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날다 Feb 12. 2020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아...

세상 모든 '작은 아씨들'을 위한 위로와 응원

그레타 거윅다운 연출이었다. 영화는 그녀의 연출작 <레이디 버드>와 닮아 있었고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프란시스 하>를 연상시켰다. 아슬아슬 넘어질 듯 달리고, 또박또박 자기 주장에 열심이며, 울다 웃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다 결국 그런 자신을 다독이는 여성이 등장하는……그래서 반갑고 따뜻하고 뭉클했다.  

    

<작은 아씨들>은 ‘여성주의’ 영화다. 영화를 함께 만든 이들의 면면부터가 그렇다.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연출, 각본 그리고 직접 출연한 전작들-<메기스 플랜>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프란시스 하> <레이디 버드> 등-에서 또래 여성들의 생각을 대변해 왔다. 또 감독의 페르소나인 시얼샤 로넌을 비롯해 엠마 왓슨, 엘리자 스캔런, 플로렌스 퓨도 스크린 안과 밖에서 자기 주장이 뚜렷한 여성 배우들이다. 여기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메릴 스트립과 로라 던까지, ‘여성들의 의기투합’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조합이다.      

또 그레타 거윅 감독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네 자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강조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원작 소설이나 다른 버전의 영화가 작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둘째 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허영심이 많았던 메기는 연기하고 노래하는 배우로, 둘째 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 쓰는 작가로, 아프고 약하기만 했던 셋째 베스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가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던 철없는 막내 에이미는 인상주의 작가들을 질투하는 열정 많은 화가로 변신했다. 각자의 재능을 즐기고 성장시키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그녀들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단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영화는 범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은 빛나는 어린 시절과 성장 이후 회색빛 현실을 플래시 백과 플래시 포워드로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유년 시절, 그 꿈만으로도 화사하게 빛났던 네 자매는 꽉 막힌 현실 속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대사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작은 아씨들’로부터도 공감과 지지를 얻는다.       


“요즘은 도덕이 안 팔린다. 주인공이 여자라면 결혼시키든가 죽이든가 해야 팔린다.” - 주간지 편집장

“혼자 힘으로 사는 이는 없어. 여자는 결혼하지 않으면 배우가 되거나 사창가로 가야 해!” - 대고모     


주간지 편집장과 돈 많은 대고모는 여성들에게 가혹한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며 충고한다. 하지만 자매는 부당한 시대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여성도 감정만 있는 게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 조 마치

“여자는 돈을 벌 방법이 없어. 결혼해도 남편 소유, 아이도 낳으면 남편 소유야!” - 에이미 마치     


자매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다운 방식으로 삶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가난하지만 믿고 의지하는 사랑을 선택한 메기, 불평등한 협상이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책 출판에 성공한 조, 하늘나라로 갔지만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한 베스, 백마 탄 왕자 대신 자신을 이해해 주는 남성과의 결혼을 선택한 에이미까지. 그런 딸들에게 엄마(마치 부인)는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적인 응원의 말을 들려준다.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 엄마, 마치 부인


이 말은 영화 속 작은 아씨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이, 또 무려 152년 전(<작은 아씨들> 출판 연도가 1868년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이 세상의 모든 작은 아씨들에게 던 메시지인 것이다.


* 에필로그 *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 수많은 여자 아이들은 <작은 아씨들>을 읽으면서 주인공 조 마치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조를 닮아 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조금은 덜 여성적이고, 조금은 씩씩하고, 글을 쓰는……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그렇게 조를 닮고 싶어 했던 유년 시절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슴이 뛰었는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했는지, 소중하게 품었던 꿈과 열정, 이상과 설렘이 북받쳐 올랐다. 그리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작은 아씨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 너무나 영민하고 언제나 빛이 났던 그녀들이 문득, 그리웠다.      


때마침 짬짬이 과외를 하며 아이 키우기에 열정을 쏟던 후배가 경력단절의 고리를 끊겠다며, application 작성을 도와 달라고 한다. 또 다니던 직장을 걷어차고 암중모색 재충전을 하던 또 다른 후배는 자신과 잘 맞는 새 직장에 당당하게 입사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모두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은 천성을 지닌 ‘작은 아씨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미러인가? 국카스텐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