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사회문화적 의미
왜, 예술인가? 그리고 왜, 영화인가?
우리는 왜 극장에 가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미술관에 가는가? 연극·회화·음악·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연극, 회화, 음악, 영화 등등을 보려고 하는가? 바로 이것이 ‘예술의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고 오늘 이 글이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다.
사실, 예술의 기능은 명제에 가깝다.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다수의 학자와 여러 연구, 주장은 예술의 기능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중 유네스코가 예술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제시한 예술의 10가지-발견, 강화, 표현, 기록, 의사소통, 해석, 개혁, 고조, 질서, 통합- 기능은 주목할만하다.
이런 유네스코의 정의에 조금만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통해 익힌 예술의 기능을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예술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타인과 나누며 소통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그래서 예술적 창작에 직접 나서기도 하고 종래에는 스스로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또한 예술의 기능은 개인적 의미에 머무르지 않는다. 저항과 개혁, 혁명, 질서, 통합까지 정치 사회적 목적을 위해 예술이 행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즐거움과 감동을 얻지만 때론 괴로움을 느끼며 삶의 태도를 바꾸는 큰 결정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삶 자체가 되는 셈이다.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바로 그렇다. 예술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의 장르를 영화로 택했다. 왜, 영화였을까?
1911년, 이탈리아 평론가 리치오토 까뉴도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 명명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인류가 탄생시킨 예술 가운데 막내로 인정받으며 기술이 아니라 예술로 그 존재가 격상되었다. 더불어 영화는 인류가 만들고 즐기고 함께해온 모든 예술장르의 특징을 모은 종합적 성격을 가진 예술로서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실상 영화는 회화적 성격을 가진다. 또한 행동과 대화(대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연극과 가장 유사한 장르다. 연극적 성격이 강하다는 이야기는 자연 문학에도 빚진 바가 분명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건축, 음악, 무용, 조각 등 모든 예술장르를 어떻게든 활용할 수 있고 그것이 부분적이기도 하고 전체적 혹은 결정적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영화는 모든 예술을 대변해 이야기를 펼칠 수가 있다. 그리고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그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즉 무대를 영화화한 것, 또 복역 죄수들의 실제 이야기를 극화했다는 것-물론 이런 의미도 매우 크고 중요한 시도이다-,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
사실과 허구, 무대와 영상, 흑백과 칼라 등등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통합이라는 방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를 통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혀 무관한 것처럼 존재하던 것을 서로 바라보게 하고 그것이 결국 하나가 되어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내포한 의미(함의)를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방식은 영상의 다양한 구성요소를 활용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서다.
먼저, 영화의 형식과 소재의 선택 그 배경을 고찰하고 이전 영화 역사적 맥락에서 유사성과 차이점을 찾을 것이다. 이어 색채, 사운드, 로케이션, 카메라 워크, 시간성, 편집 등 영상 요소 별로 특징을 찾아내고 분석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내포한 사회문화적 함의를 전개할 것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어떤 영화인가?
이 글의 분석 대상인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Cesare deve morire, Caesar Must Die)>(2012년, 드라마·이탈리·77분)는 기존 극영화와는 다른 전개 방식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영화는 이탈리아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다. 복역 중인 수감자들의 교화 프로그램으로 진행한 연극 공연에 대한 이야기로 실제 공연 장면과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연습과정을 팔로우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영화는 제62회 베를린 영화제 황금공삼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대종상이라고 불리는 다비느 디 도나텔로의 전 부문을 석권했고 올해 팜 스프링스 국제영화제에서는 주연을 맡은 세 배우 모두 남우주연상을 받아 재소자가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낳기도 했다.
