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날다 Jan 15. 2016

일상, 그 조용한 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카페 뤼미에르>

허우 샤오시엔에 대한 고정관념


 대만 뉴웨이브의 기수, 허우 샤오시엔.

 세계 유수의 영화제 수상이라는 명성과 별개로 그는 유난히 국내 관객과 친숙하다. 아시아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잊지 않고 꾸준히 찾아 주어 공간적 거리감을 줄였고 그를 통해 마치 국내 감독을 만나는 것과 같은 친밀감, 즉 정서적 거리도 좁힌 것이다.

 그러나 멀지 않은 이웃나라 감독이기 때문에 또 우리나라를 자주 찾았기 때문에, 비단 이런 이유만으로 그에게 국내 관객들이 더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이, 그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비정성시>(1983년)를 비롯해 <희몽인생>(1993년), <호남호녀>(1995년), <밀레니엄 맘보>(2001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모든 작품을 보면서 우리 관객들은 일정 정도의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슬픔의 도시(City of sadness)’를 뜻하는 <비정성시>는 1940~50년대 중국 국공내전을 소재로 한 서사극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희몽인생><호남호녀><밀레니엄 맘보>는 이른바 대만 현대사 3부작으로 불린다. 즉,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민족 분쟁, 식민지 시대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역사의 시간 속에 인간의 문제를 영화로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고 민족 분쟁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결코 멀지 않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자연 공감의 폭은 크고 그로 인한 정서적 울림 또한 깊었을 것이다.

 그런데 <카페 뤼미에르>(2005년)를 통해 허우 샤오시엔은 그러한 일반의 정서에 균열을 냈다. 적어도 작품의 외형적인 이미지, 표피적인 정서는 그랬다. <카페 뤼미에르>는 처음, 무척 낯선 영화로 다가왔다.

 우선 배경이 일본이다. 등장인물도 모두 일본인이다. 그리고 그가 천착했던 역사, 시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저 조용히 움직이고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풍경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껏 가졌던 허우 샤우시엔 감독에 대한 일반의 정서는 편견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대만 뉴웨이브의 틀을 벗고 다른 공간,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제목도 궁금하다. 왜, ‘뤼미에르’일까?

 이런 의문을 갖고 보게 된 영화 <카페 뤼미에르>, 영화는 예상대로 심심했다. 그러나 결코 얕지 않았다. 깊고 오래 지속될 여운을 남겼다. 러닝타임 1시간 40여분에 불과한 단 한 편의 영화가 11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영화, 그 자체의 역사와 시간을 불러내고 그 속에서 삶은 어떤 모습으로 오고 가는지를 보여주었다. 달리 말해 영화는 그리고 삶은  ‘운동-이미지’로 시작해서 어떻게 ‘시간-이미지’로 옮아갔는지를 설득하고 있었다. 들뢰즈의 설명처럼 말이다.


카페 뤼미에르혹은 가배시광(嘉排時光)’


 영화의 배경은 일본의 동경, 그리고 여름이다. 줄거리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이 된다.

 하나는 주인공과 그의 부모, 다른 하나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를 중심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를 조용히 들려주고 그들 주변의 풍경을 과장 없이 보여준다.

 전철이 지나다니는 도심, 대만 여행에서 막 돌아온 프리랜서 작가 요코는 부모님 댁에 찾아간다. 유난히 피곤해하던 요코, 그 이유인 임신 사실을 툭 던지든 알린다. 그러나 요코는 아이의 아버지인 대만인 남자친구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그냥 미혼모가 되겠다고 말한다. 부모는 당황하고 걱정이 되지만 구체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딸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무거운 침묵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대신할 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딸 요코가 사는 집에 찾아가 한 끼 밥을 지어주고 같이 밥을 먹고 그저 평범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일뿐이다.

 요코는 하지메와 오랜 친구사이다. 하지메는 고서점을 운영한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마다 갖가지 전철 주변의 소음을 녹음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이런 철도 마니아 하지메를 위해 요코는 대만에서 사온 오래된 철도 운전사의 회중시계를 선물한다.

