “영화 같다”를 위해 삶의 어느 한 모습을 영화처럼 따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현실이 영화인 듯 착각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상황을 <극장전>은 보여주고 있다. 여느 다른 영화들이 현실의 반영으로서, 영화 그 자체의 ‘자기 반영성’을 이야기할 때 어느새 영화를 닮아가고 있는 삶, 삶 자체의 ‘자기 반영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 속 우리가 “영화 같다”며 호들갑을 떨며 반긴 그 영화 속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투성과 지질함…안이나 밖이나 다름없는
<극장전>이 보여준 영화 속 장면의 내용도 간단하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른 남자, 대학 가기를 포기한 여자, 전부터 알던 사이인 둘은 우연히 만나고 1박 2일을 함께 보낸다. 술을 마시고 잠을 자고 죽기 위해 약을 사고 자살시도를 하지만 결국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로부터 욕을 먹고 뺨을 맞는다. 지질한 모습이다.
영화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결코 주인공들이 중심인 영화가 아니다. 왜 헤어졌는지, 왜 죽으려 하는지, 왜 잘못했다고 하는지 이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런 이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말보로 담배와 수면제, 머리를 말리는 헤어드라이어와 선풍기 만큼의 비중과 의미로 와 닿는다. 적어도 관객은 끊임없이 그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왜냐면 애초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상투적인, 습관적인, 진부한 그래서 종래는 지질하게 보이는 상황과 행동들인 것이다.
이처럼 극장 밖 현실의 주인공들이 은연중에 따라 하고자 했던 영화 속 모습은 이런 것이다. 결국 영화 밖 현실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상투적이고 습관적이고 진부하고 찌질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극장전>의 마지막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밖 일상의 남자가 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는 선배 감독(영화를 연출한)을 만난다. 여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감독은 영화에도 잠시 등장한 것으로 설정이 돼 있다. 그 덕분에 관객은 이미 그의 얼굴을 알고 있다. 어쨌든 선배 감독은 남자가 찾아오자 “죽기 싫다”고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배 감독은 “죽고 싶다”는 대사를 영화에서 사용했고 영화 밖 현실에서 여주인공까지 “죽고 싶다”는 말을 따라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감독은 “죽기 싫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후배 감독도 “미안하다”며 울부짖는데 이때 관객은 이를 결코 단순한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마치 죽어가는 영화를 바라보는 영화감독의 후회와 탄식, 안타까움, 미안함 등등…….
과연, 홍상수 감독의 의도가 진정 그러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번 작품 <극장전>을 통해서도 홍상수 감독은 세상의 상투성, 그 속에 떠돌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지질함을 제대로 표현했다. 그러나 <극장전>은 홍상수 감독이 앞으로 세상의 상투성에 대해 보여줄 태도를 조금은 달리할 것 같다는 암시를 남기는 작품이다. 그 단서는 영화 속 남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고 오래 살릴 수 있지’
이것은 감독으로서 그 자신의 의지를 담은 홍상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 관객들에게 던지는 홍상수의 요구사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