이런 성취는 영화적 완성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못지않은 새로운 시도와 실험정신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와 실험정신은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력에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형제 감독인 파울로&비토리오 타비아니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형 비토리오는 1929년, 동생 파올로는 1931년 태어났다. 이들의 영화 이력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영화사조인 ‘네오리얼리즘’과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들은 활동 초기 다큐멘터리에 천착했고 데뷔 이후 극영화에서는 네오리얼리즘을 기조로 자신들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고 한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은 연기 경험이 없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하는데 관용적이다. 또 스튜디오 등 안정된 촬영보다는 길거리 등 야외 촬영 장면을 선호해 관객들에게 사실적인 공감을 얻어내는데 주력했다. 사운드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것은 가능한 배제하고 실제 소리를 강조하는 편이다. 때로는 뉴스의 필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 본다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형식적 특징은 상당 부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라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 앞으로 전개할 영상분석도 이러한 특징을 찾고 그 쓰임에 따른 효과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1) 색채 미학…‘흑백 현실’을 거부감 없이 재현하다
영화는 첫 장면으로 연극 공연 장면을 보여준다. 블루투스의 죽음 씬이다. 이때의 색감은 화려한 칼라다. 특히 붉은색 느낌이 강하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전사들의 격앙된 심리상태를 비롯한 전쟁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연극적 장치일 것이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의 기립박수 속에 무대 위 배우들은 말 그대로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고 즐거워한다. 관객이 떠난 후 텅 빈 객석, 그리고 철창문이 열리고 무대 위 배우들은 다시 감옥 안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간다. ‘레비비아 교도소 엄중 경비동’이라는 글이 선명하다. 화려한 무대 위 배우에서 사회로부터 격리된 중범죄인으로 급반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다음 씬부터 칼라를 버리고 흑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또 영화는 흥미롭게도 이렇게 시작한 5분 내외의 도입부를 말미에 똑 같이 다시 한번 반복해 보여준다. 물론 이 때도 색채는 칼라다. 즉 도입과 결말 부에 보여준 완성된 연극무대만 칼라로 표현하고 그 나머지 전체 러닝타임 77분 가운데 65분여를 흑백으로 처리한 것이다. 무엇을 전달하려고 한 것일까?
칼라와 흑백의 변화. 그것은 이 영화의 독특한 형식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리고 그 의미는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시간의 변화다. 영화가 처음 칼라에서 흑백으로 넘어갈 때, 6개월 전이라는 자막이 뜬다. 즉 영화적 시점이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쉬백이 이루어지고 이때부터 모든 과거는 흑백으로 처리하겠다는 창작자의 의도를 밝힌 부분이다. 그 선언대로 영화는 현재의 무대로 돌아올 때까지 딱 한 번의 커트를 제외하고 전 분량을 흑백으로 처리한다.
칼라로 처리된 유일한 커트는 감옥 도서관에서의 연습 장면 도중 보여진 벽에 걸린 사진액자(바다와 섬을 촬영한)이다. 이 사진액자 또한 처음 흑백으로 한 번 보여준다. 그러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그동안 억눌렀던 갈등을 폭발시키는데 이로 인해 연극 공연이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다.
이때 벽에 걸린 사진액자가 처음에는 흑백으로 보인다. 이어 주인공들이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연습장소로 돌아오자 사진액자는 다시 칼라로 보인다. 이는 한 등장인물의 시점 샷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즉 연극이 무산될까 걱정했지만 결국 간절히 원하는 연극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자 무대(칼라)를 향한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되었다는 심리의 반영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실제와 허구의 경계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범죄로 감옥에 갇힌 재소자들이 실제 수행한 교화프로그램을 영화화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이 모티브가 되기는 했지만 영화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극이다. 정해진 장소에서 배우들은 미리 작성한 대사를 연기한 것이다. 우발적인 상황을 촬영해 사후 편집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시나리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썼을 것이다. 극적 긴장감 혹은 재미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없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영화는 오로지 연극 연습에 몰두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쫓고 있다. 개인적 사연, 그들의 주변 스토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실제 현실을 의미하는 ‘다큐’와 가공의 스토리라는 ‘극’ 이중의 틀을 갖고 있고 이런 이중의 틀을 구분 짓기 위해 색채를 칼라와 흑백으로 나눠 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색채는 현실과 연극의 경계이기도 하고 배우와 죄수의 구분이기도 하다. 비록 모든 장면이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연습의 과정이긴 하지만 엄연히 그곳은 감옥이고 그 안의 등장인물은 죄수들이다. 그리고 이때의 색채는 흑백이다. 바로 감옥이라는 공간적 제약, 죄수라는 도망갈 수 없는 정체성의 순간, 그 영역을 흑백으로 표현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흑백 화면 속 죄수들은 양심이 울리는 내적 갈등과 동료들에 대한 애증의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시저가 되고 블루투스가 되어 연기를 펼친다. 흑백 화면 속에서 말이다. 감옥이고 죄수지만 그 현실 그대로의 순간에 진짜 배우가 되어 멋진 무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관객들은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넘어선 질적 전환, 비약을 느끼고 기쁨 그 이상의 감동을 맛보게 된다.