 요코와 하지메는 대만 출신의 일본 음악가 장웬예에 대해 함께 조사하고 그가 자주 찾던 동경의 옛 장소를 찾아다닌다. 그러던 중 요코는 하지메에게도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다. 요코에게 호감이 있었던 하지메, 실망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메는 요코를 지켜보고 오히려 보살핀다. 그는 자신의 그래픽 작업을 요코에게 보여주고 요코의 꿈, 악몽에 대해 이야기하며 위로한다.

 요코는 취재를 위해 사진기로 이미지를 모은다. 또 하지메는 소리를 모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열차를 타고 오고 간다. 각기 다른 열차에 탄 두 사람은 서로가 알지 못하는 부지불식의 모습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열차를 기다리며 나란히 서 있다. 수많은 전철이 도심을 오고 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오즈 야스지로라는 거울 앞에서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자막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즉,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경배를 목적으로, 그의 오마주를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오즈의 영화 <동경이야기>(1953)를 오마주한 영화인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1903~1963), 미조구치 겐지, 구로자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의 3대 영화 대가로 불린다. 그들 중 오즈 야스지로는 일본의 전통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 서민 가정의 일상을 관조적인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삶의 이야기 인생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지극히 정적인 화면, 마치 수묵화를 그리듯 부피감, 입체감보다는 선과 여백을 중시하는 미장센이 특징인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각 영화는 어떤 행동이나 사건보다는 정물화의 한 장면처럼 대상과 풍경을 오랫동안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공간을 더 자세히 응시하도록 요구한다. 특히 오즈 샷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다다미 숏’은 그의 전매특허이기도 하고 일본 영화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오즈 야스지로의 연출기법과 정서를 <카페 뤼미에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프레임을 긴 롱테이크 샷으로 오래 바라본다. 프레임 안은 사건도, 인물도 주인공이 아니다. 그 안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와 커튼, 전화벨 소리, 목소리로만 들리는 대화 등등 다양한 물체와 풍경, 이야기가 존재한다. 절대 무엇을 보라고 강요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오래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을 어느덧 가깝게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요코가 부모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여지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숏처럼 인물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는 않지만 카메라는 조금 낮은 곳에서 조금 비켜서서 그 모든 것을 오래 그대로 지켜본다. 프레임 안에서 인물들은 오고 가면서 무심한 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거나 또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요를 받지는 않는다. 마치 우리들 대부분의 일상이 그렇듯 말이다.

요코와 하지메가 만나는 모습도 그렇다. 두 사람을 잡은 프레임은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두 주인공 역시 큰 움직임 없이 끊었다 이었다 단속적으로 마치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들 모두가 그러하듯 대화를 이어간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러다보면 어느새 관객도 그들 대화 속으로 동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앞선 시대 오즈 야스지로가 그랬던 것처럼 허우샤오시엔 역시 그의 대다수 작품 속에서 조용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개인 혹은 가족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은 살아있는 인간만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건 등 비인간적인 캐릭터들의 역할이 크다. 프레임은 구석에 놓인 가구와, 문, 창문, 벽 등 무생물의 정물에게도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은 때론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대신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과 역사의 이미지를 대체하기도 한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마치 오즈 야스지로를 따라간 듯 일상성에 천착한다. 그러나 그의 프레임은 오마주 하지만 단지 따라 하기, 재현에 그치지 않았다. 더 깊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평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그 속에서 과거의 시간, 역사의 의미를 좇고 오늘날 조금은 달라진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한다. 바로 주의 깊은 인지를 요구하는 사물에 대한 응시를 통해 회상-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재적인 이미지가 현실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꿈-이미지, 세계-이미지까지 연결시켜 본격적인 시간-이미지를 예고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이것은 허우샤오시엔의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허우샤오시엔이 불러낸 것은 오즈 야스지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 움직임(운동-이미지)에서 역사(시간-이미지)……


 <카페 뤼미에르>는 이처럼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영화 제작의 배경으로 밝히고 있지만 그 속에는 중의적인, 아니 그 이상의 다층적인 의미를 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 첫 번째 혐의는 제목에 있다. 기실, 이 영화의 제목은 ‘가배시광(嘉排時光)’이다.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기 위한 평온한 한 때’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제목으로 거기에  걸맞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던 영화는 왜, <카페 뤼미에르>라는 또 다른 제목을 얻게 되었을까?

