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에 홍두깨도 아니고, 몰입하며 드라마(스물다섯스물하나)를 보고 있는데 오래전 딸에게 해 준 나의 말이 대사가 되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넌 실력이 비탈길처럼 늘 것 같지? 아니야. 실력은 계단처럼 늘어”
허허! 그것 참. 같아도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딸이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수학시험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고 오랜 고민 끝에 학원을 보내게 되었는데 아이의 좌절이 생각보다 컸다. 그런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하다 바로 그 ‘계단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때 아이의 눈빛이 유난히 진지해서 오랜만에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한 듯 뿌듯함이 컸다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나의 ‘계단 이야기’는 그럴듯한 배경지식이 뒷배가 되어 주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양이 축적되어야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유명한 ‘양질 전환의 법칙’을 계단에 비유한 것이었다. 노력이라는 양을 쌓으며 걸어가다 보면 질적 변화의 순간, 즉 계단을 만나 딛고 올라설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드라마 속 ‘계단 이야기’는 그저 “실력은 계단처럼 는다”는 이야기만 할 뿐 왜 그런지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아쉬운 대목이다.
인기 드라마에 내 말이 쓰였으니 어쩌면 지식재산권을 주장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 사람 누구도 그 말이 원래 내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없고, 나 또한 그것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 지식재산권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지식재산권은 무료 드라마 다시 보기와 필력 좋은 유명 작가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뿌듯함 정도로 받은 셈 치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 나의 말, 나의 글, 나의 생각, 나의 태도, 나의 신념 그 모든 나의 것이 과연 온전히 진정한 나의 것이었는지, 나 또한 살아오면서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빌려온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하여 내가 지식재산권을 지불해야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 것인지, 아찔하고 아득한 기분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딸도 우리의 대화가 드라마에 나왔다며 신기해했다. 되돌아보면 아이의 성장기를 통틀어 그날 나의 ‘계단 이야기’가 어떤 분기점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딸은 ‘계단 이야기’ 같은 것을 믿으며 공부하지는 않는다. 내 인생의 궁극적인 원동력은 오로지 나 자신이며, 아무리 나약하고 흔들리더라도 그런 자기 자신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다짐조차 잊은 것은 아닌지, 머리가 아프고 명치가 답답하다.