(2) 인물 중심 화면 구성… 연기, 그 너머의 연기를 포착하는 점층적 보기
화면 구성 면에서 본다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지극히 지루한 영화임에 분명하다. 무대와 감옥이 배경의 전부이고 이 또한 다르게 보여주고자 하는 배려가 전혀 없다. (물론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감옥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풀 샷이 2, 3번 등장하고 감옥의 특정 시설을 마치 무대인 냥 활용해 촬영한 연습장면은 장소의 선택에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 부분은 이후 ‘로케이션’에 대한 고찰에서 다시 다루고자 한다.)
특히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의 그룹 샷 이외 관심을 가질만한 다른 인물, 특히 여성이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같은 옷을 입은 배우들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보여주기 위한 친절함이나 상업적 화면 구성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는 달리 말해, 흔한 관습적 이데올로기와는 철저하게 무관한 화면 연출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연출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창작자의 ‘의도’를 뺀 화면 연출이 특징이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특별한 렌즈의 활용도 찾아보기 힘들다.
극 초반부, 연극에 참여할 배우들을 선발하는 오디션 장면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중요한 대목이다. 왜냐면 등장인물들의 배경을 부족하나마 설명하는 내용으로 어찌 보면 첫 단추를 꿰는 핵심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카메라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똑같은 사이즈를 허락하고 줌-인(Zoom in)도, 줌-아웃(Zoom out)도 그 어떠한 카메라 워크를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인써트(Insert:화면 삽입)도 없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격한 반응을 보일 때 관객들은 어색한 낯선 느낌을 받게 된다. 그때, 관객과 등장인물 간의 거리는 지극히 객관적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후에도 같은 태도를 견지한다. 예컨대 블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시저의 암살을 모의하는 장면을 잡고 이어 그 앞으로 시저와 안토니가 등장해 지나간다. 다시 뒤에 있던 블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앞으로 나설 때까지 3-4분의 시간 동안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정지해 같은 사이즈를 유지한다. 오로지 인물들의 움직임만으로 화면을 연출한 것이다. 마치 연극의 장면을 촬영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다 카메라가 제한적이지만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협소한 장소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움직임은 인색하다. 배우들의 연습이 밀도를 더해가면서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것도 달리(Dolly)와 같은 움직임은 없고 팬(Pan) 정도가 고작이다. 높낮이의 변화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간혹 쓰이는 로 앵글(Low Angle)- 카메라는 시저를 잡을 때 그를 권위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로앵글로 보여준다-이 오히려 강조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전체 영화 가운데 가장 큰 극적 긴장감을 주는 장면에 이르러서 카메라는 많은 것을 담아내려 애쓴다. 시저의 죽음, 그리고 광장 군중 들 앞에서 시저의 죽음에 대한 진실공방이 벌어지는 장면이다. 이때는 마치 그 장소가 감옥이라는 사실도 잊게 만들 정도로 박진감과 긴장감이 넘친다. 왜 일까?