 ‘뤼미에르’, 바로 최초의 무성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기차의 도착, 그렇다. 이 기차라는 이미지를 통해 허우샤우시엔은 뤼미에르부터 오즈 야스지로를 통과해 영화의 시간, 삶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기차가 달리는 이미지’, 이는 대표적인 운동-이미지의 사례일 것이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자체를 특별히 인지하게 하고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하는 지각-이미지이고 그 사물에 대해 행사하는 가능한 행동 혹은 반작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미지이다. 더불어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간격을 채우지도 메우지도 않으면서 망설이고 또 주저하는 중심, 감화-이미지까지, 움직이는 기차의 이미지는 선형적인 연결성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장치고 동인인 것이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은 오즈 야스지로의 ‘조용한 응시’를 불러내면서 ‘달리는 기차’의 이미지를 반복되는 삶의 모습, 시간과 역사의 문제로 치환, 진화시킨다. 즉, 선형적인 연결성이 아니라 머무르고 순환하고 사유하는 ‘시간-이미지’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내용적으로는 요코 그리고 대만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또 대만 출신 일본 음악가 장원예의 이야기를 통해 상징화되고 이미지적으로는 반복되는 기차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들뢰즈가 말한 ‘주의 깊은 인지’라는 장치를 통해 관객을 대상에 머무르게 하고 그 속에서  현재뿐 아니라 과거, 또 그로부터 전망되는 미래까지 가늠하게 하고 있다. 바로 시간-이미지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카페 뤼미에르>가 주목되는 점은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 행위자-미디어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 요코와 하지메는 함께 대만 출신 일본 음악가 장원예의 과거 기록을 찾으러 다닌다. 이는 현재-과거-미래라는 시간 이미지에 대한 주의 깊은 인지를 부르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일본과 대만의 과거 관계와 현재의 상황, 그리고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전망까지를 하나로 사유하게 하는 이미지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요코는 이 과정에서 사진을 찍는다. 또 하지메는 소리를 채집한다. 이는 영화의 구성요소인 이미지와 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두 주인공을 통해 삶의 이야기, 시간의 이야기, 역사의 이야기를 모으고 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영화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우는 왜 오즈를 선택했을까?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담백하다 못해 심심한 영화다. 우선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이중, 삼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그 맥락이 궤를 맞춘 모습이 질서 정연하다. 한마디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과 대만 두 나라 혹은 나아가서 아시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기획자들의 우선 생각이었을 것이다. 맞다. 허우 샤오시엔 역시 그러한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충분히 전했다고 본다.

 요코와 요코의 대만인 남자친구의 관계에서 그리고 대만 출신 일본인 음악가 장원예에 대한 언급에서 아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야스지로를 빌어, 아시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 영화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형적 연결성이라는 운동-이미지 중심의 전 시대 영화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시점으로 호출하고 인식하게 하는 시간-이미지 중심의 영화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불과 1시간 40여분 남짓, 영화는 1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영화의 기원을 불러냈고 그 이후 모든 영화가 표현해온 이야기가 선형적 연결성이 아닌 순환하는 시간의 역사였음을 단번에 확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고 일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 곁의 일상을 조용히 그리고 오래 응시해야 한다는 것을 낮고 강한 목소리로 전한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은 단 하나의 작품으로 오즈를 불러냈고 뤼미에르 형제까지 만나게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은 삶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