위로 철창이 쳐진 세로형 이동통로, 아무런 장식 없이 휑한 광장 등 연극적 상황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장소를 선택한 점이 우선 큰 요인일 것이고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가 최고의 완성도에 닿아 보는 이들을 한껏 고무시키고 있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감옥 속 다른 동료들의 동참이다. 이들은 마치 시저 시대 로마 시민이 된 냥, “일어나라, 봉기하라!”를 외친다. 바로 이때가 실제와 허구, 삶과 연극이 경계를 허문 또 한 번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즉 이 영화에서 화면 구성은 오로지 인물 중심으로 진행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어떠한 의도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고집스럽게 객관적 앵글을 유지한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현실을 뛰어넘어 극 속 자아로 몰입하면서 카메라도 관객들에게 그 몰입의 기회를 조금씩 제공한다. 배우들의 표정, 움직임을 따라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허물어진 절정의 순간에는 보다 많은 인물, 다양한 앵글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그 마무리는 결국 감옥 전체를 보여주는 풀샷이다. 이는 그래도 변함없는 현실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3) 편집의 미학… 객관적 시간성 그리고 반복 편집을 통한 주제 강화
편집은 의도된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쇼트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법칙이다. 이때 쇼트와 쇼트 사이는 수용자들이 혼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연속성 즉, 컨티뉴어티(Continuity)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편집은 연속성만을 위한 단순한 배열은 아니다. 어떤 의도를 포함하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을 통해 창작자는 화면 안에 있지 않는 의미까지 창출해야 한다.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전체 러닝타임이 77분이다. 영상 창작의 과정에 등장하는 시간성의 여러 개념 가운데 주로 객관적 시간만을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연극 연습의 전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선택한 씬(장면)은 과정을 줄이고 건너뛰지 않고 충실하게 보여준다. 또 등장인물들의 내적 시간을 보여주는 일도 없다. 리얼타임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객관적 시간성이 가지는 한계를 ‘반복 편집’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
먼저 영화 처음과 끝에 똑같은 무대공연 장면을 배치했다. 종종, 같은 상황을 등장하는 주인공의 시점마다 달리 전개해 비교해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하는 예는 종종 있다.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똑같은 씬, 다르지 않은 커트를 그대로 보여준다. 왜 일까?
그건 관객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싶다. 같은 등장인물, 같은 대사, 같은 서사, 같은 무대지만 실제(현실)의 과정을 함께 한 후 보는 것과 보기 전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라는 거다. 그리고 아마 모든 관객들은 그 울림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술적 체험의 과정인 것이다. 그저 보는 것과 예술이 삶이 되고 난 후 보는 것의 차이, 이 것이 영화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래서 이러한 반복 편집은 영화에서 단순한 물리적 배치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례는 영화 속에서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지극히 객관적이어서 무미건조한 영화의 전체적 편집 흐름에 깊은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예컨대, 도입부에서 환호성과 함께 연극 공연을 끝낸 배우들이 다시 자신의 좁은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배우들만 바뀔 뿐이지 간수가 문을 여는 모습, 배우들이 서 있는 모습, 들어가는 동작 모두가 똑같다. 그리고 이 장면은 다시 후반부 연극 공연이 끝난 후 또다시 반복된다. 배우와 죄수, 예술과 삶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복 편집을 통해 그 뜻을 강화하고 있다.
또 유일하게 밤, 감옥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적막한 그곳 그리고 실제 그곳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의 고통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때도 창작자는 반복 편집을 활용한다. 침대에 누워 오로지 천장만 바라보는 죄수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빌어 ‘우리는 천장 관찰자다. 하지만 아무리 천장을 보지만 만질 수는 없다’는 절망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어둠 속 감옥의 풍경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는 사운드 사용도 극히 자제하고 있다. 특징적인 효과음도 없고 기억나는 주제음악도 없다. 그저 음울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배경음악이 몇 장면 등장할 뿐이다.
다만 등장인물이 직접 연주하는 하모니카 사운드가 흥미롭다. 등장인물이 연주를 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하모니카 소리를 스토리 공간 속 사운드(다이제틱 사운드)로 활용하다. 어느새 오프 스크린 사운드로 전환,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배경음악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하모니카는 실제 현실 장면에서도 죄수와 함께 등장하고 로마 병사로 변한 인물과 함께 연극 속 장면에도 등장해 예술과 삶, 현실과 무대를 연결시켜주는 매개물로서 의미를 갖는다.
왜, 시저는 죽어야 하는가?
동굴벽화, 또는 광장에서의 연극 공연 등 인류 초기 자연스럽게 등장한 예술은 모두가 삶의 반영이었다. 즉, 예술은 삶의 거울이었다는 이야기다. 그 방식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기교를 낳게 된다. 예컨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재현, 비틀어 보여주는 풍자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예술은 삶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목적, 상업적 이익, 계급과 성별, 지역 등 각종 이데올로기 등이 예술의 본질을 가리고 잊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삶 자체의 변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예술이 멀어지면서 삶은 감옥이 되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다.
감독은 왜 감옥을 택했을까? 그리고 왜 죄수들을 캐스팅했을까?
어쩌면 이 프로젝트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흔한 휴먼 다큐멘터리 정도로 끝날 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몇 년 전 우리나라 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하모니>와 같은 극영화로 재구성되어 관객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경우도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큐를 본 관객 그 어느 누구도, 또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린 관객 그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탁월한 것이다. 예술의 한 장르이면서 모든 예술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예술의 본질적 역할(기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 동행한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에게 자유로운 삶을 위한 조건과 그 한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영화의 창작자 비토리오와 파올로 타비아니 감독은 인터뷰에서 <율리어스 시저> 외에 다른 작품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배우들에게는 오래되었든 최근의 것이든 청산해야 할 과거가 있다. 악행과 실수, 위법, 잘못된 관계들로 점철된 과거다. 그 과거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스토리로 그들과 대면해야 했다. 우리는 인류의 위대하면서도 측은한 관계들, 우정, 배신, 권력, 자유, 의심, 그리고 살인까지 이 이탈리안 영화 버전 “줄리어스 시저”에 담았다.
배우 중 몇 명은 한때 “men of honour”(갱단)에 몸 담았었는데, 극 중 안토니오가 규탄하는 장면에서 “men of honour”가 쓰이기도 했다. 시저의 암살 장면을 찍는 날, 우리는 단검을 든 배우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동일한 살인 충동을 찾으라고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고 그 말을 취소할 수 있다면 취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겐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첫 번째 실습이었던 것이다. “ <출처: 인터넷 DAUM>
실제로 영화 속에서 죄수이면서 배우들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영화 속 대사가 실제 자신의 과거와 일치하는 경험을 하면서 깊은 후회와 자책에 빠진다. 그리고 무기수로서 오랜 기간 한 감옥에서 생활한 동료를 혐오하는 마음을 여과 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그들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 속 블루투스와 시저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또다시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연극 속 즉 허구 속에 존재하는 그들의 또 다른 자아를 통해 새로운 선택을 한다. 바로 이 과정, 예술이 삶을 바꾸는 놀라운 기적을 영화는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감독은 일관된 입장을 유지한다. 바로 리얼리즘이다.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죄수들을 캐스팅하고 카메라는 보도프로그램과 같은 객관적 태도를 지킨다. 또한 자칫 감정의 과잉을 유도할 수 있는 음악도 최대한 자제하고 화면의 색감도 평면적인 흑백 톤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장치들은 등장인물의 움직임, 표정, 궁극적으로 그들의 내적 심리의 변화까지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등장하는 배우(죄수)와 동일시의 과정을 밟게 된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군.”
카시우스 역을 맡았던 무기징역수 코시 모레가의 독백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독백으로 관객은 그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한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감옥은 아닌지? 내가 바로 죄수는 아닌지?’ 바로 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순간이다.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정답은 아닐지라도)을 찾기 위해 예술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영화의 주장이다. 그리고 또한 놀랍게도 영화 속 한 장면 속에 이런 메시지를 숨겨 두고 있다. 시저가 죽은 후 블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외침으로.
“시저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나라의 작가에 의해 글로 쓰여져 또 이렇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이 대사는 결코 연극 속 혹은 영화 속 대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저의 죽음은 예술의 생명력을 의미하고 곧 삶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코시무레가의 독백은 더 큰 울림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이 삶이고 삶이 예술이라는 명제를 전하기 위해 앞으로도 시저는 계속 죽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줄리어스 시저>가 아닌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제목으로 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